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13.61
세아가 이준을 공식 파티원으로 등록했을 때, 이준은 아주 잠시 정신을 되찾았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 창 때문이었다.
[이세아의 파티원이 되었습니다. 자세한 정보는 파티 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파티장의 동의가 없어도 파티 탈퇴는 가능합니다.]
파티.
이준의 흐린 정신으로 글자의 의미가 조각조각 입력되었다. 그는 세아의 정식 파티원이 된 것이다. 그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 애써 보았다.
세뇌당한 후로는 많은 감정이 회색빛으로 뭉개져서 고통 말고는 아무것도 생생하게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세아와 공식 파티를 맺은 순간이니 으깨지는 정신으로나마 즐거움을 얻고 싶었다.
그러나 이준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시스템 창의 메시지는 분명 이해했는데,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저 요리법을 읽은 듯 무감각했다.
아무래도 나는 진짜 미쳐 버렸나 봐.
이준은 환한 공간에 갇혀 그렇게 자조했다. 이대로 가다가, 세아가 죽어도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거 아닐까. 오스카는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것일까.
무채색의 절망과 함께, 돌아왔던 이성도 간단히 사라져 버렸다.
다음 순간, 카일리의 날카로운 비명이 이준의 의식을 강제로 일깨웠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본 것은 세아의 뺨을 타고 느리게 흘러내리는 새빨간 피.
누나가 다쳤다. 이준은 믿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세아가 다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니, 자잘한 상처 정도야 보아 왔지만 저렇게 피가 흐를 정도는 아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 순간에는 독한 약에서 깨어난 듯 머리마저 맑아졌다.
세아가 바로 앞에서 뭐라고 소리쳤지만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안개 낀 듯 뿌옇게 보였고, 그는 세아의 뺨에서 흐르는 붉은 피에 시선을 빼앗겼다.
천천히 세아의 뺨에 손을 댔다. 통증을 느끼는지, 세아의 눈가가 아주 잠시 일그러졌다. 누나도 아프구나. 이런 순간에, 자기가 쓸모없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뭉개진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치유.’
세아의 고통이 지워지는 걸 보면서 그는 온 힘을 다해 웃었다. 이런 상처를 없애는 건 너무나 쉬운데. 세뇌 스킬은 스스로 치유할 수도 없고 발버둥 쳐도 벗어나기 어렵다.
누나는 이런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겠지. 누나는 강하니까, 내가 이렇게 약한 게 싫겠지. 그래도 나도 가끔은 도움이 되잖아요.
세아가 무어라 욕을 퍼부었지만 그는 끝내 웃었다. 파티로 등록되었을 때는 되지 않았던 게, 지금은 된다. 웃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웃는다. 이준은 그게 더욱 기뻤다.
그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세아가 곁에 있어 주는 한, 그는 괜찮을 것이다.
13.62
한참 앞으로만 나아가던 파티는 중간에 잠시 짐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세아는 자기를 따라오는 정이준의 얼굴만 보면 울화통이 터지는 듯 그쪽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준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아 물을 마시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묶었다. 카일리는 포션을 들고 조심스럽게 세아 쪽으로 다가갔다.
“세아, 너 괜찮은 거 맞아?”
이준의 스킬로 상처는 말끔히 나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카일리는 손을 뻗어 세아의 얼굴에 댔고, 세아는 됐다는 듯 고개를 틀었다.
“괜찮아. 완전히 나았어. 다쳤던 것도 까먹을 정도야.”
“그래……. 정이준 어깨도 그럭저럭 괜찮아.”
이준은 끝까지 자기 자신에게 치유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 결국 카일리와 리웨이가 달려들어 그의 상처에 포션을 콸콸 쏟아야 했다. 세아는 이를 갈며 이준을 노려보았다.
그가 어떤 종류의 세뇌에 걸렸는지 확실히 알겠다. 목표물에게 달려들다 어떤 상처를 입든 개의치 않고 죽도록 달려들게 한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에게 치유 스킬을 사용하지 않은 것일 테고.
카일리는 분에 찬 세아의 표정을 살피더니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래도, 난 얘 되게 재수 없는 애인 줄 알았는데 생각이랑 다르네. 그 와중에도 너한테 치유 스킬 썼잖아. 자기 팔이 녹아 가고 있는데. 대단하지?”
“정신 들면 진짜 죽도록 패 줄 거야.”
“왜 화가 났어.”
카일리가 웃는 낯으로 물었을 때, 세아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일리는 달래는 듯한 얼굴로 세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세아가 확인하듯 물었다.
“내가 화가 났다고?”
“그래, 그래도 너 치유해 줬는데. 아까부터 화나 있잖아. 기분 풀어.”
세아는 대답 없이 정이준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아까부터 속이 부글부글 끓고 이준의 얼굴만 봐도 주먹이 나갈 것 같다. 부당한 걸 알지만, 자기 몸 하나 똑바로 못 챙기냐고 모진 말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다. 그가 자신을 공격했을 때도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왜?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준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꼭 한 대는 갈기고 말리라는 것.
카일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돌렸다.
“근데 여기 이상하긴 하다. 지금까지 이런 던전은 본 적도 없어. 리웨이가 소환수를 앞으로 보내서 길을 확인하는 중이야.”
세아는 흘끗 멀리 떨어져 있는 리웨이를 확인했다. 그녀는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눈을 감고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확실히 소환수를 부를 수 있는 헌터가 있으니 편리한 점이 많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위험을 소환수 덕에 피했다. 전에 없이 위험한 던전이라, 아직 제대로 된 몬스터랄 게 나오지도 않았는데 몇 번이나 고비를 넘겼다.
그때, 리웨이가 반짝 눈을 떴다. 그러더니 그대로 몸을 일으키며 팔을 앞으로 뻗었다.
커다란 매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부터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와 그대로 그녀의 팔에 앉았다. 갈고리보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팔을 쥐듯이 하고 앉은지라 위험천만하게 보였지만, 리웨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세아 쪽으로 돌아섰다.
“끝에 뭐가 있는지 알아냈어.”
“그래요?”
세아가 반갑게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갑자기 나타난 시스템 던전, 수상한 던전 내부.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끝에 뭐가 있는지 알면 탐색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리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를 향해 말했다.
“웬 종이가 하나 있어.”
“종이?”
카일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리웨이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대꾸했다.
“이 소환수가 나한테 말해 주는 게 아니라, 소환수의 눈을 통해 내가 직접 보거든? 근데…… 난데없는 책상 하나, 종이 하나, 펜 하나만 있었어.”
“공간이 달라지나요?”
“아니, 그냥 그대로야. 진짜 이런 바닥에…….”
리웨이는 보라는 듯 한 발로 바닥을 꾹꾹 눌렀다.
“책상이 하나 있고, 종이랑 펜이 놓여 있더라니까?”
“종이에 뭐가 적혀 있는데요?”
“아무것도 안 적혔어. 그냥 빈 종이야. 새하얀 종이.”
“…….”
무거운 침묵이 파티를 감쌌다.
빈 종이와 펜이라니, 대체 뭘까? 이런 던전 공략 보상은 들어 본 적조차 없다. 종이 한 장 얻자고 가기에는 이 던전은 너무 위험하다. 벽이 염산을 쏘고 뼈까지 녹이는 물질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여기서 몬스터까지 나오면 어떤 아수라장이 될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카일리와 리웨이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세아를 응시했다. 세아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파티원의 뜻을 읽은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선언했다.
“둘 다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거죠?”
“사실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
리웨이는 숨김없이 답했고, 세아도 예상한 듯 바로 말을 받았다.
“그럼 나랑 정이준 둘이 갈게요. 두 사람은 먼저 던전 밖으로 나가요.”
“뭐? 말도 안 돼!”
카일리가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이준은 정상이 아니다. 언제 돌변해 세아를 공격할지 모르는데, 둘이 이 위험천만한 던전에 남겠다니?
“아무래도 앞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난 그게 뭔지 꼭 확인해야겠어.”
세아는 단단하게 대답하고 바닥에 앉아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돌아갈 사람이 가져갈 물건과 자기가 가져갈 물건을 나누려는 듯했다.
하다못해 위험하더라도 같이 가자는 제안조차 하지 않는다. 당연히 따로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바로 움직인다. 이게 무슨 파티야, 카일리는 조금 허탈해졌다. 이 칼 같은 태도에 리웨이도 썩 심기가 편치 않은 듯했다. 리웨이는 잠시 침묵하다가 툭, 세아의 이름을 뱉었다.
“야, 세아.”
“네.”
막 포션 두 개를 빼던 세아가 고개를 들어 리웨이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듯, 무구하게까지 보이는 표정이다. 리웨이는 그 얼굴을 보고 더 욱한 듯 이를 꽉 물더니 중얼거렸다.
“올리버한테도 이러더니.”
“뭐가요?”
“그냥 같이 가자고 말이나 한번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네가 파티라고 모아 놨으면서 이렇게 생판 남처럼 굴 거냐고.”
세아는 의아함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일리와 리웨이의 얼굴을 살폈다.
두 사람이 있으면 무척 든든하겠지만 없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다. 두 사람도 그걸 알고, 그러니 당연히 자기 안전부터 챙기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원래 사람은 자기 생명, 자기 목적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러나 둘은 정말로 서운한 것 같았다.
세아는 이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정말 당황했다. 안전하게 가라고 생각해 줬더니 오히려 원망을 산 것이다.
“앞은 위험할 테고 보상도 확실치 않으니까 그냥 가고 싶은 사람만 가자는 거죠……. 두 사람도 어차피 가기 싫어했잖아요?”
“그렇다고 이 위험한 던전에 너만 두고 돌아가라고? 뭐, 넌 너무 강하니까 우리 도움은 필요 없다 이거야?”
“그게 아니라, 가기 싫다는데 강요할 순 없잖아요.”
세아는 당연한 일을 가지고 왜 이런 긴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자기 자신의 히든 퀘스트와 관련된 일이다. 그러니 여기서 이 모든 일과 직접 관련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심지어 히든 퀘스트의 키나 다름없는 이준에게도 자신을 도울 의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