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남겨 두고 온 정이준이 걱정이다. 세뇌와 최면에 능한 오스카가 그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 이준은 최대의 변수가 될지도 모른다. 그가 S급 헌터의 스킬을 이겨 낼 정도로 강한 정신력을 가졌을까?
당장 그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려면 반드시 그가 필요하니 서둘러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아니, 사실 진짜 걱정은 이게 아니다.
이준은 괜찮을까. 분명 협회에서 험하게 다룰 것이다. 그 역시 S급 헌터고 어린애가 아니니, 조금 얻어맞거나 굶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같이 밥을 먹었었는데. 세아는 두 번의 식사를 떠올렸다. 함께 밤을 보낸 후, 이준은 일찍 일어나 아침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 생, 집에 초대해 줘서 고맙다며 근사한 한 상을 차려 주었다.
밥을 먹으며 특별한 대화를 한 것도 아닌데 생각이 났다. 그냥, 생각이 났다.
핸드폰이 진동한 건 그때였다.
세아는 깜짝 놀라 핸드폰을 확인했다. 전화한 사람은 김현호였다.
순간 이준이 달아나서 전화를 건 줄 알았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세아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어, 이세아. 잘 있냐?”
“…….”
세아는 바로 답하는 대신 사이를 두었다.
S급 헌터 중에서는 김현호와 ‘그나마’ 가깝긴 하지만 용건 없이 통화하는 사이는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어 전화했을 텐데, 그는 바로 목적을 이야기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내일 비 온다고 하더라. 어쩐지 오늘 너무 흐리지 않았어? 너무 습하니까 집에서 나가기가 싫다, 진짜.”
“어, 그치. 차라리 비 시원하게 오는 게 낫다.”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을 살폈다. 김현호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녀는 가지런히 꽂힌 칼이나 정갈하게 정돈된 컵을 들었다 놨다 하며 주의를 분산시켰다.
그때, 카일리가 밖으로 나왔다. 짧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몸은 커다란 수건으로 감싼 상태였다. 카일리는 세아가 통화하는 걸 보더니,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입만 벙긋거려 물었다. 혹시 입을 옷 있어? 정확히 알아들은 세아는 부러 목소리를 냈다.
“잠깐, 김현호. 카일리, 내가 금방 옷 찾아줄게. 그냥 실내복이면 되지?”
“카일리랑 있어?”
김현호가 핸드폰 너머에서 물었다. 어,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세아가 카일리와 함께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길게 머무는 집이 아니라, 드레스 룸에 걸린 옷도 대부분 새 옷이었다. 세아는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파란 실크 잠옷을 꺼내 카일리에게 건네주었다.
“그거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거 골라. 어차피 난 잘 안 입어.”
“카일리가 어쩐 일로 너희 집에 갔어?”
“김현호.”
세아는 옷을 입는 카일리를 두고 돌아서며 뱉었다.
“모르는 척하지 마. 너 이미 알고 전화했잖아.”
허를 찔린 듯 김현호가 잠시 침묵했다. 세아는 그에게 한 번 찔려 죽었던 드레스 룸에 서서 덤덤한 투로 말했다.
“협회가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 없으니, 너 시켜서 나 감시하라고 한 거 아니야? 어디까지 들었어, 전부 들었어?”
“그래. 네가 시스템 없애려고 하는 것까지 전부. 진짜 그럴 거야?”
“어, 그럴 거야.”
“하지 마.”
“싫어, 개새끼야.”
세아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아무래도 김현호와는 악연인 것 같다. 이전 생에서 그는 서아정의 말만 듣고도 자신을 죽였다.
언뜻 보면 애인 말을 참 잘 듣는 사람이구나 싶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저 시스템이 사라지는 게, S급 헌터로서의 지위를 잃는 게 두려웠겠지. 그 속이 너무 투명하게 들여다보여 세아는 무섭지도 않았다.
옷을 다 입은 카일리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며 물었다.
“세아, 왜 그래?”
“김현호인데, 아무래도 우릴 감시하려나 봐.”
“감시해? 김현호가 왜?”
“너도 아까 들었잖아, 협회는 내가 최초의 버그고 그래서 시스템을 없애려 한다고 생각해. 근데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 없으니 김현호를 시킨 거겠지.”
카일리는 심각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세아를 향해 말했다.
“그래, 그럼 이제 뭘 해야 할지 알겠네.”
“딱히 김현호까지 죽일 생각은 없어. 협회장 죽인 건 추적을 늦추려고 그런 거고, 아무나 죽여 버리면 안 되지.”
“아니, 죽이라는 게 아니라.”
눈이 동그래진 카일리가 고개를 저었다.
“협회가 김현호를 끌어들였다면서. 그럼 우리도 움직여야지. 다른 S급들이 다 협회 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야!”
“…….”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세아는 가만히 서서 자문했다. 사실 그녀는 정말 강한 헌터였고, 카일리를 도운 것도 그녀의 도움이 필요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카일리의 배반을 막고 싶었을 뿐. 그런데 지금 움직여서 다른 헌터들을 끌어들여야 할까?
“가만히 있다간 갑자기 습격당할 수도 있어. 우리도 우리 편이 필요해.”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이러다 갑자기 당한다면 또 처음부터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건 정말 상상만으로도 피곤한 일이었다. 세아는 카일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근데 사실 나 친한 S급 별로 없어. 공식 석상에서 만나도 눈인사 정도만 하고 지나갔는데.”
“나 아는 사람 있어.”
“누군데?”
세아의 물음에 카일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연인.”
13.32
중국은 처음이다.
전용기에서 내려 공항으로 가자마자 들리는 중국어에 압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세아는 중국어를 잘 할 줄 몰라서 카일리에게 의존해 움직여야 했다. 카일리가 앞장서서 이리저리 안내해 주니 편하기는 했지만, 낯선 땅이 주는 설렘과 불안이 묘하게 마음을 어지럽혔다.
공항을 빠져나가며 세아가 물었다.
“너 리웨이랑 친한 사이였어?”
“아니? 리웨이는 아무랑도 안 친하잖아.”
“그니까. 근데 어떻게 사는 곳까지 아나 싶어서.”
중국 출신 S급 헌터 리웨이는 협회도 두 손 두 발 다 든 기인이었다. 원래부터 산속에서 혼자 살았던 그녀는 갑자기 각성해 귀찮게 군다며 매번 투덜거렸다. 외모도 40대치고는 무척 젊어 보여서, 그녀를 본 헌터들은 ‘역시 자연이 좋은가 봐.’라고 수군대기도 했다.
리웨이는 헌터들과 일절 어울리지 않았고, 공식 일정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세아도 그녀의 얼굴과 이름만 알뿐 자세한 건 전혀 몰랐다.
카일리는 세아의 의문 앞에 어깨만 으쓱했다. 세아는 수상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설마…… 아니지?”
“응?”
“어디 사는지 모르는데 그냥 무작정 온 건 아니지?”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알지! 리웨이는 신선거에 산다고!”
“신선거?”
세아는 중국에 대해 잘 몰랐으므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마 어디 작은 동네 이름이겠거니 했다. 리웨이는 자연을 사랑하니, 어쩌면 산과 가까이 닿아 있는 평화로운 마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둘은 ‘신선거’를 향해 이동하고 또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선거’ 앞에 도착했다.
“여기라고?”
“응. 명산, 신선거!”
앞에는 과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웅장한 산이 버티고 서 있었다. 세아는 그대로 손을 들어 카일리의 뒤통수를 갈길 뻔했다.
“그래, 리웨이가 여기 사는구나. 그렇구나.”
“응.”
“여기 어디 사는데?”
카일리가 해맑게 웃었다.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13.33
미국 헌터 협회장, 엠마는 모니터로 오스카와 이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최면과 세뇌 스킬에 대해 잘 몰랐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았다. 그게 고도의 정신계 스킬이며 공격 스킬보다 훨씬 더 사용하기 어렵다는 것을.
실제로 오스카는 일주일 넘게 이준을 넘어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공격해서 되는 일이라면 정이준 정도야 쉽게 요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카는 이준의 정신을 안에서부터, 안에서부터 하나씩 망가뜨려야 했다.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상황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오스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협회에서 널 찌르는 걸 허락해 준다면 좋을 텐데.”
의자에 묶인 이준이 고개를 들어 오스카를 바라보았다.
모니터 너머로 이준의 웃는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스킬에 저항하느라 식은땀에 푹 젖었는데도 얼굴은 조금도 상하지 않고 오히려 어여뻤다. 엠마는 주름진 턱을 쓸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주위 협회원들은 숨을 죽인 채 협회장의 눈치만 살폈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거든.”
“그럼 찔러.”
“그럴 수야 없지.”
오스카가 손을 내밀어 이준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또박또박 일러 주었다.
“너는 멀쩡한 몸으로 이세아를 죽이러 가야 하니까. 안 그래도 이세아는 워낙 강한 헌터라 협회나 다른 S급도 힘을 못 쓰는데, 너라도 건강해야 하지 않겠어?”
“앞으로도 애 많이 써 봐, 그럼.”
이준은 웃는 얼굴로 이죽거렸다. 음식도 물도 제대로 주지 않아 지쳤을 텐데, 저렇게 빈정거릴 힘이 남아 있는 게 신기했다. 엠마는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모니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내 모든 스킬을 다 동원해도 이세아 헌터한테 상대가 안 돼. 세뇌에 성공한다 해도 이세아 헌터가 날 바로 죽여 버릴걸.”
“거짓말하지 마. 속박 스킬 있잖아.”
오스카가 찰싹, 가볍게 이준의 뺨을 쳤다. 이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약간 돌아간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오스카는 이준의 머리카락을 쓸며 속삭였다.
“카일리도 꼼짝을 못했다지? 그런 스킬이 너한테만 개방된 것만 봐도 네 운명을 알 수 있어. 최초의 버그를 좀 더 수월하게 없애기 위한 스킬이잖아.”
이준은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켰다. 오스카에게서 차갑고도 뜨거운, 기이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진다. 자꾸 머리카락이며 뺨을 만지작거리면서 세뇌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을 유지하려면 잠시 집중해야 했다.
그러는 중에도 오스카의 목소리는 달고 은밀하게 흘러들었다.
“그 운명을 인정하지 않는 건 너뿐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