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왜 속박 스킬을 사용하지 않지?’
세아는 칼날이 결계에서 쑥 빠져 나감과 동시에 그대로 와이어를 휘둘러 칼날에 붙였다. 날이 공중으로 높이 솟구치자 세아의 몸도 휙 딸려 올라갔다. 공중에서 한 바퀴,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칼날의 움직임이 선명히 보인다.
칼날 위로 솟구쳤던 세아는 와이어를 붙잡은 채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리고 와이어 가 날에 잘리기 전에 휘두르는 반동을 이용해 몸을 이준 쪽으로 날렸다.
와이어를 놓는다. 발부터 그대로 이준의 얼굴 쪽으로 날아간다. 칼날이 급히 움직이지만 이미 너무 멀리까지 가 있어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세아는 오른발을 뻗어 그대로 이준의 얼굴에 내리꽂았다.
퍽.
이준이 휘청 뒤로 넘어가는 동시에 칼을 놓쳤다. 세아는 그의 코를 짓뭉개지 않도록 발을 떼고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이준의 얼굴을 살피니 아직 의식은 남아 있었다. 눈이 여전히 안개 낀 듯 탁하다. 사람의 눈이 아니라 늪을, 아주 깊은 늪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세아는 그의 배 위에 올라탄 채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렸다. 짝, 손바닥을 펼쳐 그대로 이준의 뺨을 내리친다. 맞는다고 정신이 들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세아는 이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왼뺨만 집요하게 갈겼다.
“정이준.”
지긋지긋한 침묵. 세아는 때리기를 멈추고 이준의 멱살을 잡았다.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고 눈의 상태를 살폈다. 상태는 아까와 똑같았다. 아무래도 이런 무식한 방법은 안 통하는 모양이었다.
“협회는 무슨 생각으로 너만 보냈지?”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세아는 물었다.
정이준은 절대 자기 상대가 될 수 없다. 이 세상 어떤 S급 헌터가 와도 머리통부터 박살 내줄 자신이 있다. 그런 데다 정이준은 전투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도 않다. 당연히 다른 헌터와 함께 보냈어야 옳다. 그런데 협회는 정이준 하나만 이리로 보냈다.
가능성은 두 가지. 첫째, 그들이 정이준의 전투 능력을 과신했다. 둘째, 세아에게 다른 헌터를 보내면 모두 목이 잘릴 걸 알았다.
“약아빠진 새끼들.”
세아가 탁 이준의 옷을 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정이준을 죽일 수 없다.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려면 그의 정화 스킬이 반드시 필요하고, 다른 대안은 없다. 협회도 그걸 아니 정이준만 완전히 세뇌해서 이리로 보낸 것이다. 언제고 빈틈을 보일 때 정이준이 자신을 정화할 수 있도록.
치졸하고 소심한 수법이라 겁도 나지 않고 그저 웃겼다. 그러니까 이놈들은, S급이든 A급이든 헌터를 한 트럭 모아 인해전술을 펼 배짱도 없는 것이다.
세아는 일단 이준이 놓친 검부터 잡아 멀리 던져 버렸다. 저건 나중에 처리하고, 일단은 이준을 데려가야 한다.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세아에게는 그가 꼭 필요했다.
“아플 거야.”
세아는 자기가 팽개쳐 버린 와이어로 이준의 몸을 단단히 묶기 시작했다.
그때, 정이준이 두 눈을 번쩍 뜨더니 그대로 상체를 세워 머리로 세아를 들이박으려 했다. 예상한 일이라 세아는 여유롭게 몸을 뒤로 젖혀 피했다. 그런 다음 주먹으로 자기가 깔고 앉았던 정이준의 배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허억!”
“가만히 있어. 다치니까.”
이준의 팔을 몸통에 딱 붙여 와이어로 말고, 그대로 발목까지 둘둘 감는다. 미라처럼 갑갑한 자세가 된 정이준이 벗어나려는 듯 꿈틀거렸다.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세아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이준아.”
이렇게 만나게 될 줄 알았고, 이날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기쁘지만은 않다. 그래서 세아는 좀 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누나가 꼭 정상으로 만들어 줄게.”
패서 정신 들게 하는 건 실패했으니 다른 전문가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세아는 중력 상쇄로 이준의 무게감을 줄이고 그를 자루처럼 둘러멨다. 이렇게 가까이 닿아 있으니 그가 전보다 훨씬 말랐다는 게 실감 났다.
‘세뇌 상태에서도 음식은 먹겠지?’
일단 가서 밥부터 먹여야겠다. 돌아가는 길,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봤지만 세아는 모두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13.42
“이세아 말이야.”
리웨이가 영어로 말을 걸어서, 카일리는 얼른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웨이는 푹신한 침대에 슬라임처럼 퍼져 있었는데, 문명이 싫다던 사람치고는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상한데요?”
“아니, 마음 급할 텐데 너무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잖아. 솔직히 올리버 때문인 것 같지는 않고, 헌터 협회와 맞서고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바로 그때, 벨이 울렸다. 카일리가 벌떡 일어나 문밖을 확인했다. 협회에서 보낸 사람인 것 같아서 카일리는 얼른 문을 열었다. 올리버에 대한 소식일지도 모른다.
양복까지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카일리를 보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협회의 소식을 전해 주러 종종 오던 사람이었다. 카일리는 기대를 품고 물었다.
“올리버한테 다시 이야기해 봤나요? 우리가 꼭 만나고 싶어 한다고…….”
“네. 이번에도 거절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아쉽지만 올리버 헌터에게 더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자꾸 같은 걸 물어 보니 예민해져서, 지난번에는 정말 큰 사고가 날 뻔했거든요. 아무리 어려도 S급 헌터니…… 어떤 규모의 사고인지는 짐작이 가시겠죠.”
카일리가 입을 벙긋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남자는 유감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도 올리버 헌터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이렇게 고집을 부릴 때마다 정말 힘듭니다.”
어쩌면 올리버가 감금된 채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건 정말 헛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헌터 사회에 알려진 대로, 까다롭고 콧대 높은 도련님일지도. 그렇다면 귀한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셈이었다. 카일리가 포기하려던 그때, 갑자기 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왜 다 내 방에 있어?”
협회원이 세아를 보더니 깜짝 놀라 옆으로 물러났다. 안에 있던 카일리도 그가 왜 그렇게 놀랐는지 곧 알게 되었다. 세아가 정이준을 짐짝처럼 어깨에 메고 들어선 것이다. 게다가 세아의 옷 군데군데 묻은 피까지.
“다, 다쳤어?”
“아, 내 피 아니야. 정이준이 코피를 좀 흘려서.”
“코피라니, 갑자기 왜…….”
“내가 얼굴 걷어찼거든. 잠깐 비켜 봐.”
카일리가 현관에서 후다닥 물러나자, 세아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리웨이 옆에 있는 빈 침대에 정이준의 몸을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어깨와 목을 돌리며 현관 쪽으로 다시 다가왔다. 그녀가 협회원을 향해 물었다.
“뭐, 올리버는 이번에도 우리 보기 싫다나요?”
“네, 유감입니다.”
“그럼 영국 협회는 말로만 협력하는 거네요. 협회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저희가 원한 게 아니라……!”
“안녕히 가세요.”
세아는 예의 바르게 인사까지 하고 협회원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러더니 얼빠진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리웨이와 카일리를 향해 선언했다.
“올리버 문제는 우리끼리 알아서 하자.”
“어……. 근데, 정이준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어?”
“나중에 말해 줄게.”
세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정이준 옆으로 다가갔다. 의식을 잃은 그를 잠시 내려다보던 세아가 다른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혹시 세뇌나 최면 무효로 돌릴 수 있는 사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세아는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호텔 전화기를 들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일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아? 정이준 최면 걸렸어? 오스카가 성공한 거야?”
“응.”
“그럼 이제 어쩌려고?”
“어쩌긴. 밥 먹여야지. 저 모양이어도 밥은 먹여야 던전에 데려갈 거 아냐. 안녕하세요, 여기 룸서비스…….”
카일리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리웨이를 돌아보았다. 리웨이는 입만 벙긋거려, ‘내가 쟤 이상하다고 했지?’ 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슬쩍 ‘한국인은 꼭 보는 사람마다 밥 먹이려고 하더라.’ 라고 혼잣말을 했다. 세아는 전화를 든 채 그쪽을 잠시 쏘아보았다. 리웨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농담조로 덧붙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 지금 밥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지금도 우리 저녁 먹었나 안 먹었나 궁금하지? 우리 먹을 거 주문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
말을 말아야지. 세아는 그냥 이준이나 먹이기로 했다.
13.43
카일리와 리웨이는 세아가 와이어로 꽁꽁 묶어 놓은 이준 옆에 한참을 기웃거렸다. 룸서비스로 시킨 샌드위치와 감자튀김이 담긴 접시를 든 세아는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왜 그래요?”
세아가 의아한 듯 묻자, 리웨이가 휙 그녀를 돌아보았다.
“괜찮으려나? 오스카가 데려갔었다며, 그럼 세뇌된 거 아니야?”
“맞아요. 침대 헤드에 기대게 해서 앉혀 봐요.”
세아의 말에 카일리와 리웨이가 움직였다. 태연하게 걸어온 세아는 침대에 걸터앉은 후, 감자튀김을 들어 이준의 입에 갖다 댔다. 이준은 멍한 눈으로 한참 그걸 바라보더니 고개를 틀어 버렸다. 카일리는 좁아지는 세아의 미간을 분명 보았다.
“정이준.”
서늘한 부름에 이준의 시선이 돌아갔다. 세아와 눈을 맞춘 그가 순간 팔다리에 힘을 주어 펼치려 했다. 이준의 몸이 들썩이며 탄력 있고 탄탄한 와이어가 순간 끊어질 듯 쫙 늘어났다가 다시 수축했다. 카일리가 경악에 차 외쳤다.
“달려들려고 하잖아! 먹여 주는데!”
“정이준, 입 벌려.”
세아는 카일리의 외침을 무시하고 정확하게 명령했다. 리웨이는 흥미롭게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입으로 먹여 줄지도 모른다. 아니면 따뜻한 말씨로 달래 마음을 감화시키고…….
리웨이의 상상이 거기에 이른 순간, 세아가 왼손을 뻗어 턱 이준의 얼굴을 쥐었다. 엄지와 나머지 손가락으로 입가를 움켜쥔 그녀는 강한 악력으로 손을 조였다. 이준의 두 뺨이 뭉개지며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세아는 강제로 벌어진 입에 감자튀김을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