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세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장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이런 큰일을 갑자기 들으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세아는 헛기침을 하고 느리게 말했다.
“그러셨군요. 어…… 통증은 없고요? 후유증이나.”
“그런 건 없어요. 아무튼…… 이제 아이템 제작 더 할 일은 없을 것 같고 이런 전자기기도 한물갔으니, 이 기회에 여행이나 다니려고요.”
그래서 그들은 한동안 여행 이야기를 했다. 어디가 좋고, 어디가 싸고, 어디가 머물기 편한지 등등. 한참 대화를 이어 가던 사장이 불쑥 말을 꺼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해서 어쩌죠? 그냥 올리버를 찾아가 봐요.”
“올리버요?”
세아도 그가 누군지 알았다. 올리버는 아주 어린 소년 S급 헌터로, 여덟 살에 각성하여 현재 열세 살이었다. 최상급 아이템을 제작하느라 바빠 외출도 잘 하지 않는다는 천재였는데, 공식 석상에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아 세아는 어느 생에서든 그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게다가 올리버는 소문 때문에 더 유명했다. 아주 까칠하고 도도하고, 예민한 고양잇과라고 했다. 어린 나이에 각성해 모두가 치켜세워주니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모양이었다.
“올리버는 같은 S급 헌터 중에서도 얼굴 본 사람 없어요. 아무나 만나 주지 않는 꼬맹이라고 하던데요. 아주 건방지다고.”
“그게, 제작 동인 사이에서는 소문이 그렇지가 않아요.”
“제작 동인?”
세아가 미심쩍은 투로 되묻자, 사장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냥 소소하게 모여서 제작 이야기 하고 그래요. 우리 동인은 정말 커서,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사람도 많고. 모임 이름은 ‘무소유’인데…….”
“아, 네. 아무튼 올리버 소문이 어떤데요?”
내버려 두면 이야기가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아서 세아는 적당히 그의 말을 끊었다. 사장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엿들을 사람도 없는데 목소리를 낮췄다.
“협회 때문에 갇혀 있다고 하던데요. 아이템 제작하는 기계처럼…….”
“갇혀요? S급 헌터가 갇혀요?”
개가 웃을 소리였다.
이준이 협회에 잡혀 옴짝달싹못하는 처지가 된 건 특수한 경우다. 그는 공격보다는 치유 스킬에 특화된 데다, 같은 S급 헌터가 질질 끌어다 잡아 갔으니까. 그러나 보통 S급은 누구에게 잡혀가지 않는다.
“그냥 그런 소문이 있다는 거죠. 우리 사이에서 올리버나 스테파니는 유명하니까.”
그러더니 사장이 우물쭈물 카일리의 눈치를 살폈다. 동생 이름이 나와 움찔했던 카일리도 그와 눈을 맞추었다.
“저…… 이런 말하면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스테파니 언니죠? 동생 일은 정말 안타까워요. 우리 동인도 정말 비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마워요.”
카일리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시 그녀가 기쁜 마음에 사실 스테파니를 구했다고 말할까 봐 염려했던 세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세상에 스테파니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없다. 카메라가 몰려오면 예민한 상태의 아이는 괜히 스트레스만 받을 테니까.
“아, 아무튼 지금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요. 미안해요.”
세아는 손을 내밀어 사장과 악수했다. 아마 이 남자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날 것이다. 아이템 제작을 중단한다면 헌터와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세아는 그냥 이렇게만 말했다.
“여행 잘 다녀오세요. 와이어도 잘 쓰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그건 진짜 역작이었죠.”
“눈도…… 관리 잘 하시고요.”
사장이 빙긋 웃었다. 세아는 그의 미소를 보며 속이 복잡해졌다.
재앙이 발발한 후 많은 사람의 삶이 바뀌었고 여전히 바뀌고 있다. 리웨이의 말처럼, 이전에도 사건 사고는 있었으니 이런 일도 모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게 맞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반복되는 삶을 살 때도 이런 고민을 하지는 않았는데.
세아는 등을 돌려 카일리와 함께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오르며 카일리가 물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올리버한테 갈 거야?”
“아니, 그럴 필요는 없지. 다른 헌터들 만나러 다니기도 바빠. 올리버가 뛰어난 제작자이긴 해도 전투 능력은 없잖아.”
“…….”
카일리의 침묵에 세아도 함께 입을 닫았다. 카일리가 왜 갑자기 올리버 일이 관심을 보이는지 안다. 솔직히 올리버는 S급 헌터 중 유일한 미성년자였다. 스테파니와 나이는 다섯 살 정도 차이나지만 그래도 같은 어린애니 마음에 걸릴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행동하는 건 이럴 때 번거롭다. 타인의 감정도 어느 정도 알아줘야 하니까. 세아는 정적 속에서 넌지시 물었다.
“소문 때문에 그래? 그래봤자 아마추어 동인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잖아. 진짜였으면 우리가 진작 알았을 거야.”
“그래도 느낌이 이상해.”
“스테파니 때문에 그쪽에도 마음 쓰이는 건 알지만 우린 시간이 많이 없어. 알지?”
“확인만 해 보면 안 돼?”
세아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럼 또 영국까지 날아가서 분명 한국과 미국 협회로부터 최초의 버그 이야기를 들었을 영국 협회와 접촉해야 하며 리웨이까지 끌고 영국 땅을 헤매야 한다. 게다가 소문이 사실이라도 어쩔 것인가, 협회를 습격해서 어린애를 구하자는 것인가.
“그건…….”
“아무래도 안 되겠지? 미안해. 너도 네 사정이 있는데.”
“…….”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다. 거절하려 했던 자신이 아주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세아는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럼 확인만 해 보자. 확인만. 아마 헛소문이겠지만.”
“정말? 넌 진짜 최고야!”
카일리가 덥석 세아의 팔을 잡고 즐겁게 흔들었다. 세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또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다.
13.38
중국에서 영국까지 날아오게 됐는데, 리웨이는 불평 한마디 없었다. 세상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살던 사람인데도 어디에나 금세 적응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던 세아와 카일리 쪽으로 걸어오며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다.
“둘 다 안녕, 안녕!”
한 번은 한국어로, 다른 한 번은 영어로 인사하며 다가온 리웨이가 짐 보따리를 대강 바닥에 내려놓았다. 세아는 아주 간소한 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걸로 되겠어요?”
“응.”
리웨이의 차림은 아주 간단했다. 평범한 티에 평범한 청바지, 편한 운동화. 싸우기엔 가장 좋은 차림이었다. 세아는 몸을 틀어 가자는 표시를 하며 계획을 설명했다.
“일단 영국 협회에 가서 올리버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할 거예요. 올리버는 지금까지 다른 헌터와의 만남을 거절해 왔으니 이번에도 그렇겠죠. 내가 가서 시선을 끄는 동안 리웨이, 당신이 소환수로 협회 안을 좀 뒤져 주세요.”
“그래.”
왜 그렇게까지 해서 올리버를 찾아야 하냐고 물을 줄 알았는데, 리웨이의 대답은 더없이 시원했다. 그러더니 결의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애가 학대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내가 나서야지!”
세아는 기가 막혀서 리웨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일리가 동생과 생이별을 했다며 격한 감정을 표출할 때는 세상에는 본래 그런 일이 많다며 표표하더니, 지금은 왜 갑자기 나선단 말인가. 세아의 시선을 이해한 리웨이는 뻔뻔스럽게 미리 대꾸했다.
“지금은 속세에 있잖아. 어른의 책임이 있다고.”
이 사람의 사고방식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세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카일리는 깊은 감명을 받은 듯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외쳤다.
“멋져요, 리웨이!”
이렇게 오지랖 넓은 사람들과 함께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을까. 떠오르는 의문을 밀어 넣으며 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13.39
영국 협회장은 남자로 이름은 아이작, 나이는 고작 스물 둘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협회장 후보로 거론되어 만 스무 살이 되자마자 영국 협회장 자리를 차지했다. 그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지 세아는 잘 몰랐다. 아이작은 세아를 보자마자 웃으며 물었다.
“제 목도 자르러 오셨나요?”
세아가 빙긋 웃었다. 어쨌든 이쪽에 호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그렇다면 사근사근 웃으며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부러 한국어로 답했다.
“혀를 먼저 자를 수도 있고요.”
아이작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못 알아들었나, 심드렁하게 생각하는데 부드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무서운 말씀을 하시네요. 일단 앉을까요?”
살벌한 인사를 나눈 후 두 사람은 깨끗한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협회장실은 썰렁했다. 이렇다 할 장식품 하나 보이지 않았고 정말 필요한 물건만 놓여 있었다. 아이작은 말을 빙빙 돌리는 대신 곧장 찌르고 들어왔다.
“미국 협회장 엠마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세아 헌터에 대해서도 전부 들었고요.”
“그럼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협회장으로서 누구에게 협력해야 할지도 아시겠네요.”
“물론이죠, 영국 협회는 이세아 헌터를 도울 겁니다.”
“…….”
기대도 안 하고 뱉은 소리였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세아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아이작이 사람 좋은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왜 그러시죠?”
“한국어 알아들으세요?”
“네.”
“아니, 제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협력하겠다고 이야기한 건가 해서요.”
아이작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찻잔 하나 없이 썰렁한 테이블을 바라보다가 다시 세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무슨 계산을 했는지 세아는 알 수 없었다.
“저는 다른 협회와 생각이 좀 다릅니다. 게다가 한국 협회장은 최초의 버그니 시스템 속성이니 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미국 협회와만 공유했더군요.”
설마 그게 기분 나빠서 협력하겠다고? 세아가 답하지 않고 기다리자 말이 계속 이어졌다.
“이세아 헌터를 제거하고 나면, 한국과 미국은 시스템 속성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할 겁니다. 그럴 바엔 이세아 헌터에게 협력하고…… 보답을 받는 게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