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헉, 헉……. 스테파니의 숨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 반쯤 정신이 나가 있을 줄 알았는데, 카일리보다 진정이 빨랐다. 어쩌면 더 강한 건 동생 쪽인지도 모르겠다, 쓸모없는 잡생각이 스쳤다.
스테파니가 흥분을 가라앉히자 세아도 그녀의 몸에서 내려왔다. 스테파니는 천장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허리를 똑바로 펴고 앉은 그녀가 세아를 쏘아보았다.
“당신이 카일리 데려왔어?”
세아는 잠시 망설였다. 카일리는 한국어를 알아들어서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지만, 이쪽은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짤막하게 영어로 답했다.
“그래.”
“하, 왜, 이번엔 완전히 죽이려고?”
“뭐?”
자기도 모르게 한국말이 튀어나갔다. 그러나 스테파니는 했던 말을 반복하는 대신 다른 말로 쐐기를 박았다.
“그날 트랩 안으로 날 민 건 카일리야.”
‘그럴 리가.’
반사적으로 의심부터 치밀었다. 그러나 스테파니의 확신이 너무 강해서, 세아는 반박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카일리와 스테파니는 평소처럼 약초 던전에서 놀고 있었다. 채집도 하고, 제작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면서 평범하게. 카일리는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 나는 언니치곤 동생과 잘 놀아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때, 카일리가 건드린 약초 때문에 트랩이 열렸다. 이게 뭐지, 하고 다가가서 몸을 기울이는 순간.
툭, 따뜻한 손이 등을 밀었다.
거기엔 자매 둘뿐이었다. 게다가 아래로 떨어진 후에 한참을 불렀는데 카일리는 내려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크레바스가 닫히고 스테파니는 어둠 속에 홀로 남았다.
홀로.
세아는 스테파니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대꾸했다.
“스마일맨일 수도 있어.”
“스마일맨?”
세아는 스마일맨이 어떤 몬스터인지 설명해 주었다. 내내 여기 갇혀 있었던 스테파니는 시스템 속성 몬스터가 뭔지도 몰랐다. 세아는 참을성을 가지고 모든 걸 설명했다. 그러면 스테파니가 슬픔과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언니인 카일리에게 뛰어갈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스테파니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그래서?”
“뭐?”
“그게 정말 그 몬스터였는지 언니였는지 모르잖아.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저기 있는 게 카일리가 맞다고 어떻게 확신해? 게다가 약초 던전에 몬스터가 나타나는 건 드문 일이야. 그건 분명 카일리였어.”
“…….”
세아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너 되게 야무지구나.”
“뭐라고?”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할 거야? 크레바스가 곧 닫힐 거야. 나가려면 지금뿐이야.”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내자 스테파니가 눈을 홉뜨고 세아를 노려보았다.
“나가고 싶으면 카일리 믿으라고? 같이 가라고?”
“아니, 따로 가고 싶으면 따로 가. 카일리랑 있기 싫으면 내가 다른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줄게. 내 말은 그냥, 크레바스가 닫히기 전에 올라가야 한다는 거야.”
스테파니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세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뱉듯 물었다.
“이름이 뭐야?”
내내 갇혀 있었다면서, 빨리 나가고 싶을 텐데 한가하기도 하다. 세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착실히 대답을 해 주었다.
“세아.”
“세아? 한국 S급 헌터?”
“그래, 그래, 아는구나. 그럼 일단 위로 올라가지 않을래? 나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거든.”
“카일리 얼굴 보기 싫어.”
“알겠어. 내가 이야기할게. 넌 거리 좀 두고 따라와.”
마음이 급했다. 주위에서 슬슬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크레바스 입구가 곧 닫힐 것이다. 세아는 허둥지둥 달려 카일리에게로 돌아갔다.
13.29
지상으로 올라오자마자 우르릉, 소리와 함께 크레바스가 닫혔다. 세아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몸서리를 쳤다. 안에서 1분이라도 더 미적거렸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세아의 손을 잡고 함께 올라온 스테파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내내 어두운 곳에 있다가 지상으로 오니 적응이 어려운 모양이었다. 손으로 빛을 차단하면서도 카일리가 있나 없나 살피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카일리는 먼저 나가 있으라고 했어. 이미 던전 밖으로 가고 있을 거야. 부모님 댁으로 보내 주고 싶지만……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서 일단 한국에 머물러야 해. 괜찮겠어?”
“괜찮아. 어차피 지금 공항 가면 사진 찍힐 거고.”
세아는 스테파니의 깡마른 몸을 바라보며 확실히 지금 이 상태로는 사진 찍히기 싫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보기 흉측할 정도는 아니지만, 몸 전체에 굶주림과 고독의 기운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녀의 움푹 꺼진 눈을 살피다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부모님 집으로 갔으면 싶어. 거기 도착해서 너희 부모님이랑 연락해 보자.”
“응.”
오래 갇혀 있었던 사람치고는 말투도 태도도 차분했다.
세아는 던전 밖으로 나와 차에 올랐다. 부러 기사를 부르지 않고 직접 운전했다. 세아와 이준의 부모님이 함께 머무는 곳까지 가는 동안, 스테파니는 별다른 말 없이 조용했다.
13.30
카일리가 기다리는 던전 근처의 카페로 갔을 때, 카일리는 울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얼굴을 보며 세아는 생각했다.
‘아직도 울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스테파니를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왔으니 시간이 꽤 걸렸다. 카일리에게 진정할 시간을 주기 위해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 건데, 아직도 울고 있으니 착잡했다. 세아는 천천히 다가가 카일리 맞은편에 앉았다.
“스테파니는?”
카일리가 축축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코가 꽉 막혀 있었다.
“잘 데려다줬어. 오래 혼자 있었는데도 금방 적응하더라.”
“아직도 나 보기 싫대?”
잠시 멈칫한 세아가 자신 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아마 스마일맨을 실제로 보면 생각이 바뀔 거야.”
“그럼 난 그 몬스터 때문에, 3년 만에 만난 동생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전화도 못 해? 같이 식사 한 번도 할 수 없는 거야?”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세아에게는 질문이 하나 남아 있었다.
“카일리……. 그런데 너, 스테파니 사라질 당시의 상황 기억 못 하잖아.”
카일리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녀는 찌를 듯한 눈빛으로 세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세아도 확인은 해야 했다. 물론 지금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스마일맨이지만, 카일리도 완전히 믿을 순 없었다.
곧 카일리가 따지듯 물었다.
“정말 내가 스테파니를 밀기라도 했다는 거야?”
“내 말은, 넌 기억을 못 하니까…….”
스테파니는 카일리가 밀었다고 확신했다. 물론 스마일맨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카일리의 해리는 확실히 미심쩍은 데가 있었다.
그러나 카일리는 몹시 모욕적인 이야기를 들은 듯 얼굴을 굳혔다. 곧 그녀의 입술에서 거센 항변이 쏟아졌다.
“난 한 번도 걜 해칠 생각을 한 적 없어. 단 한 번도! 대체 내가 왜 내 동생을 죽이려고 하는데? 기억 안 나는 건 나도 진짜 답답해. 하지만 절대, 절대 내가 그랬을 리 없어. 절대로!”
스테파니도 날 믿어 줘야 할 텐데, 가느다랗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세아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달랬다.
“그럼 시간을 좀 갖고 기다리자. 스테파니도 내색은 안 해도 힘들 거야. 걔한테 너무 서둘러서 많은 걸 강요할 순 없어.”
카일리는 그 말에 동의했지만 여전히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글펐다. 그녀는 완전히 지친 듯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였다. 세아는 섣부른 위로의 말을 모두 삼키고 침묵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일리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세아와 눈을 맞춘 그녀가 결연한 어조로 불렀다.
“세아.”
“응.”
“던전을 다 없앤다고 했지? 그럼, 시스템을 없애는 거지?”
“그래.”
카일리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도울게.”
세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일리의 도움을 얻고자 한 건 맞지만, 이렇게 빨리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혼란스럽고 힘겨운 나머지 아무렇게나 결정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바라보니 카일리의 두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온 세상과 싸울 준비가 된 듯 불타는 눈이었다. 카일리는 젖어 묵직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제 이런 세상에서 안 살래.”
13.31
세아와 카일리는 던전을 떠나 집으로 향했다. 세아가 운전하는 차에서 카일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너희 집은 너무 위험하지 않아?”
“협회 때문에? 괜찮아.”
협회가 움직일 수 있는 헌터는 생각보다 많을 텐데 아직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저쪽도 당장 덮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게다가 어차피 이준의 정화 스킬이 아니면 세아를 죽일 수 없으니, 이준을 충분히 설득하거나 세뇌하기 전까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세아는 부드럽게 핸들을 꺾었다. 차는 마침내 세아의 집 앞에 섰다. 세아는 차 문을 열고 내려 정원을 가로질렀다. 현관문을 열며 살짝 카일리를 돌아보니, 그녀는 기운 없는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세아가 툭 그녀를 불렀다.
“카일리.”
“아. 응?”
“너 좀 쉬어야겠다. 너무 피곤해 보여.”
“아냐, 뭘 했다고.”
말은 그렇게 해도 충격이 클 것이다. 3년 만에 동생과 만났는데, 동생은 언니가 제 등을 밀었다고 주장하며 얼굴도 보지 않으려 들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카일리는 그 시기의 기억이 해리된 상태, 본인도 혼란스러울 게 분명했다.
세아는 카일리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일단 땀에 젖은 몸을 좀 씻으라고 카일리를 욕실로 보냈다. 그런 다음 자신은 씻는 걸 잠시 미루고 식탁 앞에 앉아 눈가를 꾹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