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38화 (38/112)

38화.

대략적인 이야기가 끝나자, 이준의 어머니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사실 우리도 지난 5년 동안 협회를 그리 좋아하진 않았어요. 그럼 우린 어디로 피하면 되죠?”

“저희 부모님이 두 분 다 A급 헌터세요. 괜찮으시다면 그분들과 만나서 안전한 곳에 가 계시는 게 어떠세요? 제가 이야기는 해 놨습니다. 일단은 그게 제일 안전할 거예요.”

“이세아 헌터 부모님이랑요? 너무 좋죠, 너무 좋죠! 어린 시절 사진도 살짝 봐도 될까요? 인터넷에 올리진 않을게요!”

“…….”

아들이 협회에 잡혀 갔다는데 반응이 너무 덤덤하다. 세아도 적응이 빠르고 걱정이 덜한 편이지만, 이건 좀 낯설었다.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자 뜻을 오해한 이준의 어머니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너무 개인정보죠? 미안해요, 괜히…….”

“아, 아뇨. 당연히 보셔도 됩니다. 그냥 저는, 이준이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걱정 안 해요.”

이준의 어머니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곧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준이가 생긴 건 그래도 강하거든요.”

세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두려워하면서도 강하게 버티고 서서 아들은 강하다고 말하는 부모에게 그가 세뇌당하거나 강한 최면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네, 이준이는 강하니까요.”

그 정도 대답이 세아의 최선이었다.

13.28

약초 던전으로 돌아가니 카일리는 열심히 약초를 채집하고 있었다.

위치를 알면 좋을 텐데, 세아도 대강의 경위만 알 뿐 트랩의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게다가 랜덤 트랩이니 위치는 수시로 바뀔지도 모른다. 세아가 한숨을 내쉬며 카일리 옆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카일리, 괜찮아?”

웬만하면 괜찮겠거니 하는데, 카일리의 얼굴은 땀범벅이었다. 세아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너 채집 랭크 낮아?”

채집 랭크가 낮으면 낮을수록 기력 소모가 크다. 카일리는 대답할 힘도 없는지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아는 한숨을 참았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먼저 협회를 습격해도 시원찮을 판에 여기서 약초나 채집해야 한다니.

그래도 세아는 마음을 달리 먹었다. 일단 여기까지 온 거 최선을 다하자. 채집하면서 앞으로의 계획도 정리하고…….

세아가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 벽에 있는 약초를 쥐어뜯듯 채집했다.

바로 그 순간.

쿠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갑자기 몇 걸음 떨어진 곳의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지진이 난 듯 던전 전체가 흔들렸고, 카일리는 땀에 젖은 얼굴을 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후, 진동은 멎었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나타난 선명한 크레이터.

카일리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너, 너 어딘지 알고 있었어……?”

“아니.”

세아도 얼떨떨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둘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세아와 카일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한 후 함께 벌어진 틈으로 뛰어내렸다.

몸은 깃털처럼 가볍게 바닥에 닿는다. 발아래는 부드러운 흙, 숨을 들이쉬자 강한 약초 냄새에 콧속까지 얼얼했다.

깊은 지하로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라 주위는 무척 어두웠지만, 둘은 스킬을 사용해 주위를 밝힐 필요가 없었다. 이미 빛이 있었으므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빛나는 약초를 채집해 만든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 웅크린 자그마한 몸. 이쪽에 등을 보인 상태였다.

거리가 그리 가깝지 않아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카일리가 두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세아가 재빨리 다가가 카일리를 부축했다. 카일리는 온몸을 덜덜 떨면서,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하면서 거의 기다시피 불빛 쪽으로 나아갔다. 세아는 카일리의 심정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카일리는 거의 꺽꺽거리듯 호흡하며 겨우 걸었다. 몇 걸음 다가가니 스테파니의 몸이 가볍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선명히 보였다. 밀려오는 안도에 압도당한 카일리가 털썩 무너지며 절규하듯 외쳤다.

“스테파니!”

갑작스러운 자극에 작은 몸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스테파니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쌘 몸놀림으로 벌떡 일어나 경계 자세를 취했다. 한 발은 앞으로 뻗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그녀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준비를 했다. 언제 쥐었는지 손에는 예리한 단검까지 든 채였다.

그 모습을 본 카일리가 통곡하며 동생을 불렀다.

“스테파니! 스테, 스테파니, 흐어어, 언니야, 스테파니! 언니야, 카일리야, 내 동생, 내 동생!”

“언…… 니?”

스테파니의 목소리는 공간만큼이나 어둡고 낮았다. 카일리는 세아의 부축도 뿌리치고 네 발로 기어 동생에게 다가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 허리를 와락 감싸 안았다. 사람 소리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기괴한 울음이 벽에 부딪쳐 울렸다.

세아는 이 감격의 재회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스테파니는 멍한 표정으로 언니를 내려다보고, 또 고개를 들어 세아를 바라보고, 지상의 빛이 새어들어 실금이 간 듯 보이는 까마득한 허공도 올려다보았다.

스테파니의 무미건조한 얼굴에 서서히 감정이 깃들었다. 눈썹 사이가 좁아지고 콧잔등에 주름이 가고 입에도 힘이 꽉 들어가 강하게 다물렸다. 울음을 터뜨리겠구나, 세아가 그렇게 예상한 순간.

“저리 꺼져!”

스테파니가 카일리의 어깨를 있는 힘껏 밀쳐 버렸다. 갑자기 나동그라진 카일리와 뜻밖의 광경에 당황한 세아가 돌처럼 굳어 버린 사이, 스테파니는 홱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달아나버렸다.

멍하게 스테파니의 뒷모습만 보던 세아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자 카일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카일리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스테파니! 스테파니, 어디 가!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카일리는 번쩍 정신이 든 듯 비명처럼 외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앞으로 한 발 내딛자마자 고꾸라졌다. 아무리 부드러운 흙바닥이어도 돌 위로 넘어지면 까지는 법이라, 카일리의 무릎에 피가 맺혔다. 상태를 보니 이성이 완전히 날아간 듯했다.

세아는 침착하게 그녀에게 뛰어가 바닥에 무릎을 대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카일리, 여기서 잠깐 기다려. 내가 쫓아가 볼게.”

“이러다 또 놓치면 어떡해. 어떡해, 겨우 찾았는데!”

“너 이 상태로는 몇 걸음 걷지도 못해. 네 동생 따라가는 데 방해만 된다고.”

냉정한 말이었는데, 카일리는 오히려 그 차가움에 정신이 든 것 같았다. 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세아를 보더니 입 안쪽 살을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받치는 울음을 누르려는 듯 어깨가 들썩였다.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

세아는 다시 다짐을 받고 그대로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세계의 약초 던전은 지하를 통해 이어져 있다. 물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므로 미래를 살아 본 세아만 아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도보로 이어진 건 아니고, 고유한 포털이 존재했다. 미국 약초 던전에서 실종된 스테파니가 갑자기 한국 약초 던전의 지하에서 발견되는 건 바로 이 포털 때문이었다. 혼자 이리로 떨어져 헤매던 스테파니는 우연히 이리로 오는 포털을 건드렸을 것이다.

“스테파니?”

세아는 뛰면서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쉽게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트랩을 건드려 열린 크레바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닫혀 버린다. 계속 시간을 낭비하다간 자기마저 여기 갇히게 될지도 몰랐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스테파니는 아직 성인이 되지도 않았다. 열여덟 아니면 열아홉, 그 정도일 것이다. 게다가 헌터 등급도 낮고 공격형 스킬을 많이 보유한 것도 아니라 발견만 하면 잡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씨발, 길이 어디야?”

문제는 세아가 이 안의 지리를 전혀 모른다는 것.

스테파니는 한 자리에 정착했지만 농사를 지은 건 아니다. 먹을 것과 자원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안을 돌아다녀야 했을 테니 누구보다도 근처 지리에 밝을 터다. 그러나 세아는 눈앞에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멈춰야 했다.

세 갈래로 갈라진 길을 앞에 두고, 세아는 고심했다.

이대로 술래잡기를 계속할 수는 없다. 주위는 어둡고 축축하고 조용하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가능성은 둘. 스테파니가 이미 너무 멀리 갔거나, 아니면 근처에 숨어 있거나.

‘스스로 나오게 하자.’

결론을 내린 세아가 입을 벌려 영어를 쏟았다.

“스테파니, 우린 널 구하러 온 거야. 네가 골 빈 애처럼 던전 안을 돌아다니다 트랩을 건드렸지만 우리가 일부러 널 찾으러 왔다고. 발을 헛디뎌서 떨어진다니, 웬만큼 멍청하지 않고서야 말이 돼?”

그때, 날카로운 단검이 정확히 세아 쪽으로 날아왔다. 세아는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단검을 가볍게 피한 후, 힘을 끌어올려 가운뎃길로 질주했다.

달아나듯 가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곧 세아는 손을 뻗어 그대로 스테파니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아악!”

비명과 함께 스테파니가 뒤로 넘어졌다. 세아는 제때 손을 놓아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스테파니가 일어나기 전에 재빨리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탔다. 세아 주위로 빛나는 구가 생겨나며 주위를 밝혔다.

“안녕, 스테파니.”

영어로 인사하니 스테파니가 반응했다. 얼굴 근육을 움찔한 스테파니가 빠른 속도로 영어를 쏟아냈지만 세아는 그 이야기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울음과 비명에 묻혀 발음도 엉망이었다.

“천천히, 스테파니. 천천히.”

어린애를 다루는 방법은 잘 모른다. 그래도 본 건 있어서, 세아는 가쁘게 오르내리는 스테파니의 가슴에 손을 얹어 다독였다. 그런 다음 땀과 눈물에 젖어 지저분해진 뺨을 대강이나마 닦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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