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리웨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어쩔 거야?”
“아직 결정 못 했어요.”
“바로 죽이러 갈 줄 알았더니.”
“아직 확실하지도 않잖아요.”
“확인할 방법 알잖아.”
카일리의 말처럼 하면 된다. 의심 가는 사람을 멀리 떨어뜨려 놓고 아이템을 사용해 보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세아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왜 할 수 없을까. 어쩌면 히든 퀘스트 클리어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데, 왜.
한국 협회장 최두정의 목을 잘랐을 때처럼, 오스카가 찾아오면 그의 몸을 반으로 쪼개 놓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그냥 가서 확인하고 움직이면 되는 일인데.
자꾸 재촉하는 리웨이가 잠시 미워져서, 세아는 울컥 쏘아붙였다.
“그럼 내가 지금 가서 죽여 버리면 좋겠어요? 어디 톱니 사이에라도 넣고 갈아 버리면 좋겠느냐고요.”
“흥분하지 마.”
“당신이나 침착한 척하지 마요. 내가 움직일까 봐 미리 찾아왔으면서.”
정곡을 찔린 리웨이가 오래 침묵했다. 세아의 말이 옳다. 세아가 성질 급하게 움직일까 봐 이리로 왔다.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지만.
“왜 망설여? 너라면 당장 달려갈 줄 알았더니 의외네. 올리버 때는 냉정하더니.”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처음엔 모든 게 쉬웠다.
정이준만 설득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를 설득해 던전 보스를 정화하게 할 수만 있다면 회귀는 끝난다. 그의 협력을 얻기 위해 돈을 쓰고, 시간을 쓰고, 한 번은 죽도록 패 보기도 했다.
그 뒤에도 단순하게 생각하고 목적만을 위해 움직였다. 카일리가 동생 일로 힘들어하기에 이미 죽었을 거라고 해 버렸다. 카일리도, 스테파니도 이 일에 필요 없다고 여겼으니까.
협회장 최두정이 거슬린다. 한국 협회를 잠시 마비시켜야겠다, 그런 판단이 섰을 때는 망설임 없이 최두정의 목을 잘랐다.
모든 일을 그렇게 해 왔다. 스테파니와 올리버를 구한 것도 그저 필요나 타이밍 문제였다.
점점 동료가 늘고, 상황이 복잡해질수록 움직이기가 어려워진다.
“일단은 기다려 보죠. 시간이 좀 필요하니까.”
세아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괜히 피로하게 느껴지는 눈을 꾹 누르며 그녀는 내내 참았던 말을 입 밖에 뱉었다.
“당장 스테파니를 죽일 순 없잖아요.”
13.72
시간이 지나면서 이준의 상태는 점점 빠르게 나아졌다.
이제 그는 식사도 직접 챙겼고, 세아가 아닌 다른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었다. 이준의 부모가 가장 기뻐했고, 카일리와 리웨이도 희망을 품었다. 그들은 거실 소파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대로 가다가 완전히 멀쩡해지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오스카가 배 좀 아프겠네.”
두 사람과는 달리, 세아는 거기까지 기대하진 않았다. 오스카가 바보도 아니고, 엄연히 S급 헌터다. 스킬의 위력이 약해지는 건 그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세아는 카일리와 리웨이에게 미리 경고해 주었다.
“오스카가 언제 올지 몰라요. 우리도 경계하고 있어야 해요.”
“하긴, 그쪽도 애가 달았겠지.”
리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세아는 혜진의 말을 떠올렸다. 스킬 시전자와 가까이 있을수록 세뇌 스킬의 위력이 강해진다고 했다. 오스카는 반드시 올 것이다. 세뇌가 완료된 이준이 이렇게 오래, 끈질기게 버틸 줄은 몰랐을 테니 아마 이를 갈며 오겠지. 세아는 그렇게 짐작했다.
“계획이 필요해요. 일단 오스카가 오면 여기서 싸울 순 없어요. 애들도 있고, 우리 부모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을 테니까.”
“멀리 떨어지자.”
리웨이가 제안했다. 세아도 그동안 어디로 가야 할지 탐색해 두었다.
“그때 소풍 나갔던 곳은 어때요? 근처에 사람도 없고 넓고, 거의 잔디밭이라 장애물도 없으니 내가 싸우기 유리해요.”
“근데…….”
카일리가 염려 어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세아를 바라보며 주저하는 어조로 물었다.
“진짜 오스카를 죽이려고?”
“응.”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S급 헌터를 죽이는 건 너한테 너무 부담이 커. 한국 협회장을 죽인 건 그렇다 쳐도…….”
세아의 예상대로, 한국 협회는 언론에 세아의 살인 행위를 알리지도 못했다. 세아가 국내와 국외에서 받는 지지, 그간 쌓아온 이미지와 맞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괜히 세아를 자극했다가 그녀가 나서서 시스템을 없앨 방법이 있다고 폭로하면 어쩌나 두렵기도 했을 터다.
하지만 오스카 문제는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암암리에 평가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오스카 역시 S급 헌터, 목을 자르고 사실을 은폐한다고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카일리는 저번에도 이 점을 지적했다.
리웨이도 그 생각에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세아를 바라보며 조언했다.
“지금까지 S급 헌터가 서로 죽인 적은 없었어. 사람들이 시끄럽게 굴 거고, 네 입장도 난처해질 거야.”
“방법을 찾아봐야죠. 죽음의 이유는 적당히 조작해도 괜찮아요.”
“어떻게 조작할 건데?”
솔직히 방법이 없다. 세아는 침묵을 지키며 자기 생각 속으로 가라앉았다.
사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도 있다. 또 히든 퀘스트 클리어에 실패하고 회귀하느니 오스카를 죽이고 범죄자 신세가 되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든다. 물론 가능하다면 위험은 피하는 게 좋지만…….
“그때 가서 생각해 보죠.”
“뭐? 그렇게 대책 없이 해도 돼? 히든 퀘스트 깨기만 하면 뒷일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솔직히 말하면, 네, 상관없어요. 한 열두 번쯤 다시 살아 봐요, 그런 거 신경 쓰이나.”
그때, 옆에 없는 듯 앉아 있던 이준이 살짝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의 존재도 잊고 있던 모두가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요즘 상태가 좋은 이준은 세아를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오스카가 와도 내가 버텨 볼게요. 시간을 끌면 스킬을 깰 수 있을 거예요.”
“그럴 필요 없어. 그냥 죽이고 수습해도 돼.”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가도, 나는 누나랑 살고 싶어서 그래요.”
눈이 마주친다. 정이준의 눈은 맑고 깊어서 이렇게 마주치면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그가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입에 담을 때마다 세아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분위기가 기묘하게 변했다. 이준은 세아의 손을 꽉 쥐며 무어라 더 말하려 했다.
그때, 리웨이가 큰 소리로 웃더니 세아의 어깨를 아플 정도로 퍽 쳤다.
“나도 똑같아! 나도 너랑 계속 보고 싶다고. 물론 네가 산으로 와야겠지만.”
“나, 나도. 우리 시스템 사라져도 자주 보면서 지내자.”
카일리가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그 덕에 세아는 이준의 손을 놓을 수 있었다.
당혹스럽고 심장까지 빨리 뛰었다. 이준은 가끔 무방비하고 무구한 얼굴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 어떨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세아는 헛기침과 함께 말을 돌렸다.
“일단 어른들이랑 애들한테도 알려 주자. 오스카가 오면 우리가 어떻게 할지 미리 의논해야 하니까.”
세아의 부모는 A급 각성자라 그나마 다행이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이준의 부모는 둘 다 미각성자, 올리버는 전투 스킬이 거의 없는 미성년 헌터, 그리고 스테파니는…….
세아는 흘끗 카일리의 얼굴을 살폈다. 오스카가 오기 전에 스테파니 일을 마무리 지으면 좋을 텐데.
13.73
밤이 찾아왔다. 달은 놀라울 정도로 밝았다. 달빛 때문에 나무와 건물이 그림자를 거느릴 정도였다.
세아는 서울과는 정말 다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느리게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미안하지만 이준은 묶어 두었다. 혼자 가야 하는 일이었다.
이곳 마당은 전원주택답게 꾸며져 있다. 걷기 편하게 깔아 놓은 돌길을 제외하면 모두 잔디와 나무. 가을이면 낙엽이 잔뜩 쌓이겠지만, 지금은 이파리가 맹렬히 초록으로 물드는 계절이다. 녹음은 달빛 아래서도 선명했다.
밖에 내놓은 테이블 옆에도 커다란 나무가 있다. 낮에 차를 마셔도 그늘 덕분에 시원하다. 세아와 이준의 부모는 이 공간을 자주 이용했지만 지금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있다.
“스테파니.”
세아는 나직한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의자에 멍하게 앉아 있던 스테파니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세아를 바라본 스테파니는 의례적인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세아는 대답 없이 스테파니 맞은편에 앉았다.
둘은 잠시 침묵했다. 사실 그리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다. 스테파니는 카일리 옆에 답싹 붙어 지냈고, 밤에만 이렇게 떨어져 있는 듯했다. 그러니 얘기할 기회도 지금뿐이다.
세아는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잠이 안 와?”
“응.”
“여기 온 후로 계속 못 자는 것 같던데.”
“새벽에 한두 시간은 자.”
그 대답에, 세아의 마음으로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고도 이상한 점을 못 느끼나?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는데.’
스테파니는 테이블에 한 손을 올려놓은 채 먼 곳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세아는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느리게 말했다.
“그래도 대단하네. 몬스터는 스킬로 재우지 않는 이상 잠을 안 잔다고 알고 있는데.”
“…….”
스테파니는 세아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세아의 입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하는 게 적절할지 오래 고민했다. 결론은 도저히 모르겠다는 것. 세아는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손톱은 자라? 머리카락은?”
“무슨 소리야?”
스테파니가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세아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스테파니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손발톱이나 머리카락도 자라지 않을 거야. 키 안 자라는 건 당연하고. 아마 수십 년이 지나도 지금 몸 그대로겠지.”
“무슨 소리냐니까?”
“넌 스마일맨이야.”
세아는 툭 내뱉었다. 마치 선언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