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13.59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왔던 스테파니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올리버가 혼자 우두커니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스테파니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만 보다가 겨우 물었다.
“너 왜 바닥에 앉아 있어?”
“스테파니, 넌 세아 파티야?”
“뭐라고?”
스테파니는 한참 어린 동생을 바라보다가 일단 물을 따라 마셨다. 컵을 헹구고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을 때, 올리버가 다시 물었다.
“넌 세아 파티냐고.”
“아니.”
“왜 아닌데?”
스테파니는 이 뜬금없는 물음에 답하는 대신 올리버 앞에 쪼그려 앉았다. 올리버를 무척 사랑한다거나 애틋하게 여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눈에 밟히긴 했다. 그래서 스테파니는 위로해 줄 겸 물었다.
“그게 왜 갑자기 궁금해?”
“세아가 나한테…….”
곧장 하소연할 듯 입을 열더니 한참을 망설인다. 스테파니는 잠잠히 기다렸다. 올리버는 곧 마음을 추스른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한테 난 자기 파티 아니래.”
당연히 아니지, 열세 살이 무슨 던전 파티야. 스테파니는 그 말을 꾹 참았다. 누구나 당연히 아는 사실인데 올리버는 자기가 세아의 파티원이 될 수 없다는 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스테파니는 적당히 어울려 주고 방으로 돌아갈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구나. 다들 던전 갔어? 집이 조용하더라니.”
“위험하니까 난 여기 있으래. 스마일맨도 우글거릴 거라면서…….”
스테파니의 몸이 딱 굳었다. 올리버는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시스템 속성 던전이라면서 난 위험하다는데, 나도 S급 헌터야. 몬스터랑 싸울 줄도 알고 지켜 주지 않아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는데, 왜 나만 두고 가는 거야?”
“올리버.”
스테파니가 작은 목소리로 마치 속삭이듯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올리버가 고개를 들었을 때, 스테파니의 표정은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너 정말 던전에서 생존할 수 있어?”
“응.”
“그럼 나랑 같이 갈래? 그 던전.”
“하지만 세아가 오지 말라고 했는데…….”
스테파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스마일맨을 꼭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킬도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 혼자 던전에 뛰어들 수는 없다. 올리버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래도 S급 헌터고 저렇게 자신 있다고 하니 반드시 힘이 될 것이다.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면, 너도 파티원으로 인정해 주지 않을까?”
올리버는 솔깃한 표정으로 스테파니를 보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 그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13.60
산에 있는 던전이라 차로는 갈 수 없었다. 세아와 다른 사람들은 산 아래쪽에 차를 세우고 등산부터 시작했다. 다행히 까마득히 높은 산이 아니라 금방 던전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세아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일반 퀘스트 ‘던전 공략 부탁드…’를 수락한 다른 헌터가 있습니다. 던전이 공동 참여 던전으로 변경됩니다.]
세아는 메시지를 다시 확인한 후 창을 꺼 버렸다.
던전 입구는 평범했다. 산중턱에 문이 불쑥 솟아 있는 형태로, 문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열고 들어가면 던전이 펼쳐질 것이다.
세아는 뒤로 돌아 파티원을 확인했다. 카일리와 리웨이는 준비가 끝난 것 같고, 정이준도 무표정할 뿐 습격할 기색은 없다. 불안정한 정이준을 끌고 던전에 들어가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어쩐지 여길 꼭 가야만 할 것 같았다.
감수하자. 그렇게 다짐한 세아는 카일리와 리웨이에게 당부했다.
“이미 말했지만 내가 여기서 죽으면 모든 게 과거로 돌아가요. 지금까지 한 걸 허사로 돌릴 수는 없으니 같이 잘해야 해요.”
“좋아.”
카일리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아는 앞장서서 문을 열고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거대한 위장 속 같았다. 사방이 불그스름했고 바닥과 벽, 천장까지 주름져 있었다.
시큼한 냄새가 훅 코를 찔러 세아는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주름진 바닥에 발이 푹푹 빠지고, 밑창에 정체 모를 진액이 달라붙어 끈적거렸다.
안은 정말 체온이라도 지닌 듯 불쾌할 정도로 따뜻했다. 숨을 쉬는 것처럼, 벽과 바닥이 느리고 규칙적으로 울렁거려 쉽게 전진하긴 어려울 듯했다.
“우웩!”
리웨이가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시체 하나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화’되는 중이었다. 아마 공략을 위해 왔다가 죽은 헌터일 것이다.
흐물흐물한 음식물처럼 변한 시체를 보던 일행은 역겨움을 참으며 걸음을 옮겼다. 바닥이 물컹해 걷기 어려웠지만, S급 헌터가 지칠 정도는 아니었다.
통로는 넓었고 딱히 갈림길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꾸역꾸역 나아가면 그만이었다. 세아는 이준의 상태를 계속 확인하며 천천히 걸었다. 주위는 빛 없이도 밝았지만, 앞쪽은 짐승의 목구멍처럼 컴컴했다. 가만히 걷던 세아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잠깐. 앞이 뭔가 이상해.”
“내 소환수를 보내 보지.”
시원스럽게 말한 리웨이가 손을 휘두르자, 사람 몸뚱이만 한 까마귀가 허공에 나타났다. 까마귀는 리웨이가 명령하기도 전에 곧장 앞으로 돌진하듯 날아갔다.
“편리하네요.”
카일리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S급 헌터의 소환수 스킬을 처음 본 세아는, 소환수가 진짜 살아 있는 동물처럼 보여 깜짝 놀랐다. 리웨이는 우쭐하듯 대답했다.
“실제 동물은 아니지만, 스킬도 쓸 수 있고 좋아. 도움이 많이 되지.”
“저 소환수가 다치거나 죽으면 당신도 피해를 입나요?”
“그건 아니야. 대신 소환수를 부를 때 내 기력을 좀 많이 소진해. S급이나 A급 정도의 기력이 아니면, 소환수 스킬은 별로 쓸모가 없지. 나야 기력이 많으니까…….”
바로 그때, 까아악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먼 곳에서부터 날아오는 울음이라 아득했지만,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세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을 노려보다가 이내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까마귀가 마치 달아나듯 이리로 날아오는 게 보였다. 그 뒤를 뒤쫓는 거센 물길은 댐을 연 것처럼 무시무시했다. 저 너머에서 홍수가 났다 해도 믿을 수 있다. 휩쓸리면 순식간에 떠내려갈 게 분명했다. 세아는 앞뒤 볼 것 없이 외쳤다.
“결계를 칠 거예요! 모두 안으로!”
세아가 손을 뻗어 반구형 결계를 펼치며 정이준을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 지친 까마귀가 순식간에 물살에 잡아먹혔다. 뼈까지 녹이는 듯 치익 소리가 나더니 까마귀는 깃털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물살은 그대로 결계 위를 덮쳤다. 일행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지만, 세아는 컴컴하게 덮어 오는 물살을 노려보며 단단히 버티고 섰다. 염산을 뒤집어쓴 듯 겉에서부터 녹아내리긴 했지만 다행히 결계는 무사했다.
세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안이 잠길 정도로 쏟아지는 물은 아니었다. 그저 결계를 한번 덮치고 주위로 퍼져 끝났을 뿐이다.
“무슨 염산 같네.”
세아는 힘겹게 결론을 내렸다. 하마터면 모두의 몸이 흔적도 없이 녹아 버릴 뻔했다. 유지되는 물질은 아닌 듯, 물은 금세 바닥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다들 괜찮죠? 결계 풀게요.”
그렇게 말한 세아가 결계를 풀었다. 그러자마자 붉은 벽에서 찍, 물총을 쏟듯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누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물줄기가 세아와 이준 사이를 갈랐다. 물줄기는 세아의 왼뺨과 정이준의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아!”
카일리가 비명처럼 불렀다. 그러나 세아의 입에서는 다른 이름이 튀어나갔다.
“정이준!”
이준의 오른쪽 어깨가 그대로 녹아내렸다. 부글부글 거품이 일어나며 누가 푸딩을 스푼으로 퍼먹은 듯 푹 꺼지고 말았다. 참기 어려운 고통일 텐데, 이준은 신음하기는커녕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세아는 뺨이 화상 입은 듯 화끈거리는 걸 느끼지도 못했다. 염산은 계속 이준의 살과 뼈를 녹이고 있었다. 피는 흐를 틈도 없이 고인 채로 타 버렸고, 뻘겋게 드러나는 맨살과 근육이 징그러웠다.
“정이준, 치유해!”
세아는 힘으로 이준을 주저앉히고 외쳤다. 그러나 이준은 눈을 깜빡이며 세아만 바라볼 뿐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세아는 자기 뺨을 타고 흐르는 축축한 진액을 소매로 대충 닦아 냈다. 몹시 쓰라렸지만 심각한 통증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정이준의 어깨다.
세아는 답답한 마음에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야, 치유하라고!”
마침내 목소리가 전달된 듯, 이준이 서서히 왼손을 움직였다. 세아는 안도의 숨을 토하며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뒤에서는 카일리와 리웨이가 짐을 뒤져 포션을 찾느라 분주했다.
이준의 손이 느리게 세아의 뺨에 닿았다. 거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준의 손끝이 닿으니 고통이 전해졌다. 세아가 반사적으로 움찔하자 이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그대로 입술을 움직였다.
“치유.”
다친 곳이 순식간에 어는 듯 얼얼하고 차가워지더니, 이내 고통이 말끔히 지워졌다. 세아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더듬어 보고 입을 벌렸다. 피부는 다친 적 없는 것처럼 매끈했다. 눈이 마주치니 이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막 포션을 꺼내 다가오던 카일리와 리웨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감동할 준비를 마쳤다. 물론 세아는 그 감격의 물결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 새끼야, 너 치유하라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