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침대에서 떨어질 때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이준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아픔을 표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다만, 순간의 충격에 기침을 토했다.
“이준아, 콜록.”
세아도 기침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각성자라면 이만큼 목이 졸린 이상 말도 하지 못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뼈는 괜찮을 거야.”
세아는 넘어진 이준 곁으로 가서 상태를 살폈다.
그냥 평범한 망치가 아니라 헌터의 능력으로 만든 무기다. 잘못 건드리면 즉사할 것 같아서 신경을 많이 썼다. 갈비뼈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또 내장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섬세하게 힘 조절을 해야 했다. 피를 토하지 않는 걸 보니 다행히 잘 된 모양이었다.
세아는 이준의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이준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몸을 기댔다. 세아는 그를 침대에 앉히고 당부했다.
“너 내일 할 일도 있어. 오늘 좀 자 둬야 해.”
이준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세아만 응시했다. 세아는 빛이 꺼지는 듯 서서히 어두워지는 그의 눈을 관찰했고, 희미하게 돌아왔던 이준의 이성이 사라져 감을 느낄 수 있었다. 누울 생각도 없어 보여서, 세아는 그를 그대로 두고 자기 침대에 몸을 눕혔다.
아직도 목이 뻐근하게 아프고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린다.
강심장이긴 하지만 옆에서 자던 사람에게 목이 졸렸다. 예상한 일이라고 해도 태연할 수만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누운 채로 고개만 이준 쪽으로 돌렸는데, 어둠 속에서도 그의 표정이 생생하게 보였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도록 그와 엎치락뒤치락한 게 갑자기 우습게 느껴졌다.
“정이준.”
나직하게 부르자 이준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이준의 세뇌를 풀 수 있는지 감도 오지 않는다. 그저 그를 계속 자극해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뿐.
세아는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쏟아 놓았다.
“카일리 동생 살아 있었어. 스테파니 말이야, 미국 약초 던전에서 실종된 어린 헌터. 지하가 이상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뜬금없이 한국 던전에 있더라니까. 우리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 밝혀지지 않은 게 얼마나 많은지……. 신기하지 않아?”
이준은 여전히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세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10년 후 미래까지 여러 번 살고 왔지만, 그때는 시스템이 사람의 몸을 입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시스템 속성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지금은 시스템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을까.
무서운 세상이다. 처음으로, 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스테파니는 우리 부모님이랑 너희 부모님이랑 같이 지내. 아, 혹시 너희 부모님이 인질이 될까 봐 내가 우리 부모님한테 부탁했어. 좀 보호해 달라고.”
부모님 얘기에는 반응을 보일까 했는데 이준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 뒤로도 세아는 구구절절 지난 일을 늘어놓았다.
“리웨이랑은 어떻게 만났냐면…….”
“내일은 영국 협회로 가서 오스카를 만날 건데…….”
대답은 한마디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준이 제대로 듣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인지 세아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말했고 한숨처럼 덧붙였다.
“떨어져 있는 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나 궁금할 것 같아서.”
그는 몇 번이나 열렬하게 마음을 고백했다. 당연히 세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지 염려했을 것이다. 세아의 머릿속으로 문득 그가 누나를 좋아한다고, 너무도 고통스럽다고 호소한 순간이 스쳐 갔다. 혹시, 하는 기대감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사랑으로 구원하는 이야기는 오래전에 졸업했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혹시 될지도.
그래서 세아는 이준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뱉었다.
“이준아? 사랑해. 너를, 정말, 사랑해.”
“…….”
“될 리가 없지.”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아주 잠시 기대했다. 세아는 긴 숨을 내쉬며 천장을 쏘아보았다.
“너도 나중에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해 줘. 오스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미국 협회는 어땠는지……. 내가 들어줄게.”
이준은 자신을 죽이라고 했다. 죽임을 당하기 전에 먼저 죽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그의 말에 따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와 싸울 때 잠시 생각했던 것처럼, 이준을 죽이고 자신도 죽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카일리와 리웨이가 아까워서는 아니다.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 안 되면 그때 다시 시작하지, 뭐.’
태평하게 생각해 버리는 게 제일이다. 그러고 있자니 다행히 다시 잠이 찾아왔다.
13.45
이준은 그날 밤 내내 싸웠다.
‘이준아? 사랑해. 너를, 정말, 사랑해.’
그 말이 없었다면 절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세아의 말에 감동해서 버틴 게 아니었다. 자신을 보며 진지한 얼굴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세아가, 어이가 없고 우습기도 하고 조금 귀엽기도 했다.
누나는 가끔 엉뚱할 때가 있어, 이준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건 오스카가 심어 놓지 않은 오직 그 자신만의 생각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시도해 보는 세아의 모습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몽글몽글 피어나는 감정은 오스카의 스킬이 만든 단단한 벽을 뚫고 들어와 이준에게 아주 잠시 닿았다. 아주 잠시. 그 잠시를 붙들고 그는 버텨야 했다.
세아는 자신이 견디기를 바랄 테니까, 버티기를 원할 테니까…….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면 꼭, 그때 누나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아느냐고 말해야지.
그 밤 내내 이준은 다시 세아를 깨우지 않았다.
6장. 세이브 포인트
13.46
다음 날, 카일리와 리웨이는 일찍부터 세아가 머무는 객실로 찾아왔다. 네 사람 중 가장 피곤해 보이는 건 세아도 이준도 아니고 카일리였다. 간단한 조식까지 먹고 나타난 리웨이가 카일리의 어깨를 툭 쳤다.
“넌 왜 다 죽어가?”
“피곤해서요.”
카일리가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세아도 카일리가 왜 피곤한지는 짐작이 갔다. 정말 밤새 객실 앞을 지킨 모양이었다. 세아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리웨이가 타박했다.
“걱정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니까. 괜히 고생만 하고.”
“그러는 리웨이는 너무 문명을 즐기는 거 아니에요? 조식까지 먹고 오고.”
카일리가 픽 웃으며 받아쳤다. 그래도 밤새 아무 일도 없었다고 조금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별일은 없었지?”
리웨이는 세아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이준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세아는 대충 그렇다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 지금 필요한 이야기를 해야 했다.
“영국 협회는 아무래도 올리버를 보여 줄 마음이 없는 모양이에요. 정이준도 왔으니 더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올리버를 확인하고 떠나야 해요.”
“어제 생각해 둔 방법이 있댔지?”
리웨이의 물음에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좀 무식한 방법이에요. 그래도 제일 빠르고 간단하죠. 이 일로 영국 협회를 적으로 돌릴지도 모르지만……. 카일리, 너 정말 올리버를 확인하고 싶어?”
세아가 카일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확인하듯 물었다. 세아와 리웨이의 시선이 동시에 쏟아지자 카일리는 조금 당황해서 우물거렸다. 사실 리웨이도 올리버 문제에 열을 올리긴 했지만 카일리처럼 열정적인 건 아니었다.
카일리는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만약 네가 관여하고 싶지 않다면…….”
“아니, 관여해야지. 우린 파티잖아.”
동생 때문에 우는 카일리를 위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하는 일을 함께할 수는 있다. 그리 멋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세아는 필요 이상으로 감동한 카일리의 표정이 부담스러워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럼 내 말 잘 들어. 리웨이도요. 일단, 정이준이 나를 죽이려고 쫓아오도록 세뇌되었다는 걸 이용해서…….”
13.47
영국의 젊은 헌터 협회장 아이작은 그날도 평화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자주 가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산다. 그의 얼굴을 아는 직원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면, 그 역시 신사다운 미소로 화답한다. 오른손에 커피를 들고 걸어서 출근한다. 그야말로 소탈한 협회장의 출근길이다.
나중에 영국 총리가 되어도 가까운 곳은 자기 다리로 걸어 다니고 싶었다. 사진을 찍자며 다가오는 시민들, 어깨를 두드리며 친근하게 웃어 보이는 직원들. 그런 상상을 하면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지고 가슴은 낙관으로 부푼다.
핸드폰이 진동한 건 바로 그때였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아이작은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이세아 헌터다. 전에 만났을 때 번호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직접 전화를 걸어 온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올리버 이야기를 하려는지도 모른다.
“피곤하네.”
아이작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같은 나라 사람도 아니고, 어깨 한번 스친 적 없는 꼬마 헌터에게 뭐 이리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전화를 받아야 했다.
한차례 목을 가다듬은 아이작이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이세아 헌터, 안녕하세요.”
“협회장님, 좀 도와주세요! 아아악!”
갑자기 비명이 터져 나와서 아이작은 핸드폰을 확 귀에서 떨어뜨렸다. 어찌나 큰 소리였는지 귓속이 얼얼하게 아플 지경이었다. 마침 신호가 바뀌어, 아이작은 허둥지둥 길을 건너며 세아를 불렀다.
“이세아 헌터? 무슨 일입니까? 무슨 도움이 필요한데요?”
“지금 미국 협회에서 보낸, 헉, 헉, 다른 헌터가, 제 뒤를, 헉, 쫓아온다고요!”
한국이 헌터를 셋이나 보유하고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을 높여 가던 시기에 급하게 배운 한국어라, 이렇게 숨 가쁘게 쏟아지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대충은 알아들어서 아이작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곤란하신 모양이네요. 그럼 저희가 사람을 보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