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이준아!”
물론 달려 나온 이준의 부모 역시 낯설긴 마찬가지다. 세아는 자기 부모님한테 눈인사를 하고, 얼른 이준 앞을 막아섰다. 갑작스러운 자극은 금물이다.
“지금 이준이 상태가 좀 안 좋아서요. 갑자기 접촉하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역시 협회가…….”
단숨에 얼굴이 어두워진 이준의 어머니가 입술을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세아는 괜찮아질 거라고, 자기와 다른 파티원이 방법을 찾아 낼 거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뒤에 쭈뼛거리며 서 있는 올리버를 소개했다.
“이쪽은 올리버, 영국 S급 헌터예요. 한국어는 배운 적이 없어서, 영어로 말하면 알아들을 거예요.”
“안녕, 올리버. 한국은 처음이지?”
세아의 어머니 은선이 명랑한 영어로 인사했다. 올리버는 마치 인사하듯 살짝 손을 들었다 내린 후, 어쩔 줄 모르고 세아만 올려다보았다. 세아는 그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테파니는 어디 있어요?”
곧 밖으로 나온 스테파니에게 세아는 올리버를 소개해 주었다. 스테파니는 자기 언니 카일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세아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올리버의 손을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냉랭한 반응에 카일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세아는 흘끗 그녀의 얼굴을 살핀 후 모두와 함께 거실로 들어가려 했다. 이준의 상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럼, 일단 안으로…….”
“세아야!”
은선이 비명처럼 딸의 이름을 부른 순간, 얌전하던 이준이 확 달려들었다. 둘의 몸이 잔디가 깔린 흙바닥에 마구 나뒹굴었다. 불시에 공격 받아 쓰러진 세아는 자기를 깔고 앉은 이준의 얼굴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당황하는 대신 크게 외쳤다.
“다들 가만히 계세요!”
우르르 달려들던 사람들이 딱 움직임을 멈추었다. 세아는 이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태연하게 속삭였다.
“또 못 참겠어?”
이준은 대답 대신 입을 벌렸다. 목을 긁는 듯 소름끼치는 소리만 날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세아는 이준이 소리도 없이 입을 벙긋거리는 걸 보았고, 그의 입모양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정화.’
턱, 이준이 오른손을 세아의 가슴팍에 대고 눌렀다. 세아는 그의 눈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반항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준의 표정이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지더니, 그의 입에서 마침내 언어와 닮은 것이 튀어나왔다.
“정…….”
“이준아.”
“정…… 정…….”
이준은 끝내 스킬을 완성하지 못했다. 곧 그의 눈이 하얗게 뒤집혔고, 몸은 세아 위로 힘없이 무너졌다.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세아는 눈을 깜빡였다. 햇볕이 눈을 찔렀고, 사람들의 비명이 어지럽게 귓전을 때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했다.
“진짜 쉬운 일이 없네.”
13.52
끝도 없이 이어진 이준의 싸움은 세아의 상상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온 사방에 불을 켜 놓은 듯 환한 세상에 홀로 있었다. 낮도 밤도 없는 광활한 공간에서는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 누운 채 눈을 감아도 주위가 환하고, 팔을 들어 눈을 덮어 보아도 빛은 여전하다. 끝없이 배가 고팠고, 끝없이 목이 말랐다.
세아는 계속 이준에게 음식을 먹여 주었지만, 사실 그는 어떤 포만감도 느낄 수 없었고, 심지어 음식을 씹어 삼키는 감각조차 없었다. 그저 세아가 자신을 발견해 주길 바랐다.
누나, 도와 주세요. 나 두고 가지 말아요. 외치고 싶었는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해 주었으면 했다. 겉껍데기가 아닌 진짜 자신을. 그러나 세아는 끝내 그를 보지 못했다.
이어지는 고통, 태어나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끔찍한 굶주림과 갈증.
그러나 이준은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견뎠다. 아사 직전인 사람이 눈앞에 성대한 만찬을 외면하듯, 스스로 어금니를 악물고 자기 살을 으적으적 씹으면서.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세아의 얼굴뿐. 주위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들렸지만 그는 세아만 볼 수 있었다.
빨리 가서 죽여, 죽여, 죽이라고,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그 목소리 때문에 잠도 잘 수 없고 쉴 수도 없다. 계속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마음이 초조하고 조급하다. 그때 세아의 말이 들렸다.
‘다들 가만히 계세요!’
세아가 그렇게 외친 순간, 이준은 자기가 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창문에 앉은 얼룩을 닦아 낸 듯 갑자기 시야가 환하게 트였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제대로 인지되었다.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고, 놀란 듯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카일리와 리웨이의 머리통도 보였다. 그러나 세아를 제외한 모든 이는 그저 성냥개비나 마찬가지였다. 아주 짧은 인지의 순간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세아에게 시선을 꽂았다.
누나, 나는 배가 고프고 목도 말라요. 알 수 있어요. 누나를 죽여서 누나 피를 마시면, 누나를 씹어 삼키면 이 모든 기갈이 해결되리라는 걸. 당신의 몸 어느 곳에든 손을 얹고 정화, 그 한마디면 모든 고통이 끝나리라는 걸.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지금 이 몸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었다. 아니, 여전히 자기 몸이었으나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었다.
세아와 눈이 마주쳤다. 다른 사람들을 진정시킨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또 못 참겠어?’
진짜 고비는 그때 찾아왔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바로 앞에 있는 세아의 눈동자는 어딘지 은밀한 빛마저 품고 있었다. 둘 사이에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갔다고, 이준은 잠시 믿었다. 그는 아주 잠깐 자기 자신의 몸을 되찾았다.
그러자 격렬하게 치미는, 주입된 충동.
죽이자. 빨리 정화해 버리자. 정화하고 자유로워지자.
비로소 그때 정이준은 정이준이었다. 세아를 죽이고 싶어 할 때만. 진심으로 세아를 정화하고 싶어 할 때만 그는 몸의 주도권을 얻었다. 자기 안의 충동과 싸우고 있을 때는 환한 공간에 갇혀 시달리지만, 진정 정화를 원할 때는 온몸을 되찾았다.
끔찍한 기갈과 극심한 피로가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다. 환각이 아닌, 육체가 느끼는 정상적인 배고픔과 갈증, 그리고 졸음. 그 평범한 상태가 이준을 미치게 했다.
정화!
그는 그렇게 외쳤다. 아니, 그랬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추위에 떠는 사람처럼 입술을 떨며 정, 정, 그 한 글자만을 간신히 뱉을 뿐이었다. 정화, 그 단어를 완성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면 진짜 세아를 죽일 수 있다. 정화, 그 한마디면 된다. 손은 이미 세아에게 닿았으니 목소리만 내면, 발동어만 속삭이면 되는 것이다.
세아는 눈을 똑바로 뜨고 이준을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가 곧 자신을 제압하리라는 걸 알았다. 지금은 자신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지켜볼 뿐, 언제고 움직여 달아나거나 공격할 것을 직감했다. 세아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속박하자. 본능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장 정화할 수 없다면 묶어 두기라도 해야 했다.
이세아, 속박! 그렇게 외치려 했다. 그러나 저주에라도 걸린 듯 입술이 움직이질 않았다. 차가운 손이 자기 입술을 꽉 잡고 있는 듯. 누군가 마법을 걸어 자기 입술을 돌덩이로 만들어 버린 듯했다.
이준은 그렇게 기절했고, 눈을 떴을 때는 다시 빛뿐인 세상이었다.
또 실패했어. 그걸 안 순간, 격렬한 환희와 극심한 실망이 동시에 찾아왔다. 이제 이준은 어느 쪽이 진짜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가끔, 아주 오래 전부터 세아를 죽이고 싶어 했는데 꾹 참아 왔다는 착각이 일기도 했다.
‘이세아, 속박!’
‘이세아, 속박!’
아니, 진짜 죽인 적도 있지 않나? 직접 정화하지는 않았다, 세아를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않았다. 그래도 몇 번이고 그녀를 죽인 것 같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 이준은 끝이 없는 공간을 걸어 헤매면서 숨을 헐떡였다.
어쩌면 환영일지도 모른다. 세아를 간절히 죽이고 싶어서 보는 환영. 속박을 외치는 자신, 덮쳐드는 몬스터, 그대로 씹혀 사라지는 세아의 머리통, 자기 손에서 찢어지는 스크롤, 환한 바깥세상, 혼자가 된 자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고 다 상상인 듯도 하다.
그때 이준은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에게 힘을 줄게. 죽일 힘을.’
무슨 힘을, 누구를 죽일 힘을 준다는 거야. 그냥 날 여기서 나가게 해 줘.
‘다시는 너를 빼앗기지 않을 거야.’
이미 빼앗겼다. 이미 몸도 정신도 잃었다. 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준다는 힘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는 연약했고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때,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시는 누나를 잃지 않을 거야.’
비로소 이준은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깨달았다.
정이준, 자기 자신의 목소리였다.
13.53
깔끔하게 꾸민 다이닝 룸의 분위기는 무척 무거웠다.
세아는 이준을 1층 방의 빈 침대에 눕히고 하나하나 상황을 설명했다. 이제는 안전을 위해 숨길 수도 없었다. 최초의 버그, 시스템 살해라는 히든 퀘스트, 디버그인 이준, 한국과 미국 협회의 개입, 세뇌.
회귀를 반복했다는 사실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부모들이 알 필요 없는 문제라고 느껴졌다. 카일리와 리웨이도 그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을 아꼈다.
이야기가 끝나자, 이준의 어머니는 침착한 어조로 질문을 건넸다.
“그럼 이준이는 계속 저런 상태로 지내야 하나요?”
“아니요, 제가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사실 이미 찾아냈다. 오스카를 죽여 보는 것. 그러나 그걸 여기서 밝힐 필요는 없는 데다, 카일리도 반대한 바 있으니 조용히 움직일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