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협회가 그렇게 이세아 헌터를 죽이고 싶어 한다면, 왜 이준이만 보냈을까요? 여기 머물러도 안전할까요?”
“사실 저희는 여기 머물려고 온 건 아닙니다. 올리버를 맡기려고 왔어요. 이준이 상태 때문에 여기서 지낼 수는 없고, 다시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이준이 상태가 저래서…….”
“눈을 뜰 때까지는 기다려야죠. 이준이도 지금 싸우고 있는 겁니다.”
세아는 덤덤하게 설명했다. 이준의 부모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들은 미각성자니, 스킬의 위력을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만은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큰 소리로 울거나 실신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이준의 부모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그들은 생각을 정리하겠다며 부부끼리 2층으로 올라갔다. 아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겠지만 위험한 상황이라 그러지 못하는 듯했다.
세아의 부모는 걱정하는 지점이 조금 달랐다. 은선은 무거운 얼굴로 물었다.
“이래서 저번에 전화로 최초의 버그 이야기한 거구나. 혹시 우리가 도와줄 건 없고?”
“그런 거 없어. 엄마랑 아빠 몸 잘 챙겨. 협회가 무슨 더러운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래도 부모의 얼굴에서는 염려의 기색이 떠나질 않았다. 이래서 저번에도 말하지 않은 건데. 이전과는 달리 A급으로 각성하여 활기차게 지내는 부모님의 일상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부모님은 자신이 보호해야 할 어린애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스테파니는 좀 어때? 괜찮아?”
카일리가 가장 궁금해할 것 같아 물었다. 동생에게 다가갈 수조차 없는 카일리는 재빨리 세아의 부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아의 아버지, 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었어. 밥도 잘 먹고, 또래 친구 없는데도 심심해하지도 않고.”
“그럼 다행이네. 올리버도 사정이 좀 복잡해. 괜히 엄마랑 아빠한테 애들만 맡기는 느낌이네.”
“우리야 던전도 못 가는데 덜 지루하고 좋지. 네 몸 조심하고,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필요하면 여기 좀 머무르면서 정비해도 되잖아. 아이템도 살 겸.”
“생각해 보고. 난 정이준 상태 좀 보고 올게.”
최대한 빨리 미국 협회로 날아가 오스카의 목을 자를 생각뿐이었다.
쉽게 갈 수 있었는데 일이 어려워졌다. 어쩌면 시스템 보스 던전을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이준의 정화 스킬이 보스 몬스터에게 통하지 않았다. 스킬 강화를 진행해야 하는데, 시스템 개입으로 강화 방법을 알리는 메시지가 깨졌다. 그래도 곽남주를 죽이고 시스템의 개입을 중단시켰으니, 이제는 메시지가 제대로 보일까?
이것도 다 정이준이 정상으로 돌아와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세아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정이준?”
혹시 깨어 있나 해서 불렀는데, 그는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까 눕힐 때의 자세와 똑같은 걸 보니 뒤척이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가 세뇌 당한 후, 이렇게 잠든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수면보다는 혼절 상태지만,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
세아는 천천히 걸어 이준에게 다가갔다. 불을 꺼서 어둑한 방, 누워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때, 갑자기 이준이 덥석 세아의 손을 움켜쥐었다. 뼈를 부러뜨릴 것처럼 세게 쥐어서 세아가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떨리는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가지 마요, 누나.”
세아가 시선을 틀어 이준을 보았다. 눈을 뜬 그의 얼굴이 식은땀 범벅이었다. 세아는 깜짝 놀라 잡히지 않은 손으로 이준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너 아파? 지금은 정신 있는 거야? 잠깐만 참아. 내가 오스카한테 가서 죽여 버릴게.”
“안 돼, 누나 안 보이면 미쳐 버릴 것 같아요……. 나랑 같이 가…….”
아이처럼 조른다. 그의 상태가 너무 나빠 도저히 데리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세뇌 스킬에 당한 이준을 오스카 앞에 데려가라니. 그러다 더 강한 세뇌 스킬에 당하면 앞일을 장담할 수 없다.
“너 지금은 같이 못 가. 기다리고 있어.”
“싫어요.”
이준이 어리광을 부리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자기 이마에 닿은 세아의 손을 붙들고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 몸은 오싹할 정도로 차디차다. 이준이 세아의 손을 자기 눈가에 댔다. 세아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정이준이 운다. 세아는 멍하게 굳어 그의 애원에 젖었다.
“옆에 있어 주세요, 누나…….”
13.54
카일리와 리웨이는 평화로운 며칠을 보냈다.
처음에는 협회가 언제 공격할지 몰라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아늑한 전원과 화목한 가정생활에 익숙해졌다. 각자 마음에 드는 방을 골라잡고 푹 퍼져 쉬면서 피로도 풀었다.
의아한 점이 하나 있다면 둘째 날 저녁, 세아가 갑자기 이렇게 선언한 것이다.
“당분간 여기 머물려고 하는데 어때요?”
“당분간? 오스카 죽이러 간다더니.”
리웨이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어쩐지 이유를 다 알고 있다는 투라 세아는 순간 욱했다. 산 날짜로 따지면 자기가 리웨이보다 나이가 많은데, 간파당한 듯한 느낌에 왠지 억울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카일리 말이 맞는 것 같아서 그래요. 괜히 범죄자가 될 필요는 없죠. 나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데. 한국 협회장과 오스카는 경우가 좀 다르니까요.”
“그래, 그래. 그리고 정이준도 저 모양이고 말이지. 걱정되잖아, 안 그래?”
리웨이는 다 이해한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띠고 세아를 바라보았다. 흐뭇한 어머니 같은 표정이, 세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아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카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그냥 무례한 놈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버티네. 그래도 정신력이 좀 있는 모양이지?”
“모르겠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세아는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마침 잘 됐지, 뭐. 스테파니랑 올리버 상태도 좀 보고, 우리도 너무 비행기 많이 탔으니 땅에서 좀 쉬고.”
그렇게 난데없는 전원생활이 시작되었다. 하루하루가 평범했다.
세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이준을 데리고 집 주위를 걸으며 산책을 했다. 가끔 이준이 걷다가 와락 달려들 때도 있었다. 세아는 그때마다 그를 제압하고, 기절한 이준의 몸을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준의 부모는 마음 아파했지만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서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스테파니와 올리버는 어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깝게 지냈다. 공통 관심사가 있으니, 아이템 이야기도 하고 던전 광물 이야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올리버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세아였다.
“세아.”
올리버는 항상 세아를 그렇게 불렀다. 세아는 애들을 특별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어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똑같이 행동했다.
“응?”
“뭐 해?”
“물 마시려고.”
그렇게 대답한 세아는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물을 꺼내 컵에 따랐다. 아일랜드 식탁에 혼자 앉아 다리를 까딱거리던 올리버는 유리컵을 감싼 세아의 손가락과 물을 마시느라 들린 고개를 한참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세아가 흘끗 올리버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올리버가 불쑥 물었다.
“나 뭐 만들까?”
“응? 뭐 만들 건데?”
“아니, 세아나 다른 사람들한테 필요한 거.”
“아아.”
물론 올리버가 아이템을 만들어 준다면 정말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이준의 세뇌를 풀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어 보라고 해도 좋을 테고.
세아는 흘끗 올리버의 얼굴을 살폈다. 열세 살 소년의 얼굴에 해가 비쳐 환했다.
“지금은 아이템 필요 없어.”
“필요 없어?”
“어.”
세아는 컵을 간단히 씻어 건조대에 올려놓고 물병도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그 단순한 동작을 눈으로 좇던 올리버가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없어?”
“응.”
“그럼 날 왜 데려왔어?”
“네가 거기 갇혀 있었잖아. 카일리가 원하기도 했고.”
사실 카일리가 아니었다면 올리버를 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장 정이준의 세뇌 문제, 시스템 보스 던전 클리어 문제가 급한데 아동 인권의 수호자까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파티원이 원했고 세아는 그걸 외면하고 싶진 않았다.
정이준도 기다릴 겸, 겸사겸사 도운 것뿐이다. 그러니 올리버의 아이템은 필요 없다.
한참을 생각하던 올리버가 느리게 물었다.
“그럼 나 뭐 해?”
“하고 싶은 거 해. 스테파니랑 놀든지, 아니면 집 구경이나 하든지. 엄마한테 들었는데, 너 방에서 많이 안 나왔다며. 이 집 넓고 마당도 잘 되어 있으니까 햇볕도 쬐고.”
세아는 부엌에서 나가며 올리버의 어깨를 가볍게 톡 건드리듯 쓸었다. 올리버는 세아가 떠난 뒤에도 한참 자리에 남아 있다가, 이내 기운을 차린 듯 발딱 일어났다.
세아의 말대로, 올리버는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너무 오래 갇혀 지낸지라, 일상적인 물건도 모르는 게 많았다. 그래도 올리버는 즐겁게 돌아다녔고, 물건의 용도를 어른들에게 묻기도 했다.
“세아?”
“응?”
거실 장식장 앞에서 세아는 또 올리버에게 붙들렸다. 세아 뒤를 졸졸 따라오던 이준도 저절로 걸음을 멈추었다. 올리버는 그런 이준을 보더니, 자기가 하려던 질문도 잊고 불쑥 물었다.
“저 사람은 왜 저래?”
“아. 좀 아파.”
“어디가 아픈데?”
“머리가. 뭐 물어보려고 부른 거 아니야?”
올리버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들어 장식장 안에 있는 물건을 하나 가리켰다.
“나 저거 꺼내 봐도 돼?”
“저거?”
세아는 살짝 허리를 굽혀 장식장을 들여다보았다. 세아의 부모, 그리고 이준의 부모까지 짐을 가져왔으니 잡다한 게 생각보다 많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던전에서 가져온 게 분명한 다이아몬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