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37화 (37/112)

37화.

“그때 그 트랩은 어쩌다 작동됐어?”

“트랩을 건드린 게 아니야. 우린 그냥 약초를 채집하고 있었어. 그러다가…….”

카일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세아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사실 이미 다 아는 얘기지만, 카일리에게는 힘겨운 이야기일 것이다.

“기억이 안 나. 그냥…… 스테파니를 잃어버렸다는 것밖엔…….”

“그래. 그럼 여기서 약초 채집해.”

“응?”

카일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린 동생을 잃은 슬픔에 잠기기도 전에 세아가 뺨을 후려쳐 깨운 느낌이었다. 세아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채집 스킬은 있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약초 하나도 빼놓지 말고 싹 다 채집해. 전부 다.”

“뭐? 대체 왜…….”

“약초 던전에는 약초 던전만의 트랩이 있어. 특정 약초를 채집하려고 하면 발동되는 트랩일 거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니, 여기 있는 약초를 어떻게 다 채집하라고?”

이 약초 던전은 웬만한 축구장보다 훨씬 더 넓었다. 카일리의 의문은 지당했지만, 세아는 다른 대안을 내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카일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카일리, 난 정신이 나간 게 아니야. 내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야. 이 약초들을 채집하다 트랩을 발견하면 네 동생을 찾을 수 있어. 어려운 일 아니잖아.”

카일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세아는 더는 설득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진실을 말했으니까.

지난 생, 한 평범한 헌터가 이 던전에서 스테파니의 시신을 찾아 냈다. 그는 카일리처럼 충격으로 인한 해리 장애를 앓지 않았으므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설명했다.

그날도 그는 그냥 평소처럼 약초를 채집하고 있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 채집하는데, 갑자기 앞에 거대한 구멍이 열렸다. 위험할지도 몰라 신고했고, 구멍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스테파니의 시신을 건져 올렸다.

“할게.”

곧 카일리가 단단한 어조로 답했다.

“너 믿을게, 세아.”

“그래. 그럼 하고 있어. 난 어디 좀 다녀올 테니까.”

“어, 어디 가는데?”

세아는 돌아서다 말고 카일리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대답은 무척 간단했다.

“정이준 부모님한테.”

13.26

세아는 약초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첫 신호음이 끊기기도 전에 응답했다.

“세아 씨.”

익숙한 목소리다. 세아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며 용건부터 꺼냈다.

“혜진 씨, 누구 정보 하나만 줄래요?”

“누구 정보인데요?”

“정이준 헌터요. 부모님이 어디 사시는지 좀 알 수 있나요?”

“잠시만요.”

건너편에서 타닥타닥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아는 일단 차를 탈 수 있는 곳으로 나가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미행하는 사람은 없다.

가능성은 두 가지. 여기 있는 걸 협회가 아직 모르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무언가 준비하느라 찾아오지 않거나. 자신을 제거하려면 정이준이 필요하다는 걸 알 테니, 그에게 먼저 손을 쓰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곧 건너편에서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찾았어요. 주소만 불러 드리면 되나요?”

“문자로 보내 주세요. 고마워요.”

용건이 해결된 후 바로 통화를 끝내려 했는데, 혜진이 붙잡듯 다급하게 불렀다.

“세아 씨, 잠깐만요!”

“네?”

세아는 일단 자리에 멈춰 섰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 기다렸는데 혜진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잘 지내죠? 오랜만에 통화하잖아요.”

“아…… 네. 저야 늘 똑같죠.”

김혜진은 재앙이 발발한 날 슬라임에 갇혀 질식사할 뻔했다. 그런 그녀를 구해 준 게 세아였다. 사실 혜진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니 일단 손을 뻗은 것뿐이었다.

운 좋게 각성하지 않았다면 세아 역시 슬라임 안에서 혜진과 함께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혜진을 위해 희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인 것뿐이니까.

하지만 혜진은 세아를 은인으로 생각했다. 세상이 미쳐 버린 후 따로 만났을 때, 그녀는 세아의 손을 덥석 붙들고 이런 인사를 건넸다.

‘그날 세아 씨 아니었다면 전 죽었을 거예요. 다른 사람은 다 달아나는데 세아 씨만 저한테 와 줬어요. 앞으로……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면 꼭 말씀해 주세요. 뭐든 도울게요.’

세아는 이럴 필요 없으며 자신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대답했고, 보답 같은 건 전혀 필요 없었다.

물론 김혜진이 한국 3대 길드 중 하나인 ‘알고리즘’의 정보팀에 취직한 후에는 얘기가 달라졌다.

길드가 헌터의 집단이라도 후방에서 서류를 처리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지원팀은 반드시 필요했다. 위험한 일도 적고 급여도 높아, 많은 미각성자가 거대 길드의 사무직이 되고 싶어 했다. 혜진 역시 그중 하나였다.

알고리즘의 정보팀에 취직했음을 알리며 혜진은 전에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제 더 많이 도와드릴 수 있어요.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주세요.’

히든 퀘스트 내용을 획득하기 전까지 세아는 혜진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히든 퀘스트의 내용을 확실히 알게 된 후에는 혜진에게 자주 전화했다. 클리어 조건을 알아내기 위해서. 지금의 혜진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세아는 잠시 걸음을 옮겨 던전 밖 나무 그늘로 향했다. 햇빛을 피한 그녀가 나무에 살짝 기대섰다.

“혜진 씨도 잘 지내죠?”

“네.”

“다른 S급 헌터 정보 알려 주면 곤란해질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미안해요,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요.”

“괜찮아요. 아무도 모를 거고, 안다고 해도 세아 씨 부탁인 걸요.”

세아가 살짝 웃었다. 평화롭던 시절의 인연이어서인지, 아니면 혜진이 유독 살갑게 굴어서인지 그녀와 대화할 때는 편안하다. 꿍꿍이 없는 느낌에 마음이 느긋해진다.

“잘리면 어떡해요?”

“잘리는 거죠.”

누가 보면 남의 직장 이야기하는 줄 알겠네. 다시 웃음이 나서 세아는 툭 내뱉었다.

“뭐, 그럼 내가 먹여 살릴게요. 그럼 몸조심하고, 끊어요.”

통화 종료 후 문자가 도착했다. 세아는 주소를 확인한 후, 이번에는 자기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마 아직도 인도에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목소리를 명랑하게 바꾸었다.

“어, 엄마. 혹시 어디야?”

13.27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 보이는 목조 건물이 나타났다. 외관은 동화 속에 나오는 통나무집처럼 평범했고, 마당도 그리 넓지 않았다. 외아들이 S급 헌터인 만큼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나마 서울에 있는 곳이라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또 몇 시간을 차를 타고 달려야 했을 테니까.

세아는 아담한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두드렸다. 곧 사람이 나왔다.

“누구세요?”

이준은 어머니를 더 닮은 게 분명하다.

누가 봐도 정이준 어머니 같은 사람이 서 있었다. 목 늘어난 티에 통 넓은 냉장고 바지. 그런데도 얼굴이 말끔하고 머리도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지저분해 보이지 않았다. 세아는 일단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 이준이 아는 누나입니다. 이름은 이세아라고 하고요…….”

“어, 이세아 헌터!”

이준의 어머니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그러더니 어머, 어머,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집안을 향해 마구 소리를 질렀다. 대충 이세아 헌터가 왔으니 빨리 나와 보라는 소리였다.

불청객 취급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세아는 어색한 미소를 띤 채 가만히 기다렸다. 집에서 사람이 나오기도 전에 이준의 어머니가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수줍게 고백했다.

“누군지 알아요. 저, 저…… ‘세세’ 1기거든요.”

“아.”

세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세세’란 ‘세아 세상’의 줄임말로, 이세아의 공식 팬클럽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조용하고 행복한 덕질하여 세아를 이롭게 하자.’

“아, 네……. 1기시구나…….”

“우리 이준이랑 아는 사이였어요? 자식 아무 소용없네, 자기 엄마가 세세인 거 알면서 어떻게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웬만하면 당황하는 일이 없는 세아도 이번만큼은 좀 놀랐다. 이준의 어머니가 팬클럽 회원이라니, 이렇게 당황스러울 데가. 이준이 왜 자기에게 한 번도 말한 적 없는지 알 것 같았다.

어쨌든 이대로 현관에 서 있을 순 없었다. 세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선생님.”

“선생님이라뇨. 그냥 아줌마라고 불러요. 아휴, 세상에, 아휴, 나 실물 영접한 거 처음이야, 어머.”

무척 젊게 사는 분이었다. 어색하게 웃던 세아는 이대로는 말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내뱉고 보기로 했다.

“갑자기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이준의 어머니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미각성자이긴 하나 아들이 S급 헌터인 만큼, 위험 상황에 대한 경계는 확실한 듯했다. 다행히 안에서 이준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도 걸어 나왔다. 한 번에 이야기할 수 있겠다. 세아는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이준이 상황이…….”

세아는 담백하고 간단하게 사실을 전했다.

협회가 중요한 이유로 이준을 잡아 갔고, 그를 협박할 것이다. 가족은 인질이 되기 딱 좋다. 이준이 잘 이겨 낼 것이니 그때까지 미각성자인 부모님은 피해 있는 게 옳다.

‘최초의 버그’니 ‘정화’니 하는 이야기까진 하지 않았다. 이쪽에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 세아의 위치나 상황을 협회에 전할지도 모른다. 그건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세아는 그저 위험을 전하기 위해 온 전령인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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