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리 대단한 현상은 아니라 세아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귀속 아이템이라 그런 거 아니야?”
“만져 보면 다를 수도 있는데……. 저 사람한테 아이템 한 번만 쥐어 보라고 하면 안 돼?”
“지금은 안 돼.”
“아쉽다…….”
올리버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다시 아이템을 챙겼다. 그런 다음 아이템을 더 만져보러 가야겠다며 일어나 버렸다.
바람처럼 왔다 가 버린 올리버를 생각하다 세아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다시 자리에 누워 버렸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고도 이준을 향해 중얼거렸다.
“복잡하네. 저 아이템이 무슨 도움이 될까?”
그 순간, 이준이 번개처럼 자리를 박차고 힘껏 달려들었다. 방심한 세아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고, 뒤통수가 벽에 쾅 부딪쳤다. 부딪친 건 뒤통수인데 코와 눈까지 빠개질 듯 아팠다. 이준은 그대로 세아 위에 올라타 엄지손가락으로 목 중앙을 세게 눌렀다.
젠장,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세아는 잠시 희망을 품었던 스스로에게 욕을 쏟으며 그대로 손을 들었다. 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먹이 이준의 얼굴 중앙에 꽂았다.
소리가 요란했고 고통도 그만큼 컸을 텐데 이준은 물러나지 않았다. 육신의 고통에도 주저하거나 방어하지 않도록 세뇌된 것이다. 세아의 뺨으로 이준의 코에서 흐른 피가 뚝뚝 떨어졌다. 세아는 저번처럼 또 무기를 사용해야 하나 고민했다.
일단 휘휘 손을 저어 올리버를 밖으로 내보냈다. 깜짝 놀라 얼어 있던 올리버가 후다닥 밖으로 뛰어 나갔다. 사람들을 불러 올 생각이겠지만, 세아는 그 전에 끝내고 싶었다. 뺨으로 이준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이준의 두 어깨를 밀어내듯 짚었다. 그러나 완력으로 밀어낼 생각은 없었다. 세아는 그대로 정신을 집중해 몸에 결계를 둘렀다.
세아의 결계는 강력하고 특별하다. 다른 헌터처럼 일정 구역을 보호하는 게 아니다. 결계는 그녀의 몸에서부터 서서히 주위 사물을 밀어 내며 반원의 형태를 갖춘다. 그녀 몸 밖의 위험한 것들을 모두 멀리 떨어뜨린다.
세아가 적으로 인식한 이준의 몸도 그대로 투명한 벽에 밀려나듯 멀어졌다. 마침내 그의 손이 떨어져나가자, 세아는 벌떡 일어나 뻐근한 목을 문질렀다. 포션이라도 마시기 전에는 이 얼얼한 느낌이 가시지 않을 듯했다. 마른기침이 쏟아졌고, 목은 끊어질 듯 아팠다.
“정이준?”
혹시 정신을 차릴까 싶어 불러 봤지만 반응이 없다. 다음 순간, 쾅, 결계가 무너질 듯 거세게 흔들렸다. 이준이 결계에 손을 대고 무언가 공격 스킬을 사용한 듯했다.
그러나 세아의 결계는 이준 정도 힘에 깨질 만큼 약하지 않아서, 공격의 피해는 시전자인 이준에게 되돌아갔다. 파편이 되어 튕겨 나온 힘이 이준의 얼굴과 팔을 험악하게 할퀴는 게 보였다. 살점이 떨어지며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세아는 이마를 문질렀다.
‘진짜 답이 없네.’
잠시 뒤로 물러나는 이준이 보였다. 그대로 달려와 어깨로 받을 생각인 듯했다. 세아는 숫자를 헤아렸다. 그가 달려오는 속도에 맞춰, 하나, 둘……. 이준의 몸이 앞으로 기우는 순간 세아가 그대로 결계를 거두었다.
있는 힘껏 달려와 몸을 날렸는데 장애물이 사라지자, 이준이 균형을 잃고 우당탕 나뒹굴었다. 세아는 바닥에 넘어진 그의 등에 올라타 왼팔을 꺾어 잡았다. 목덜미를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 그대로 기절시키려고 했는데, 세아가 멈칫했다.
“이준아?”
손에 닿은 목덜미가 너무 뜨거웠다. 세아도 싸우느라 몸에 열이 났는데, 이준의 몸은 더했다. 세아는 기운 없이 버둥거리는 이준의 등에 올라탄 채 손을 움직여 그의 이마를 짚었다.
‘고열이네.’
뱉는 숨도 뜨겁다. 세아는 이준의 충혈된 눈을 보며 잠깐 생각을 다듬었다. 이대로 요양시키려 했는데 앞서서 병이 나 버렸다. 어쩌나 싶어 이준을 누르고만 있는데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세아는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바싹 갖다 댔다. 몸을 낮추니 이준의 열기가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파요…….”
정신이 조금 돌아온 모양이다. 그가 호소하는 통증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열이 나서인지, 아니면 세아가 팔을 꺾어 누르고 있어서인지. 세아가 그를 일으켜야 하나 아니면 기절시켜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이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낫게 해 주세요.”
언젠가도 들었던 말이다.
그는 세아에게 좋아한다고, 누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일시적인 감정일 거라고 일축하자 그는 사랑 대신 고통을 고백하며 낫게 해 달라고 매달렸다.
세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살며시. 이 작은 접촉조차 그에게 고통으로 닿을까 걱정스러웠다. 왜 이런 걱정을 하는 걸까. 세아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열과 눈물로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그가 다시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죽게 해 주세요…….”
뚝, 세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슴에서 불길이 솟았다. 이유 모를 격렬한 감정이 배 속에서부터 분수처럼 역류했다. 분노인 듯도 연민인 듯도 했는데, 분노 쪽이 세아에게는 좀 더 친숙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준의 머리카락을 콱 움켜쥐고 몸을 낮추어 속삭였다.
“난 절대 포기 안 해. 네가 아파 죽겠다고 해도 상관없어.”
이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긴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애처로웠다. 그가 제정신과 광기 사이에 있을 때 세아가 그의 머리를 놓아 주었다.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바로 그때, 문이 쾅 열리며 카일리와 리웨이가 뛰어 들어왔다.
“세아!”
세아는 대답하는 대신, 이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준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세아가 그의 몸을 질질 끌어 침대 위에 눕히는 걸 보고, 카일리가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이렇게 둬도 괜찮은 거야?”
사실, 묶이지 않은 채 돌아다니는 정이준은 모두에게 긴장감을 안기는 존재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니 세아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대강은 이해했다. 그래도 분명 성과가 있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제대로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그래도 가끔 의식을 찾는 것 같긴 해. 좀 더 기다려야지.”
“그 전에 네가 잘못되는 건 아니고? 너무 큰소리가 나서 와본 건데, 네 뒤통수 좀 봐. 부어올랐잖아.”
세아는 손을 들어 뒤통수를 슥슥 만져 보았다. 확실히 혹이 크긴 했다. 뇌출혈이 일어나지 않은 게 어디야, 세아는 대충 생각하며 이준을 바라보았다.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지독한 열이었다. 세아는 일단 그의 옷을 벗기기 위해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 모습을 본 리웨이가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너 뭐 해?”
“이상한 생각 하지 마요. 얘가 아파서 그런 거니까.”
세아는 그의 셔츠를 풀어헤친 후 가슴팍에 손등을 대보았다. 역시 잘못 느낀 게 아니다. 물수건이나 얼음이라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세아가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간호는 간호고, 일단 스테파니에 대한 정보부터 전해야 했다.
“카일리, 너한테 해 줄 얘기가 있어. 스테파니 얘기야.”
세아는 스테파니가 스킬을 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간단히 알렸고, 카일리는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은 후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카일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걸, 세아도 리웨이도 볼 수 있었다.
말하지 말 걸 그랬나,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카일리는 스테파니의 언니였다. 이런 중요한 문제를 모르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럼 우리 일단 갈게.”
리웨이가 넋이 나간 카일리를 붙든 후, 세아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세아는 카일리에게 무어라 위로의 말을 던지는 대신 침묵을 지켰다.
다시 방이 조용해졌고, 이준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곤히 잠든 채였다. 깨어나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할까. 울면서 죽고 싶다고 애원했다는 걸…….
“이준아.”
피를 닦아 주며 세아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나 진짜 너만 보면 뒤통수가 너무 아파.”
비유가 아니라 정말 아직도 뒤통수가 화끈거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를 죽이는 일은 없다. 그를 포기하지도 않는다. 죽음은 죽음이지, 회복이 아니다. 인생은 어설픈 동화나 신화가 아니므로 죽음은 결별일 뿐이다.
내가 너를 낫게 할 수 있을까.
뜨거운 이준의 몸에 손을 얹은 채, 세아는 가만히 읊조려 보았다.
13.56
“스테파니?”
카일리는 거실에 혼자 앉은 스테파니 뒤로 다가가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스테파니는 햇볕 드는 소파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열여덟 살인데, 갇혀 있는 3년 동안 몸은 하나도 자라지 않은 것 같다. 어디로 보나 3년 전의 스테파니였다.
카일리는 살며시 손을 뻗어 동생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얼마나 못 먹었으면.’
음식도, 식수도 부족했을 터다.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한 번도 제대로 물은 적은 없다. 스테파니가 카일리와의 대화를 거부한 탓이었다.
햇볕을 오래 받고 있었는지 머리카락이 따뜻했다. 감긴 눈꺼풀, 촘촘한 속눈썹, 살짝 벌어진 입술. 나이에 비해 어린 얼굴 때문인지 작은 동물처럼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살피니 키도 전혀 자라지 않은 듯했다.
너무나 그리웠는데, 아직 말 한마디 제대로 섞어 보지 못했다. 가슴 어귀로 통증이 묵직하게 전해졌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스킬까지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이런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본 건 처음이다. 스킬을 쓰지 못하게 된 걸 알고 스테파니가 얼마나 놀랐을까 생각하니 목이 꽉 막혔다. 카일리는 스테파니의 머리카락을 쓸며 울음을 참았다.
그러다 그만 일어나려는 순간, 갑자기 스테파니가 반짝 눈을 떴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몇 초 후, 먼저 움직인 건 스테파니였다. 그녀는 사냥꾼을 발견한 작은 동물처럼 후다닥 몸을 일으키더니 소파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