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41화 (41/112)

41화.

“정이준, 너뿐이라고. 나약한 새끼.”

철썩, 이번에는 좀 더 강하게 고개가 돌아갔다. 이준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나약한 새끼한테 일주일째 절절매고 있는 넌 뭔데?”

이준도 알 수 있다. 정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지 오래다. 온종일 딱딱한 의자에 묶인 채 시간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지내다 보면 서서히 정신이 뭉개진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아직은 더 기다려야 했다. 자신을 완전히 길들이지 못한다면 협회는 움직이지 못한다. 이세아는 무조건 공격하여 무력화시키고 묶어 잡아 둘 정도로 만만한 헌터가 아니니까, 자신을 보내 단숨에 허를 찌르는 수밖에 없으리라.

‘좀 더 시간을 벌자.’

이준은 어금니로 입 안쪽 살을 있는 힘껏 짓씹었다. 뺨을 맞아 이미 터져 있던 살에서 다시 피가 솟았다. 불쾌한 비린내에 잠시 이성이 맑아졌다. 또 세아 생각이 났다.

누나는 나를 생각할까.

단 한 번이라도, 아주 잠시라도 나를 걱정했을까?

13.34

이준을 걱정할 틈이 없을 정도로 세아는 바빴다.

S급 헌터로 각성하며 체력이 늘긴 했지만, 신선거 전체를 뒤지고 다니는 건 미친 짓이었다. 카일리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다니면서도 세아는 문득 찾아오는 허탈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이럴 거면 그냥 협회로 쳐들어가서 다 쓸어버리는 게 나은 거 아닌가. 시스템 사라진 세상에서 내가 감옥에 가든 말든 다 때려치우고 죽여 버릴까…….’

그 와중에도 카일리는 해맑았다.

“경치 진짜 끝내준다. 이 구름이랑 안개 좀 봐. 진짜 동양 신선 나올 것 같지 않아?”

“신선이고 뭐고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

“여유를 가져, 세아!”

득도한 듯 격려하는 소리를 듣고 정말 주먹이 나갈 뻔했지만 세아는 겨우 참았다.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카일리 속도 말이 아닐 것이다.

어제는 침낭 속에서 카일리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애타게 그리던 동생이 자신을 오해한 데다 지금 당장은 그 오해를 풀 방법도 없으니 그녀 역시 답답할 것이다. 그래도 카일리는 날이 밝으면 기운찬 표정으로 산행에 나섰다.

세아는 그런 그녀에게 다 그만두고 협회나 때려잡으러 가자는 무모한 소리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헤매고 다니다간…….’

세아의 생각이 위험한 방향으로 튀는 순간, 카일리가 헉 소리를 내더니 손가락으로 먼 곳을 콕 찍었다.

“세아! 저기!”

아름다운 운무(雲霧) 너머, 깎아지른 듯 높다란 바위 위에 바로 그 사람이 서 있었다. 다 떨어져 가는 천 쪼가리를 걸친 자연인, 리웨이였다. 귀가 드러나도록 짧게 자른 머리는 무척 정갈했고, 드러난 맨발은 흙투성이였다.

그쪽도 세아와 카일리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세아는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리웨이가 마치 사자와 눈이 마주친 여우처럼 재빠르게 달아날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눈치채지 못한 카일리는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리웨이! 리웨이! 나예요, 카일리가 왔어요!”

세아의 예상이 맞았다. 리웨이는 홱 등을 돌려 우다다 뛰기 시작했다. 카일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나도 친한 건 아니라서.”

“알겠으니까 뛰자.”

세아는 이를 갈며 달리기 시작했다. 정이준이 있다면 속박 스킬을 써서 단숨에 잡았을 텐데! 애초에 그가 함께였다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다는 걸 잊고 세아는 잠시 그런 아쉬움에 잠겼다.

13.35

“헉, 헉…….”

세아는 드물게 숨을 몰아쉬며 두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절벽 끝에 다다르니 선경이 펼쳐졌다. 빼곡하게 솟은 봉우리와 그 사이로 용처럼 흐르는 운무,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는 별세계였다. 물론 관광하러 온 게 아니니 풍경을 즐기는 건 나중이었다.

세아는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며 리웨이를 노려보았다. 위풍당당하게 다리를 벌리고 선 리웨이가 외쳤다.

“날 여기까지 몰아 오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중국어 말고 영어로 좀 해 줄래요?”

예의 차릴 기분이 아닌 세아가 불퉁하게 내뱉자 리웨이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쩌면 중국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통역은 카일리에게 맡겨야 하는데…….

그 순간 리웨이의 입에서 유창한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한국인인가? 아, 한국 S급 헌터! 내가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해서.”

“이세아입니다.”

한국말을 한다니 정말 다행이다. 이미 너무 오래 산을 뒤지느라 지친 세아는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리웨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왔습니다.”

리웨이는 한동안 검은 눈으로 세아와 카일리를 바라만 보았다. 세아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대를 살폈다.

산에서만 살고 세상으로는 나오지 않아, 얼굴이며 손발이 꼬질꼬질할 줄 알았는데 온천수에 씻은 듯 깨끗했다. 발에 묻은 것도 산의 맑은 흙이었다. 분명 40대인 걸로 아는데 30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기운이 연약하지 않고 굳건했다. 허리도 목도 어깨도 전혀 굽지 않았다. 몸이 처음 만들어진 그대로,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보유한 스킬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같은 편으로 만든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협회 문제라면 난 아무도 돕지 않아.”

“…….”

세아도 카일리도 깜짝 놀랐다. 그가 협회 문제를 이미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세아는 미심쩍은 투로 물었다.

“혹시 협회에서 찾아왔었나요?”

“그래. 어제.”

한발 늦었군. 세아는 낭패감에 혀로 입술을 적셨다. 협회에서 이미 자기들 좋을 대로 이야기를 꾸며 전달했을 것이다. 리웨이가 돕지 않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일까?

리웨이는 한동안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호쾌하게 외쳤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차 한잔은 대접해야지. 날 따라오라고!”

13.36

이름 모를 쑥색 차는 무척 썼지만, 떫거나 텁텁하지는 않았다. 마치 쓴 크림처럼 목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처음에는 쓴맛에 얼굴을 찌푸렸던 카일리도 금세 맛을 느낀 듯 컵을 자주 기울였다.

세아는 리웨이의 거처를 둘러보았다. ‘자연인’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뭐든 대강대강 다 엉망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컵 하나를 만들어도 정성껏, 숟가락 젓가락도 매끈매끈, 나무로 만든 집도 웬만한 텐트보다 나았다.

“정성스럽게 사시네요.”

세아는 한마디 칭찬을 건넸다. 리웨이는 세아를 보고 빙긋 웃었다.

“그렇게 아부해도 너희를 돕지는 못해.”

“아부가 아니라요.”

세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마른 풀 냄새, 젖은 흙냄새……. 높고 또 낮게 날아드는 새소리, 코를 자극하는 은은한 향. 리웨이가 왜 그렇게 당당하고 시원해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왜 돕지 않겠다고 하는지도.

카일리는 기다리는 대신 찻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협회가 와서 뭐라고 하던가요?”

“너희가 오면 말해 달라고 하던데.”

리웨이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그러나 세아도 카일리도 그녀가 정말 협회에 연락하지 않을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리웨이는 차를 홀짝이다가 만족스러운 소리를 토했다.

“이 차 한 잔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데 내가 왜 나서겠어. 다 부질없는 짓이야. 너희도 너무 애쓰지 말고 적당히 살아.”

열 번 넘게 회귀한 세아는 그러려니 했는데, 카일리가 더 욱했다. 동생 일이 해결되지 않아 마음이 부글부글 끓는 듯 그녀가 톡 내쏘았다.

“한가한 소리 할 수 있어서 좋겠네요. 시스템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고요. 가족끼리 이별하고…….”

“그건 시스템이 나타나기 전에도 똑같았잖아?”

“둘이 같아요?”

“뭐가 다른데?”

리웨이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 태도에 카일리는 더 화가 난 것 같았지만 할 말은 잃어버린 듯했다. 세아는 단정하게 앉아 있으면서도 온수에 잠긴 듯 편안해 보이는 리웨이를 보다 툭 물었다.

“그럼 협회한테도 그랬나요? 돕지 않겠다고.”

“그래. 난 평소에도 협회가 이것저것 하라는 게 싫었어. 던전 정리야 힘이 생겼으니 그냥 했지만, 아주 성가시다고.”

“여기 있는 카일리는 시스템 속성 몬스터 때문에 동생을 잃었었고, 이대로 두면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같은 비극을 겪을 거예요. 그런데도 두 손 놓고 구경만 하겠다니 너무 태평한 거 아닌가요.”

리웨이가 눈을 들어 세아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었지만 세아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카일리는 옆에서 세아 말이 맞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면서 책상다리로 앉은 게 불편한지 몸을 들썩였다.

어색한 고요 속에서 리웨이가 픽 웃었다.

“말은 잘하네. 협회 말로는 네가 ‘최초의 버그’라던데, 시스템을 죽일 운명이라고.”

“그래요. 그것 때문에 협회는 물론 같은 헌터들도 나를 죽이려 하죠.”

“넌 살고 싶어서 시스템을 죽이려는 건가?”

세아가 눈을 깜빡였다.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그런데 대답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은 딱 하나였다.

“설명해도 당신은 이해 못 할 거예요.”

“협회도 같은 말을 했지. 산에서 세월이나 죽이며 사는 S급은 이해 못 할 거라고.”

세아는 바로 답하는 대신 침묵을 지켰다.

대단한 도덕군자인 척할 생각 없다. 협회도 자신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울 뿐이다. 몇 가지 명분이 있지만 그건 다 허울일 뿐, 세아는 그저 지긋지긋한 회귀를 끝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협회와 똑같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아는 그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헌터들도 널 죽이려 한다고 했는데, 나처럼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S급이 더 많을 거야.”

“왜죠?”

세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김현호만 해도, 시스템 살해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얼굴을 바꾸어 친구의 배에 칼을 쑤셨다. 하물며 친구도 아닌, 가끔 공식 석상에서 얼굴만 본 자들이야 그보다 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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