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44화 (44/112)

44화.

보답이라. 세아는 아이작의 파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협회장이나 되는 사람이 시시하게 돈을 바라는 건 아닐 것이다. 시스템이 사라진 세계에서 세아가 줄 수 있는 것, 던전도 몬스터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든 대가로 받을 것…….

세아는 픽 웃었다.

“영국 총리가 되고 싶으세요?”

“말이 통하니 편하군요.”

아이작은 뻔한 부인도 하지 않았다. 세아는 그의 단단한 턱과 번뜩이는 눈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래, 야심가 타입이라는 건 알겠다. 그러니 다른 헌터를 제치고 단숨에 협회장 자리까지 뛰어올랐을 것이다.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면 물론 제 편에 서 주시겠죠. 원하신다면 미국 협회를 견제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 협회에는 당신이 원하는 것도 있죠, 아닌가요?”

세아는 대답을 미루고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분명 정이준 이야기다. 미국 협회장 엠마는 이 사람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했을까. 대략적인 정보는 공유했을 테고, 정이준 이야기도 어느 정도는 해 주었을 테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정이준이 어느 날 세뇌된 상태로 나타나서 총을 갈겨 대면 정말 곤란해진다. 그를 죽일 수도 없고 그에게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기껏 카일리와 리웨이까지 이쪽으로 끌어들였고 스테파니도 구했는데, 이준을 죽이면 모든 일이 허사다. 그가 없으면 시스템을 죽일 수 없으니, 아무리 용을 써도 다시 회귀할 뿐이다. 그렇다고 이준에게 죽으면? 마찬가지 결말.

세아는 생각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영국 협회가 미국에게 정이준 헌터를 넘기라고 요구할 수 있나요? 그럴 수는 없을 텐데요.”

“…….”

“정이준 문제는 이쪽에서 알아서 해결할 겁니다. 그건 걱정 마시죠. 그보다도 정말 저에게 협력하겠다면, 한 가지 요청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세아는 일부러 잠시 사이를 두었다. 올리버에 대한 소문은 분명 날조된 것이겠지만, 어쨌든 세아도 찜찜하기는 했다. 착취가 헛소문이라는 걸 확인하고, 가능하다면 올리버의 협조도 얻고 싶었다.

“올리버 헌터와 만나고 싶습니다.”

세아는 분명히 보았다, 아이작이 미세하게 눈가를 움찔한 것을. 그는 잠시 주저하며 한숨을 내쉬더니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이템 때문이라면 저희가 요청해 드리죠.”

“아뇨, 직접 만나 보고 싶은데요.”

“그게, 아마 들어서 아시겠지만…… 올리버 헌터는,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성격이 조금…… 조금 어려워서요.”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올리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카일리는 내내 찜찜해할 테고, 쓸데없이 정의감을 발휘하려던 리웨이도 못마땅하다며 혀를 찰 테다.

세아가 침묵하자 곧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알겠습니다. 말은 해 보죠. 하지만, 아무리 어려도 S급 헌터를 협회 마음대로 움직일 순 없습니다. 그건 아시죠?”

“충분히 기다리죠. 시간은 많으니까요.”

세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작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 왔다. 앞으로 잘해 봅시다, 하는 말에 세아는 일단 힘주어 그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13.40

카일리와 리웨이는 협회 염탐에 실패했다. 올리버는 생각보다 감시가 삼엄한 곳에 머물고 있어서, 소환수도 쉽게 안으로 침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용건 없는 카일리가 대뜸 안으로 들어가 올리버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행은 호텔을 잡고 며칠을 빈둥거리며 영국 협회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세아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보여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지? 그 소문이 사실일까?”

“아니면 올리버가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지난 며칠 동안 영국 협회는 여러 번 올리버의 뜻을 전해 왔다. 그가 세아 일행과의 만남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그러려니 하고 여길 떠났을 텐데, 느낌이 이상해서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카일리와 리웨이는 세아의 표정을 살피며 혹시 불만이 있진 않은가 알고자 했다. 그러나 세아는 서두르지도, 조바심을 내지도 않고 느긋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객실에서 차를 끓여 마시기도 하고 혼자 산책을 즐기기도 했다.

일주일째 되는 날, 카일리가 세아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건넸다.

“세아, 고마워. 너도 마음이 급할 텐데 이렇게 기다려 주고……. 좋은 수도 없이 그냥 막연히 기다리고만 있는데.”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창가에 앉아 야경을 바라보던 세아는 가만히 고개를 젓더니, 카일리를 보고 살짝 웃었다.

“나도 기다리고 있거든.”

카일리가 자신의 인내와 인격에 감탄하도록 내버려 두고, 세아는 호텔 밖으로 산책을 나섰다. 부러 주위를 살피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시간이 늦어 인적이 드물었고, 외진 길만 골라 걸으니 점점 더 한산해졌다.

호텔에서 나와 30분쯤 걸었을 뿐인데, 떠들썩한 번화가는 사라지고 쥐 한 마리 없을 듯 조용한 공터가 나타났다. 공원으로 조성하다가 공사가 중단된 후 방치된 땅이었다.

세아는 잡풀만 무성한 땅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이 있긴 하지만 사각지대는 분명히 존재한다. 세아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 마침내 가로등 불빛 아래로, 세아가 내내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그새 머리가 길었다. 식사를 제대로 못 했는지 살도 빠져, 얼굴이 전보다 훨씬 더 날카로워 보였다. 똑바로 부딪쳐 오는 눈동자가 전에 없이 탁하다. 손에 그럴 듯한 무기는커녕 돌조각 하나 없는데, 기세는 위협적이었다. 평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세아는 그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정이준의 얼굴을 향해 그녀가 미소를 던졌다.

“안녕, 이준아.”

드디어 왔다.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13.41

그 순간, 정이준이 달려들었다. 그가 제 머리카락을 잡아채기 전에 몸을 빼며 세아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A급 헌터라도 잔뜩 끌고 올 줄 알았는데 주위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세아는 일단 결계를 펼쳐 다른 이들의 접근을 사전에 차단한 후 제자리에서 훌쩍 뒤로 물러났다. 쾅,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움푹 구멍이 팼다. 연기까지 피어올라 세아는 고개를 들어 이준의 무기를 살폈다. 뱀처럼 늘어나는 바로 그 칼이었다. 언제 꺼냈는지 보지도 못했다.

“이젠 몬스터 무기도 개조해서 써?”

세아가 기가 막혀 혼잣말을 했지만 이준은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선 자리에서 세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는데, 마치 목표물을 조준하듯 감정 없는 무표정이었다.

이준은 그대로 칼을 들어 어깨 뒤로 넘겼다가 휙 내던지듯 앞으로 뻗었다. 칼이 즉시 구불구불하게 늘어나며 세아의 목을 감싸려 들었다. 언젠가, 이 칼 때문에 죽었던 이준의 모습이 환영처럼 눈앞을 스쳤다.

세아는 중력을 상쇄하고 위로 높이 뛰어올랐다.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몸이 하늘로 솟구쳤다. 세아가 있던 자리를 둥글게 감쌌던 칼이 콱 조여들며 허공을 토막 냈다. 세아는 천천히 흙바닥으로 내려가며 이준을 노려보았다.

“정이준!”

아무래도 목소리가 닿지 않는 상태인 것 같다. 눈멀고 귀먹은 살상 병기, 그게 지금의 정이준이었다.

섣불리 무기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아이템의 도움을 받고 있을 뿐, 이준은 어차피 힐러다. 머리를 쏴서 죽여 버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산 채로 잡기가 어려웠다. 이준처럼 속박 스킬이라도 있다면 편하겠지만 세아의 공격 스킬은 대부분 적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게다가 결계 안에서 스킬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결계를 풀고 싸웠다가 미각성자가 휘말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지 끔찍했다.

‘할 수 없지.’

세아는 따로 챙긴 와이어를 꺼내 공중에 한 차례 휘둘렀다. 결계는 단단한 벽과 같아서 와이어도 붙일 수 있다.

스킬로 굴복시킬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 가까이 다가가서 안 죽을 정도로만 패자.

세아는 그대로 와이어를 휘둘러 결계 천장 쪽에 부착했다. 구불구불한 칼을 피해 몸이 휙 날아올랐다. 그러나 칼도 세아 못지않게 빨랐다. 이준에게 이걸 다루는 연습만 죽어라 시켰나 의심될 지경이었다.

날이 예리해 잘못 닿으면 바로 손목이 잘릴 것이다. 세아는 온몸의 감각을 바짝 곤두세우고 앞뒤에서, 머리 위에서, 발밑에서 마구 날아오는 칼날을 피해 숨 가쁘게 움직였다. 스킬 몇 개면 이준을 고꾸라뜨릴 수 있는데 이 짓을 하자니, 위기감보다는 짜증이 밀려왔다.

“정이준, 내 말 들려?”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아무래도 오스카의 세뇌 스킬은 쉽게 깰 수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세아는 와이어를 단단히 잡고 몸을 기울여, 벽을 밟은 채 있는 힘껏 달렸다. 몸이 반원을 그리며 나아가니 칼날이 예측 공격을 시작했다.

쾅, 쾅! 진로 방향에 칼날이 마구 내리꽂혔다. 세아는 그때마다 멈추는 대신 박힌 칼날을 뛰어넘거나 허리를 굽혀 피해야 했다. 흙먼지에 눈앞이 뿌옇게 변했고 목이 칼칼해졌다. 이 기나긴 술래잡기에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준은 둥근 결계 중앙에 있다. 어디서 접근하든 직선거리는 똑같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기 전에 칼날에 휘감겨 죽을 것이다. 아마 당근처럼 토막 나겠지!

세아가 이를 악물고 속도를 올리는데, 쭉 뻗어 나온 칼날이 그대로 눈앞을 스쳐 결계에 박혔다. 칼날은 눈알 바로 앞에서 번뜩였다. 하마터면 그대로 안구에 칼집이 날 뻔했다. 세아는 이준 쪽으로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죽여 버릴까?’

까짓 죽이고 그냥 다시 시작할까. 그러나 지금까지 너무 많은 걸 했다. 또, 지금 포기하고 이준을 죽인 후 다시 시작하기엔 무언가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이준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스킬 중 하나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발동어 한마디면 모든 상황을 끝낼 수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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