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던전이 나타나며 보석의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 던전에서 귀한 보석이 끊임없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헐값이 된 건 아니어서, 헌터 중에는 보석 채집만 하러 다니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다들 왜 그렇게 날 죽이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기도 하고.’
세아는 혼자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잡생각을 걷어내며 그녀가 다이아몬드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거? 이거 아마 우리 부모님이 가져온 걸 텐데, 가지고 놀아도 될 거야.”
“아니, 그거 말고 저거.”
올리버가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손가락 끝으로 정확히 가리켰다.
아주 평범한 돌멩이였다. 탁구공이나 골프공처럼 표면에 매끈하게 다듬어진 구 모양으로, 특별한 광물 같지도 않았다. 회색 바탕에 가끔 콕콕 박힌 검은 점. 세아는 잠시 돌멩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S급 제작자이자 천재라고 소문난 올리버가 관심을 보였으니, 평범한 물건일 리 없다. 게다가 그저 그런 돌멩이였다면 장식장에 넣지도 않았을 테고. 이리로 급히 이동하는 중에 챙겼으면 꽤 중요한 물건일 것이다.
마침 이준의 아버지가 고개를 내밀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세아는 편안하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 돌멩이 뭔지 아세요?”
아무래도 부모님 물건 같지는 않아서 물었는데, 이준의 아버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준이 첫 튜토리얼 퀘스트 보상 아이템이에요.”
“튜토리얼 퀘스트 보상?”
“아니, 왜, 처음 각성하면 좀 시간 지나서 튜토리얼 퀘스트가 온다면서요. 이준이도 그걸 받았는데, 클리어 보상으로 받은 아이템입니다. 그러니까 이준이가 갖게 된 첫 아이템인 셈이죠!”
세아가 조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건 아는데요, 보통 튜토리얼 퀘스트 보상은 좀 더…… 실용적인 거거든요. 이준이는 좀 특이하네요.”
“애가 그걸 버리려고 하더라고요, 쓸모없다면서. 아무리 봐도 평범한 돌멩이라고. 근데 그래도 자식이 얻은 첫 아이템인데 아깝잖아요.”
고개를 끄덕인 세아는 올리버의 부탁을 전했고, 그렇게 돌멩이는 올리버 손으로 넘어갔다. 부모들이 다시 돌아간 후 세아는 흘끗 이준을 돌아보았다. 처음 얻은 아이템이라, 그걸 보면 뭔가 반응이 있을까 했는데 이준은 조용했다.
“그거 무슨 원석이야?”
세아가 넌지시 물었다. 올리버는 손가락 관절로 돌을 몇 차례 톡톡 두드려 보더니 스킬을 사용했다.
“아이템 조회.”
아이템이었어? 세아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누가 봐도 아이템 제작 재료로 쓰일 듯한 돌멩이인데, 완성된 아이템이었다니.
올리버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상해.”
“왜?”
혹시, 혹시 기적처럼 이준의 세뇌를 풀 아이템일지도 모른다! 세아는 갑자기 들떠서 열심히 돌멩이를 들여다보았다. 올리버가 고개를 들고 세아를 보며 대답했다.
“이거, 귀속 아이템이야. 정…… 정이준…… 헌터한테 귀속되어 있어.”
“…….”
갑자기 세아의 몸에서 기대감이 쭉 빠져나갔다.
귀속 아이템이라고 특별할 건 없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판매하거나 양도할 수 없게 되는 것뿐. 심지어 일정 기간 대여도 가능했다.
“그래? 별 기능은 없고?”
“그건 아직 모르겠는데…… 귀속 날짜가 이상해서.”
“튜토리얼 퀘스트 클리어하고 받았다고 했으니까 5년 전이겠지. 그때가 재앙 발발 시점이니까.”
“그러니까.”
뭐가 그렇다는 거야? 세아는 이준이 무어라 답을 주기라도 할 것처럼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기계처럼 무표정한 얼굴에는 어떤 힌트도, 실마리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올리버는 돌멩이를 들어 세아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이 아이템, 귀속 날짜가 10년 후로 나와.”
“뭐?”
“그러니까, 이 아이템이 소유자한테 귀속된 건 10년 후야.”
10년 후.
아직 닥쳐오지도 않은 시간에 돌멩이는 정이준에게 귀속되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시간대에 존재하고 있다. 정이준의 귀속 아이템으로, 튜토리얼 클리어 보상 아이템 형식으로.
“이상하지 않아? 스테파니한테도 물어봐야겠다!”
올리버는 천재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한 듯 돌멩이를 들고 도도도 뛰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세아는 그렇게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죽으면 바로 같은 날짜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자기가 죽으면 세상도 늘 곧장 다시 시작된다고 여겼다. 자기가 죽으면 그 세상도 그대로 끝이라고.
그러데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오싹한 한기가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만일 자신이 죽은 후에도 세상의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면. 그 세상에 정이준이 살았다면.
그는 대체 무엇을 했을까?
13.55
언젠가 시스템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모르는 거 하나 알려 줄까? 세상이 갑자기 바뀐 거, 그거 다 내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내가 서아정도 죽이고 협회장도 바꿔서 일을 다 꼬아 놨다고?’
그럼 세상이 이상해진 게 네 탓이지, 누구 탓이냐고 물었다. 그때 시스템이 한 대답을 세아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건 다 정이준 때문이야.’
이간질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시스템은 서아정으로 둔갑해 김현호를 충동질했다. 다음에는 곽남주의 몸을 입은 채 협회장의 도청 사실을 알려 주는 척 신뢰를 얻고, 카일리를 이용해 세아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정이준에 대한 말도 당연히 거짓이거나 왜곡된 진실일 것이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이준?”
세아는 계속 자기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이준을 돌아보았다.
그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혹시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부분은 없는지. 그러나 이준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고, 정신이 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물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이준의 어깨를 툭 쳤다.
“너 왜 자꾸 따라다녀. 너희 부모님이 엄청 이상하게 보시는 거 알아?”
이런 실없는 혼잣말만 이어질 뿐이다.
하염없이 기다리며 시간이 간다. 처음에는 빨리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애가 탔는데, 이준이 간절히 매달린 날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옆에 있어 주세요, 누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복잡한 생각은 여기까지 하자, 그렇게 다짐한 세아는 방으로 돌아가 머리를 식히기로 했다. 이준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세아는 침대에 바르게 누웠다. 급한 일 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몸이 흐물흐물 녹는 듯했다.
이렇게 무료하게 누워 지낸 건 오랜만이다. 삶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돌아와, 주위를 살필 틈도 없이 돌진했다.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반쯤 잠들었던 세아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러는 중에도 이준의 눈길은 세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누구세요?”
어색하게 물으니 문이 열리고 올리버가 안으로 들어왔다.
“세아, 할 말 있어서.”
“아, 어.”
세아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흘끗 이준을 살폈으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올리버는 이상한 사람을 보듯 이준에게 시선을 주더니, 이내 세아 옆으로 와서 나란히 앉았다. 올리버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니, 짐작도 가지 않았다. 세아는 사이를 두었다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
“스테파니가 좀 이상해.”
“스테파니?”
“응.”
“뭐가 이상한데?”
사실 멀쩡한 게 이상할지도 모른다. 스테파니는 3년 동안 암흑 속에 갇혀 있었다. 자기 친언니가 등을 떠밀어 여기 갇혔다고 믿으면서. 아직 스테파니와 제대로 대화한 적은 없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면 그게 바로 정상 아닌가 싶긴 했다.
그러나 올리버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스킬을 못 써.”
“뭐?”
“이 아이템 보여 주러 갔었는데, 아이템 조회 스킬도 못 쓰더라고.”
올리버가 그 둥근 돌멩이를 불쑥 내밀어 보여 주며 대답했다. 세아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헛기침을 했다. 아직 어린 올리버가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스테파니는 좀 아플 거야.”
“왜 아픈데?”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어. 가끔, 큰 충격을 받아서 일시적으로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헌터도 있어.”
“아이템 조회는 기본 스킬인데?”
“그런 거랑 상관없이 스킬 자체를 못 쓰게 되는 거야. 가끔 한두 개만 못 쓰게 될 때도 있고.”
드물지만 이런 경우가 있기는 하다. 아무리 강한 능력을 지녔다 해도, 헌터 역시 사람이다. 심한 상처를 입거나 정신적 충격을 받은 후 무력한 상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각성자 센터에서 이에 대한 많은 연구를 했지만 아직까지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아마 스테파니는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카일리에 대한 오해를 풀고 스마일맨을 직접 보기만 한다면 스테파니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물론 그게 대체 언제냐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구나.”
올리버는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아는 잠시 그런 올리버를 바라보다가 슬쩍 물었다.
“근데 왜 나한테 얘기해 줬어? 스테파니에 대한 거.”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지? 세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애나 어른이나 다를 거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애들은 대하기 어렵다.
그때 올리버가 당연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우린 파티잖아.”
“어…….”
올리버를 파티원으로 생각해도 되는 건가, 세아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일단 올리버는 너무 어리다. 열세 살 소년 파티원이라니, 헌터 활동에 나이 제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세아도 양심은 있었다. 이렇게 어린애를 위험한 퀘스트에 끌어들이다니, 안 될 말이다.
“올리버, 너는 아직 너무…….”
“어, 이거 봐!”
올리버가 세아의 말을 뚝 자르고 손 안의 아이템을 들어올렸다. 탁구공 정도의 작은 아이템이 올리버의 손에서 진동하더니, 바닥으로 툭 떨어져 이준 쪽으로 굴러갔다. 아이템은 바닥에 앉은 이준의 다리에 닿았지만, 거기서 멈출 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