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42화 (42/112)

42화.

카일리가 리웨이를 먼저 설득하자고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산에 묻혀 사는 리웨이는 욕심이 없을 테니 쉽게 끌어들일 수 있다고 믿었다.

세아의 반문을 듣고 리웨이는 빙긋 웃었다.

“몰라서 물어? 시스템이 사라지는 건 아까워도 이세아, 너랑 척지고 싶지 않으니까. 네가 마음을 바꿔서 협회 말고 S급 헌터들 목부터 잘라야겠다고 마음먹으면 큰일이잖아?”

“…….”

“그냥 협회와 네 싸움을 지켜보기만 하겠지. 자기들 살 궁리하면서.”

잘난 별장이며 요트도 좀 팔고 말이야, 그렇게 덧붙이며 리웨이가 낄낄 웃었다. 그녀의 웃음을 바라보던 세아는 이 헌터를 끌어들이는 일은 완전히 실패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S급 헌터들만 문제라고 생각하진 마라.”

리웨이는 웃음기가 덜 가신 얼굴로 서늘히 충고했다.

“A급, B급, C급이 더 무서울지도 모르지. 덜 가진 자들이 더 악착같으니까.”

“그래요.”

“시스템을 죽이면, 반드시 보복하려는 사람들이 생길 거야. 평범한 세상으로 돌아가면 넌 그냥 힘없는 여자애일 뿐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선택지는 둘뿐이었다. 죽고 돌아오기를 영원히 반복하며 사는 삶과 개죽음 당할지도 모르는 삶. 차라리 영원한 안식이 낫지 않겠는가.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반복했는데.

“힘없는 여자애라뇨.”

세아가 빙긋 웃으며 받아쳤다.

“돈이 지켜 주겠죠.”

“으, 속세 냄새.”

리웨이가 장난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남은 차를 홀짝였다.

“아무튼 잘 생각하라고. 잘 사는 것만큼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니까.”

“당신은 어떻게 죽고 싶은데요?”

“그냥 자연사. 아니, 결국 어떤 죽음이든 자연사야. 우린 죽을 운명이니까.”

세아가 멈칫했다. 나무를 매끈하게 깎아 만든 컵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리웨이, 당신 능력이 뭐죠? 특화된 스킬 말이에요.”

“전방위 능력자한테 말하려니 쑥스럽네. 난 소환수를 불러내.”

소환수, 확실히 특이한 능력이다. 기동력도 뛰어나고 일당백 노릇을 할 수 있다. S급 헌터의 소환수라면 분명 믿음직스러울 것이다. 소환자의 눈과 귀가 되어 주니 정보를 캐기도 좋고 어딘가에 몰래 침투할 때도 유용하다. 탐이 나는 능력이긴 했다.

세아도 이게 정이준만 설득한다고 될 문제가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처음엔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세아는 슬쩍 카일리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눈이 마주치자 카일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 줄기 고민이 머릿속을 스쳤다.

‘둘 다 믿어도 될까.’

잠시 고민했으나 어차피 이런 건 답이 없는 문제였다. 세아는 자기 손에 들었던 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또렷한 눈으로 리웨이를 응시하며 그녀는 반복해 말했다.

“날 도와 줘야 해요.”

“이미 말했지만 싫어. 복잡한 문제에 끼는 건 질색이라고.”

“죽고 싶다면 날 도와요.”

“…….”

카일리와 리웨이의 얼굴이 동시에 변했다. 살고 싶으면 도우라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으면 도우라니? 카일리는 영 이해를 못 한 듯 입만 벌렸으나, 리웨이는 제대로 알아들은 듯했다.

리웨이도 천천히 컵을 내려놓았다.

“설마?”

“시스템 살해는 내 히든 퀘스트입니다. 페널티는 영원한 회귀.”

담백하게 말한 후 세아는 부러 환하게 웃었다.

“리웨이,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아마 열두 번쯤 다시 살고 있을 걸요?”

카일리도 이제야 세아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세아만 바라보았고, 리웨이는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부루퉁한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열두 번이나 실패했어?”

“쉬운 퀘스트는 아니니까요.”

“허.”

세아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카일리에게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주겠다고 눈짓했다. 정이준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이 두 사람에게 먼저 말하다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그래도 싫어.”

리웨이가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짐을 뒤져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그걸 성의 없이 툭 건넨 세아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바뀌면 연락해요. 가자, 카일리.”

“어? 어어…….”

세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공기가 가슴 가득 들어찼다. 세아는 개운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가볍게 돌려 근육을 풀었다. 허둥지둥 따라 나온 카일리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연락이 올까?”

“올 거야.”

“그거 정말이야? 네 히든 퀘스트 페널티…….”

세아는 가만히 카일리를 응시했다. 이 사람을 믿어도 좋은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밤마다 들리던 울음소리, 그것만은 정말이라고 믿었다.

세아가 나직하게 말을 시작했다.

“난 꼭 마흔 살에 죽었어. 그 세상에서, 스테파니는 언제나 죽어서 돌아왔어.”

카일리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몇 번이고 어둠 속에서 혼자 죽어야 했던 동생을 상상하는 게 분명했다.

“전에 스테파니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 말한 것도 그래서 그랬던 거야.”

“그랬구나.”

카일리의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리웨이는 자기가 ‘자연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지만 카일리는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세아는 어색하게 손을 들어 카일리의 어깨를 다독였다. 회귀를 반복하기 전에는 이런 일도 곧잘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렵게만 느껴졌다. 너무 오랜 세월 목적만 보고 오래 달리다 보니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지금도 그렇다. 카일리의 젖은 눈을 보고도 고통 대신 난처함을 느낀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나는 어딘가 망가졌을까.

그래도, 세아는 덧붙였다.

“이번엔 스테파니를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결국 카일리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응,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녀는 자기 어깨에 있는 세아의 손을 꼭 잡더니 하염없이 쏟아지는 울음 사이로 고맙다고, 고맙다고 속삭였다. 두 사람은 그날 하산했다.

리웨이로부터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였다.

13.37

“어디야?”

리웨이는 세아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옆에 있던 카일리는 핸드폰 너머로 들린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지만 세아는 태연했다.

“한국이요.”

“한국엔 왜?”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세아는 손을 들어 카일리에게 방향을 알려 주었다. 평범한 전자 상가였는데, 물건을 전시한 가게가 많고 오가는 사람도 꽤 있어서 복잡했다. 입 모양으로 리웨이냐고 묻는 카일리에게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날 사람? 누구, 헌터야?”

“아니요, 미각성자요. 한국으로 오실래요, 아니면 저희가 모시러 갈까요?”

“뭘 모시러 와. 왜 갑자기 예의 바르게 굴어?”

생각보다 리웨이의 한국어가 능숙하다. 세아는 쓸모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며 평이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제 같은 팀이잖아요.”

“참 나.”

“아니에요?”

“됐어, 내가 한국으로 갈게.”

그렇게 말한 리웨이가 툭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옆에서 카일리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물어 왔다.

“우리랑 같이 움직이겠대?”

“응, 그런대.”

“너무 잘됐다. 나 소환수 제대로 본 적 한 번도 없는데……. 엄청 대단하겠지?”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대강 대꾸한 후 세아는 다시 방향을 틀었다. 매끈한 바닥, 수명이 다해 어두워진 형광등. 세상이 변했는데도 여기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였다. 세아는 점점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직 여기 있을까. 연락처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며칠 인연이 있었던 게 전부라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왠지 ‘그 사람’이라면 아직 여기 있을 것 같았다.

계속 걷던 세아가 우뚝 멈췄다.

“아, 찾았다.”

카일리도 세아가 찾던 남자를 발견했다.

카메라며 핸드폰이 다양하게 놓인 유리 진열장 뒤에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몸집은 왜소한 편이었지만 자세가 바르고 꼿꼿해서 그리 작아 보이진 않았다. 테가 두꺼운 안경을 써서 눈가의 인상이 흐릿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세아가 매일 보는 사이처럼 말을 건넸다. 두 팔을 진열장 위에 올린 채 핸드폰 게임에 몰두하던 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 세아를 바라보던 그가 아, 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잠시 카일리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세아에게로 돌아왔다.

“또 올 줄 몰랐네요. 잘 지내셨죠?”

“네. 뭐 하나 더 제작할 수 있나 해서요.”

“그래요? 그땐 그냥 해 줬지만 원래 비싼데.”

카일리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젊은 사장을 바라만 보았다.

세아는 카일리의 아이템을 구입하고자 여기까지 왔다. 세아는 아이템의 도움을 받으면 편리하다며 카일리를 이리로 데려왔다.

‘앞으로 많은 위험이 있을 텐데 아이템 한두 개 정도는 맞추는 게 좋아. 이 와이어도 그 사람이 만들어 준 거야.’

세아는 한쪽 끝에 영구적 점성이 있는 와이어를 꺼내 보여 주며 그렇게 말했다. 나이 지긋한 외다리 노인이 망치를 두드리고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눈앞의 사장은 너무 젊고 가벼워 보였다.

“당연히 돈은 드려야죠. 뭐 쓸 만한 거 없어요?”

“어……. 사실 저 장사 접고 있어요.”

“네?”

세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사장과 처음 만난 건 몇 년 전이다. 사실 세아 입장에서는 몇십 년 전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그때 세아는 미각성자인 사장의 몇 가지 부탁을 들어주었고, 그는 답례로 특수 제작한 와이어를 선물했다.

헌터도 아닌 그가 그만한 물건을 제작할 수 있는 건 뛰어난 재능 덕이었다. 그는 헌터들이 구해 온 던전 물질로 아이템을 만들었는데, 유명해지기는 싫었는지 아이템을 받아 간 헌터들에게 소문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면서도 아이템 제작을 즐겼다.

그런데 그만 둔다니. 대체 왜?

사장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던전 광물 잘못 만져서 한쪽 눈이 날아갔거든요. 이거 의안이에요.”

“…….”

“역시 이런 건 헌터들이나 해야 하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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