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59화 (59/112)

59화.

“하지만 그건…….”

“엄청 어려운 일이지. 올리버, 이런 일을 너한테 맡겨서 마음이 무겁지만…….”

세아는 짐짓 고뇌에 찬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올리버 뒤편의 리웨이는 그 어설픈 연기에 코웃음을 쳤지만 올리버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결연하기까지 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할 수 있어!”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세아는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올리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다 큰 어른을 대하듯. 열세 살 소년은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가슴을 부풀리더니 세아의 손을 맞잡았다.

세아가 올리버의 손을 놓고 일어났을 때, 세아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이준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대로 팔을 뻗어 세아의 손을 잡았다. 곁에 있던 리웨이는 언제든 그에게 달려들 자세로 긴장했지만 세아는 태연했다.

“이준아, 왜.”

이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세아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방금 올리버와 악수한 손이었다. 리웨이는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는데, 세아는 의외로 태연하게 대처했다.

“너도 악수할래?”

그런 다음 이준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단단히 맞물린 손에서 온기가 전해진다. 이준의 얼굴은 여전히 석고 조각상보다도 무감했다. 그러나 그는 의지를 지닌 예쁜 인형처럼 세아의 손을 세게 쥐었다.

“나아지고 있는 거지?”

네, 하고 속삭이듯 답하는 소리를 들은 듯도 했다.

그때, 스테파니의 손을 꼭 잡은 카일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세아는 울어서 엉망이 된 둘의 얼굴을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지금 데리고 나갈 거지? 올리버도 같이.”

“그래야지.”

“그럼 넌 애들 데리고 같이 나가 줘. 난 리웨이랑 여기 마저 공략하고 갈게. 아까 거의 다 도착했으니, 그 이후는 더 쉬울 거야.”

애들을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는데 동의하는지, 카일리는 같이 가겠다고 우기지 않고 수락했다. 카일리는 던전 입장 파티에서 탈퇴했고, 시스템 창을 확인한 세아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를 전송했다.

세아는 스테파니와 올리버를 데리고 던전 밖으로 나가는 카일리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때, 리웨이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애 잘 달래더라?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그땐 올리버가 저렇게까지 생각하는 줄 몰랐죠. 어쨌든…… 차라리 잘됐어요. 스테파니 오해도 풀린 모양이고, 카일리도 던전에서 나가게 됐으니.”

“카일리 나간 게 왜 좋은 일인데?”

“아직 확실하진 않아요. 끝까지 가 보면 알겠죠.”

세아는 이준의 상태를 확인한 후, 마치 기운을 내려는 듯 힘찬 어조로 물었다.

“그럼 갈까요?”

13.65

세아 일행은 수월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리웨이의 소환수가 돌아와 책상과 종이가 있는 곳에는 어떤 몬스터도 없다는 말을 전했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한 리웨이가 말했다.

“층도 없고, 보스 몬스터도 아직 안 나왔어. 저 앞에도 보스 몬스터가 없다는데……. 그럼 이 던전은 정말 특이하네.”

“시스템 속성이니까요. 골치 아프죠. 예측도 못 한 것들이 존재하니까.”

“그것도 그거지만, 여기 중요한 게 있을 것 같아서 더 빨리 공략하려는 거 아니야? 대체 뭐가 있으려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리웨이가 슬쩍 세아의 얼굴을 살폈다. 눈이 마주치긴 했으나 세아는 아무 대답도 없이 계속 전진할 뿐이었다.

리웨이는 세아를 살피며 생각했다.

‘분명 뭔가 짐작한 것 같은데. 왜 말을 안 하지?’

이 기묘한 선은 대체 뭘까. 파티라고, 믿는다고, 같이 가자고 하면서도 묘하게 곁을 주지 않는다. 사람을 불신하거나 싫어하진 않지만 완전히 믿거나 사랑하지도 않는 이상한 느낌.

“거의 다 왔어요.”

세아는 긴 숨을 내쉬며 손으로 어느 한 지점을 찍었다.

생뚱맞게 불쑥 솟은 책상의 형태가 확실히 보였다. 단단한 원목 책상이라기보다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테이블 같았다. 리웨이는 탄식하듯 말했다.

“드디어 이 물컹거리는 데서 나갈 수 있겠네. 걷기 너무 불편해서 종아리 뭉친 것 같아.”

“저도 그래요.”

세아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동의하더니 마저 걷기 시작했다.

묵묵히 걸어, 셋은 마침내 책상 앞에 도달했다. 세아와 리웨이는 나란히 서서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흰 종이, 옆에 가지런히 놓인 검은 펜. 직접 보면 무슨 설명이라도 적혀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펜 들어 봐.”

리웨이가 넌지시 권했다. 세아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리웨이를 한번 바라보았다. 리웨이가 뭘 망설이냐는 듯 눈짓하다가 아, 하고 물었다.

“위험할까 봐 그래? 내가 들어 볼까?”

“아뇨.”

세아는 마치 방명록이라도 남기는 사람처럼 일상적인 몸짓으로 펜을 들었다. 펜을 쥐고 글자를 쓸 자세를 취하자마자 시스템 창이 떴다.

[던전 공략을 축하합니다!

던전 이름: 시스템 속성 던전(내장 타입)

던전 클리어 보상 1) 일반 퀘스트 클리어 보상 감자(유기농)

던전 클리어 보상 2) 상태 고정. 종이에 파티원 전원의 이름을 적으십시오. 파티장 사망 시, 이 시간과 장소로 돌아옵니다.]

세아가 입술을 꾹 물었다.

펜을 들지 않은 리웨이도 파티원으로 등록되어 있어 시스템 메시지를 본 듯했다. 그녀는 시스템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소리야? 사망 시 여기로 돌아온다니.”

“세이브예요.”

이럴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시스템 던전, 가장 깊은 곳에 놓인 수상한 종이와 펜. 설마 설마 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일 줄이야.

여기에 이름을 적으면, 죽어도 이 시간과 이 상태로 돌아온다. 생은 다시 시작되겠지만 회귀 시점을 한참 늦출 수 있다. 동료가 있으니 다시 시스템이 사람의 몸을 입고 수작을 부려도 대응하기 편할 테고.

“아무래도 일회성 세이브겠죠. 종이는 한 장뿐이니까.”

“세이브라고? 그럼 지금 당장 써야 하는 거 아니야? 빨리 써!”

세아의 회귀 사실을 아는 리웨이는 밝아진 얼굴로 재촉했다. 세아는 차가운 펜의 감촉을 느끼며 잠시 기다렸다.

세이브하려면 확실히 지금이 적기일지도 모른다. 카일리와 리웨이, 올리버까지 얻었다. 그들이 앞으로의 일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동료가 있으니 여러모로 편리하기는 했다.

지금의 부모님 상태도 마음에 든다. 둘 모두 A급 헌터, 유사시에 S급 헌터들 상대로 잠시나마 버텨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집 밖으로 나와 활기차게 사는 그들의 모습이 세아는 정말 좋았다.

“이세아?”

지금까지는 시스템에게 놀아나, 살았던 사람이 죽어 버리고 협회장이 바뀌고 이준의 각성 시기가 달라지는 등 수많은 변수에 시달렸다. 그러나 여기서 세이브하면, 적어도 지금까지의 일은 고정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게다가 이번 생에서는 시스템 보스 던전의 2인 출입 제한이 풀렸다. 여러 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변수가 생겨도 대응하기 쉬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번 생에서 시스템이 조종하는 인간을 찾아내 죽였다. 다시 죽어 다음 생이 시작되기까지, 시스템은 적극적으로 세계에 개입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 세이브 던전도 갑자기 발견된 것이다.

만일 이대로 다시 죽으면, 시스템이 개입해 이런 종류의 던전을 다 없애 버릴지도 모른다. 세이브할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바로 지금이…….

그때, 고개를 틀어 세아가 이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흐린 눈이 보인다. 나아지고 있다지만 아직 멀었다. 지금 이준의 상태는 최악이나 마찬가지다.

그때, 협회에 끌려가게 두지 말았어야 하는데.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후회가 가슴을 스쳐 쓰라렸다.

세아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가 불쑥 말했다.

“세이브는 안 돼요.”

“뭐?”

리웨이는 당혹한 얼굴로 되물었다. 세아는 아예 펜을 내려놓고 리웨이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부딪쳐오는 눈동자 속에,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세아는 반복했다.

“세이브 안 할 거라고요.”

리웨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바로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세아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한 반응이라 세아는 천천히 설명했다.

“지금 상태로는 세이브할 수 없어요. 정이준의 정신이 이 모양이니, 지금 세이브해도 위험하기만 할 거예요.”

“하지만 그러다 네가 죽으면?”

“그럼 아예 정이준이 세뇌에 당하지 않도록 해야죠. 처음부터.”

단호한 대답에 리웨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차분한 표정의 세아를, 그리고 세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이준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게 맞겠지.”

언쟁을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세아가 정말 괜찮으냐고 확인하듯 물었다. 리웨이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잖아. 일회성 세이브일 테고, 데이터를 덮어씌울 수 없을 테니까. 때를 신중하게 골라야지. 아마 네 히든 퀘스트 페널티 때문에 이런 던전이 생겼을 텐데……. 전에도 이런 거 본 적 있어?”

“한 번도 없어요.”

그것도 시스템의 개입 때문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이 세계는 너무 혼란스럽고 어려웠다. 이럴 때마다 세아는 하루라도 빨리 시스템을 없애고 명확한 세계로 가고 싶은 마음만 치솟았다.

리웨이가 지금은 세이브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받아들여서 다행이었다. 물론 모든 일이 다 해결된 건 아니다. 세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어려운 말을 꺼냈다.

“카일리한테는…….”

“말 안 할게.”

리웨이는 이미 짐작했다는 듯 세아의 말을 잘랐다.

“세이브일 거라고 짐작했지? 그래서 카일리가 먼저 나간 게 다행이라고 한 거고.”

“그래요.”

세아는 덤덤하게 인정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