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카일리의 불안을 모르지 않는다. 세아는 열 번 넘게 반복된 삶 중에서 딱 한 번만 스테파니를 구했다. 만일 다시 죽고 되돌아간다면 그때도 스테파니를 구하겠다고 약속한 적도 없다. 그러니 스테파니가 다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릴 것이다.
카일리는 당연히 지금 당장 세이브하고 싶겠지만 그럴 수 없다. 그렇다고 카일리에게 냉정한 표정으로 너만 생각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분간 카일리는 이 세이브의 존재를 몰라야 한다.
“그럼 돌아갈까요?”
“그래.”
“정이준, 너도 가자.”
급할 거 없다. 이준의 세뇌가 풀리면 그때 다시 돌아와 이름을 적어도 된다. 세아는 미련을 두지 않고 등을 돌렸다.
7장. 속박
13.66
세아와 이준의 부모는 갑자기 사라진 아이들을 찾느라 혼비백산하여 돌아다녔다. 카일리가 두 아이를 무사히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직접 주위를 수색하러 나섰을 것이다.
나중에 도착한 세아와 이준, 리웨이도 지친 몸을 끌고 각자 쉬기로 했다. 물론 이준은 세아의 방으로 들어왔다. 자기 땀과 몬스터의 체액에 젖은 세아는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이준이 습관처럼 뒤를 따르기에 손으로 턱, 그의 가슴을 짚었다.
“정이준, 그만.”
알아듣는 걸까. 이제는 애완견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그에게 익숙해졌다. 습격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든 걸 보면 나아지고 있는 게 분명한데, 결정적인 한 방을 찾지 못했다. 분명 무언가 방법이 있을 텐데.
세아는 고민을 털어 내듯 부러 가벼운 투로 이준에게 말했다.
“나 씻을 거야. 밖에서 잠깐만 기다려.”
다행히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듯, 이준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밖에 남았다.
세아는 샤워기 아래 서서 빠르게 머리와 몸을 씻어 냈다. 찐득찐득하게 달라붙은 진액을 문질러 닦고, 두피 속까지 손가락을 넣어 긁었다. 그래도 개운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지저분한 던전이었다. 내장형이라고 했나, 정말 짐승의 내장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정체 모를 액체가 잔뜩 묻은 몸이 찜찜했다. 세아는 몇 번이고 몸을 헹궜다.
몸을 닦고 나가려는 순간, 세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따뜻한 물에 딱 15분만 잠겨 있다가 가고 싶다. 밖이 조용한데, 이준은 좀 더 참을 수 있을까. 세아는 일단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이 가득 차오르는 동안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치유.’
뺨에 손을 대고 나직하게 말하던 이준이 떠올랐다. 자기 팔이 녹아 가는데 그는 엉뚱한 곳에 치유 스킬을 사용했다.
세아는 상처가 났던 뺨을 살짝 문질러 보았다. 상처 같은 건 생긴 적도 없는 듯 말끔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말 없는 정이준.
뒤를 따르는 정이준.
멍청한 정이준…….
그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세뇌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을까. 문득 한국 3대 길드 중 하나인 알고리즘에서 일하는 혜진이 떠올랐다. 큰 길드니 세뇌 스킬을 가진 헌터도 몇 있을 테고, 도움이 될 이야기를 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바로 전화를 해 보려는데 핸드폰을 밖에 둔 게 떠올랐다. 나가서 하자. 세아는 욕조로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거품이 나는 입욕제까지 풀자 몸의 긴장이 쫙 풀리며 땀이 나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해독처럼.
“아, 진짜 좋다.”
이런 시간이 얼마만인가. 이준이 내내 뒤를 따라다녀 그동안 느긋하게 샤워도 하지 못했다. 늘 허둥지둥 욕실에서 나와야 해서 차라리 묶어 둘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다. 이제 그가 많이 나아져 여유를 즐길 수도 있다니 기분이 좋았다.
정면에 창이 나 어스름이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노을도 이미 다 걷혔는지 하늘은 새까맣다. 호텔 객실에서 내려다보던 야경과는 또 달랐다. 따뜻한 물 덕분에 기분이 느긋해진 세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쉽게 생각하자. 어려울 거 없어.’
일단 나가자마자 혜진에게 전화를 걸어서 세뇌 스킬에 능한 헌터를 찾아 달라고 하자. 그 사람이 오스카의 스킬을 무효로 돌리진 못하겠지만 이런저런 설명은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올리버에게 정이준의 귀속 아이템에 관해 물어보자. 혹시 더 알아낸 게 있는지, 자신이 죽은 후 남은 시간 동안 이준이 대체 무얼 했는지.
이대로 기다리다가 오스카가 찾아오면…….
그때, 갑자기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욕조는 욕실 안쪽에 있고,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방수 커튼이 달려서 바로 입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세아는 혹시나 하고 목소리를 냈다.
“카일리? 리웨이? 엄마?”
방수 커튼 너머로 이준의 모습이 불투명하게 나타났다. 이럴 거라고 예상한지라 세아는 겨우 한숨을 참았다. 여유롭게 쉬나 했더니.
“정이준.”
이준은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왔다. 세아는 커튼 안쪽까지 들어오는 그를 바라보며 애매한 낯으로 웃었다.
“못 참겠어?”
“죄송해요.”
이준이 속삭이듯 답했는데 그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거품에 묻힌 채, 세아는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괜찮아. 이리 와.”
이준은 주저하는 걸음으로 다가와 세아의 젖은 손을 살짝 잡았다. 그러더니 등을 돌려 욕조에 기대앉았다. 건식이라 옷이 젖지는 않겠네, 태평하게 생각하며 세아는 그의 뒷머리를 살짝 쓸었다.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
“모르겠어요.”
“나아지고 있는 걸 거야.”
종종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으니 대단한 발전이라 해도 좋을 듯싶다. 세아는 부러 침착한 어조로 답하며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설령 나빠지는 중이라 해도 동요할 순 없다. 불안정한 정이준 앞에서 자기까지 법석을 떨 수는 없으니까.
“좀 어때. 어떤 기분이야?”
이렇게 조용히 대화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이준은 모르겠다고 했지만 확실히 긍정적인 변화였다.
“목이 말라요.”
이준은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배도 고프고요, 라고도 덧붙였다.
“그래도 누나랑 붙어 있으면 좀 나아요.”
그렇다면 아마 진짜 갈증, 진짜 허기는 아닐 것이다.
‘아마 정이준이 겪는 모든 고통은 나를 정화하기만 하면 다 끝나겠지.’
생각이 거품처럼 보글보글 일어났다. 괜한 잡념이라 세아는 손가락으로 거품을 터뜨리듯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내가 방법을 찾을게.”
덤덤하게 말하자 이준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아는 그의 머리를 다시 슥슥 쓸어 주었다.
한편으로는 의문이 일었다. 몇 번의 생에서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죽인 그가 왜 이렇게까지 견디는 걸까. 전과 다른 게 무엇이기에. 지금이라도 손을 얹고 정화, 한마디만 하면 다 끝날 텐데.
물은 여전히 따뜻했다. 세아는 의문에 푹 잠긴 머리를 털고, 등을 보인 채 앉은 이준의 어깨를 짚었다.
“이준아.”
이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오래 먹지도, 자지도 못한 사람처럼 가엽게 웅크린 채로. 그는 지금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세아는 충동적으로 뱉었다.
“고마워. 애써 줘서.”
그 말에 마침내 이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대담하게도 몸을 틀어 세아를 바라보았다. 자기 뺨을 쓰다듬는 세아의 손을 느끼며, 그 온기에 젖어 들며 그가 속삭였다.
“약해서 미안해요.”
세아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준의 떨림이 손가락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뱉는 소리에 너무 놀라서, 그런 생각 하지 말라는 뻔한 말조차 건넬 수가 없었다. 이준은 잠잠히 말을 이었다.
“내가 더 강한 헌터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죠. 내가 누나만큼 강했다면…….”
“아니야.”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국 협회와 오스카의 탓이다. 시스템을 지키고자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모든 사람의 탓이다. 자기의 부와 명예, 힘이 타인의 목숨보다 중한 모든 이들.
“내가 귀찮진 않죠?”
말문이 막혔다. 세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다가 겨우 뱉었다.
“네가 왜 귀찮아?”
“누나보다 약해서요.”
세아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귀찮아한 적은 없다. 불필요하다고 느낀 적은 있지만. 이준은 세뇌와 싸우는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세아는 숨을 토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단단한 줄로 심장을 꽉 묶어 놓은 듯 답답했고, 아릿한 통증이 전해졌다. 세아는 이준의 얼굴을 잡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싸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아니, 그냥 약한 채로 있어도 돼.”
세아에게 필요한 건 힘이 아니다. 힘은 이미 충분하다. 그녀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이준의 마음에 새기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이준아.”
이준은 괴로운 듯 세아의 손에 뺨을 비볐다. 네, 누나, 흩어지는 음성이 들린 듯도 했다.
13.67
긴 악몽이다.
이준은 언제인지 모를 시간을 오래도록 혼자 헤맸다. 거기에는 세아를 속박하는 자신이 있었고, 세아가 죽도록 내버려두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세아의 죽음을 보았고 자신의 배반을 목격했다.
언제?
왜?
아니면 이것도 그저 다 세뇌 스킬의 일부인가?
힘을 주겠다고, 다시는 너를 빼앗기지 않을 거라고, 다시는 누나를 잃지 않을 거라고 속삭이는 자신의 목소리도 다 오스카의 농간인가?
이준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혹은 빛 속에서. 손에 세아의 피가 묻은 듯한 환각. 이준은 벽을 뚫고 넘어왔던 세아의 말을 떠올렸다.
‘싸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아니, 그냥 약한 채로 있어도 돼.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이준아.’
네, 하고 착하게 대답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이미 너무 여러 번 세아를 죽인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 같다. 이번에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세아를 속박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느니 차라리 그녀의 손에 죽어야겠다.
황홀한 최후겠지.
이준은 환각 속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