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아, 비다. 그러나 몸이 젖지 않았다. 파편에 살갗이 찢기는 고통도 없었다.
잠시 결계를 펼친 여자는, 통로 너머에서 우르르 쏟아지듯 나타난 영국 헌터들을 보고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동양인 남자에게 소리쳤다.
“정이준, 너도 따라와!”
올리버를 안은 여자의 팔에 꽉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두 발로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다리를 붙잡고 있던 중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듯 자유롭게, 빠르게, 또 우아하게. 중력을 상쇄하고 벽을 밟아 하늘로 치솟는 여자의 품에서 올리버는 바람을 느꼈다.
위에는 진짜 하늘. 아래는 반짝이는 유리 파편. 자기를 꽉 안은 사람의 체온.
올리버는 날고 있었다. 날아서 이곳을 떠나고 있었다. 바람이 맹렬하게 머리카락을 흔들고 상기된 뺨을 식혀 주었다.
고개를 들어 여자의 얼굴을 본다. 깊은 지하의 벽을 밟고 해를 향해 날아오르는 새 같다. 자신만만한, 아니, 신이 난 듯도 한 얼굴. 쫓아오는 헌터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환한 표정. 목적지에 고정된 검은 눈. 잠시도 멈추거나 주저하지 않는 두 다리.
벽을 밟고 밟아서 마침내 지상으로 솟구쳤을 때, 땅 위를 밟았을 때. 여자는 올리버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친절해 보이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이 활극이 즐겁고 유쾌해서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듯했다.
“우리 더 뛰어야 해. 갈 수 있지, 올리버?”
바람이 불었고 여자의 머리카락이 길게 흩날렸다. 그렇게 올리버는 첫눈에 이세아에게 홀렸다.
13.49
영국 협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하는 엉망이 되었고, 올리버가 머물던 작업실의 민감한 재료도 소란에 휘말려 전부 상호작용을 일으켰다. 그것 때문에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나 몇 명의 헌터가 부상을 입었다. 게다가 실내 정원은 산산이 부서져 쑥대밭이나 다름없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아이작은 올리버를 한 팔로 안은 세아 앞으로 성큼 나서며 소리쳤다. 협회 건물 앞에서 그런 짓을 하는 바람에 지나가는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세아는 올리버를 고쳐 안으며 아이작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죄송하게 됐네요. 이미 아실 수도 있지만, 미국 협회에서 보낸 정이준 헌터의 상태가…….”
“개소리!”
“한국 욕도 아세요?”
태연한 대꾸에 아이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세아에게 안겨 이쪽의 눈치를 보는 올리버를 바라보다가 내뱉듯 대꾸했다.
“이렇게 속 보이는 짓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미국 협회 핑계를 대면 넘어갈 줄 알았나 본데, 이 일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책임져야 할 건 당신이죠. 어린애를 학교도 안 보내고 가둬 놓다니.”
“남의 나라 일에 간섭 마십시오. 이미 정부와도 협의가 끝났습니다.”
“그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을 때의 얘기겠죠. 사람들이 이 일에 주목하기 시작하면 정부가 당신을 도와 줄까요?”
아이작이 주먹을 불끈 쥐며 세아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곧 세아를 향해 달려오는 이준을 보며 눈을 빛냈다. 세아 역시 아이작의 변화를 알아차렸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미 대비해 두었다.
“으아악!”
허둥지둥 달려온 카일리와 리웨이가 소리를 지르며 와락, 이준의 등을 덮쳤다. 두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이준이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세아는 핸드폰을 들고 몰려들기 시작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곧 아이작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네요. 아무래도 신기하겠죠. 올리버는 이제껏 밖에 나선 적이 거의 없으니까.”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영국 협회가 당신에게 협력하는 대신…….”
“그건 당신이 어린애나 착취하는 사람인 줄 몰랐을 때 얘깁니다.”
세아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아이작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는 걸 보며 그녀는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 협회장 자리도 잃게 될 텐데요, 뭐.”
그렇게 말하고 세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틀었다. 넘어진 카일리와 리웨이에게 일어나라고 얘기한 다음, 이준은 직접 잡아 일으켜 주었다.
다행히 이준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쫓아오기만 할 뿐, 당장 달려들지는 않았다. 세아의 손목을 아프도록 세게 움켜쥐었지만 그뿐이었다. 세아는 한 팔로 안아든 올리버를 보며 영어로 물었다.
“혹시 배고파?”
“네?”
“아침 먹어야지.”
이번에는 리웨이도 세아를 놀리지 않았다. 올리버는 누가 보기에도 밥을 먹여야 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가락과 움푹 들어간 눈을 보다가 카일리는 괴로운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세아는 올리버가 건강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좀 마르고 기운이 없긴 하지만 뺨과 입술에 아이다운 명랑한 홍조가 돈다.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놀게 하면 금방 또래처럼 튼튼해질 것이다.
“아침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우리가 누군지도 얘기해 줄게.”
그렇게 말하며 세아는 슬쩍 카일리를 돌아보았다. 마음이 아픈 듯 보였지만 그래도 카일리는 뿌듯한 듯했다. 그러면 됐지, 뭐. 세아는 그쯤에서 생각을 그치고 호텔로 걸음을 옮겼다.
13.50
아이작은 실각했고, 영국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얼굴이 실렸다. 영국 왕실과 정부는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지는 줄 몰랐다며 발을 뺐으며 세아에게 올리버의 신변을 넘기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S급 헌터가 5년 동안 지하에서 착취당한 사실이 세상에 밝혀지자 사람들은 모두 분노했다. 올리버가 만든 아이템을 자진해서 반납하는 헌터도 꽤 많았다.
세상이 얼마나 시끄럽든, 할 일이 있는 세아는 카일리와 리웨이를 불렀다. 세 사람은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일단 올리버는 여기 있고 싶지 않대요. 아무래도 길을 나다닐 때마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사진 찍고 하니까 부담스러운 거겠죠.”
“그럴 만도 하지.”
리웨이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현재의 올리버는 영국의 가련한 스타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 머리에서 잊힐 때까지 안전한 곳에 머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진찰을 받아 봤는데 건강엔 문제없고요. 생각해 봤는데, 그래서 일단 한국 집에 맡길까 해요. 거긴 저랑 정이준 부모님도 계시고 무엇보다도 스테파니가 있잖아요. 스테파니는 열여덟 살이니 올리버와 나이 차이가 좀 나긴 해도, 공통 관심사가 있으니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올리버도 그러겠대?”
카일리의 물음에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올리버와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끝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지하에 갇혀 지냈는데도, 올리버의 말과 행동은 조숙하고 정확했다. 아마 어른들 눈치를 많이 봐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상관없대.”
“그럼 한국으로 가야겠네.”
리웨이가 가벼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러더니 한쪽 구석으로 고개를 돌려 얌전히 앉아 있는 정이준을 바라보았다.
“쟤는 어쩔 건데?”
이준은 처음처럼 세아에게 달려들지 않지만, 그래도 안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스카를 능가하는 헌터를 찾아가 세뇌 스킬을 무효로 돌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아무 방법 없이 막연히 기다려야 하는 상황.
세아는 잠시 고개를 숙여 매끈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다. 결심하고 말하기가 쉽지 않을 뿐. 마침내 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오스카를 죽여야겠어요. 스킬 사용자를 죽이면 세뇌가 풀릴지도 모르죠. 솔직히 정신계 스킬이 그렇게 간단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 겁니다.”
리웨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카일리는 너무 놀란 듯 입을 딱 벌리더니 바로 반대하고 나섰다.
“안 돼. 한국 협회장 죽인 건 그렇다 쳐도, 같은 S급 헌터까지 죽이면 분명 말이 나와도 나올 거야. 독일 협회까지 끌어들이게 된다고.”
“그러니까 몰래 해야지.”
“S급 헌터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어? 당연히 네가 제일 먼저 의심받지!”
세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심정은, 의심을 받더라도 오스카의 목을 잘라 버리고 정이준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었다.
이준이 오기를 기다릴 때까지만 해도 자신 있었다. 조금만 자극을 주면 세뇌 따위 금방 풀 수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내심은 하룻밤 사이에 동나고 부글부글 끓는 듯한 답답함과 분노만 차올랐다.
이미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연구원 곽남주의 몸을 빼앗은 시스템을 없애긴 했지만, 그것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시스템이 다른 사람의 몸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지, 아니면 한 생에 한 번만 그런 속임수를 쓸 수 있는지, 그것조차 모르는 상황. 이대로 계속 어물거리며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물론 카일리의 생각은 달랐다.
“네가 정말 시스템을 죽이고 나면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갈 텐데, 거기서 범죄자로 살 수는 없잖아.”
“계속 다시 사는 것보다는 범죄자로 사는 게 나은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카일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세아는 그 말을 대강 흘려들으며 동의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리 말대로 더 좋은 방법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런 방법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것 같았다.
“자, 그럼.”
리웨이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려 분위기를 바꾸었다.
“오늘 바로 가는 거지? 한국.”
13.51
세아는 부모님이 전송한 주소지로 찾아갔다. 세아 자신의 집도, 부모님 집도 아니고 완전히 모르는 곳이었다. 산을 등지게 해서 지은 단독주택이었는데, 벽이나 지붕에 세월의 흔적이 남은 걸 보니 부모님이 새로 구입한 모양이었다.
“세아야!”
세아의 어머니와 아버지, 이은선과 이대우가 두 팔을 벌리고 뛰어나왔다. 요란하고 호들갑스러운 환영이라 세아는 조금 얼떨떨했다. 미각성자 시절의 부모님만 보다가 갑자기 A급 헌터 부모님을 만나니, 무척 낯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