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스테파니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핏기가 싹 가시는 얼굴을 바라보며 세아는 잠시 기다려주었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자기가 스마일맨이라는 사실조차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스테파니는 흔들리는 눈으로 세아를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 하는지는 아는 거야? 내가 스마일맨이라고?”
“그래. 약초 던전에서 나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무슨 말도 안 되는…….”
“정말 몰라? 잊었어?”
일단 스테파니를 이해시키는 게 먼저다. 그래야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세아는 일어난 스테파니를 올려다보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배도 안 고프고 졸리지도 않겠지. 감정과 기억만 스테파니의 것일 뿐, 네 육체는 몬스터니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냥, 나는, 후유증 때문에…….”
스테파니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세아는 그녀의 말을 뚝 끊었다.
“스킬을 못 쓰는 것도 마찬가지야. 넌 스마일맨이니 스킬을 쓸 수 없는 것도 당연하지.”
“아니야! 미쳤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흥분한 스테파니가 버럭 소리쳤다. 세아는 일어나지도, 마주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스마일맨은 표적의 신체뿐만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도 복제한다. 그래야 남들을 잘 속일 수 있으니까. 일행 중 하나가 스마일맨으로 바뀌어도 알아차리기 힘든 건 그런 능력 때문이다.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 지금 카일리 깨워 보지 그래. 깨워서 말해 봐.”
스테파니가 입술을 꾹 깨물고 손을 말아 쥐었다. 가녀린 몸을 덜덜 떨면서도 세아의 말대로 언니에게 달려가지는 못했다. 세아는 스테파니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저 분오와 혼란, 공포가 차례로 스쳐가는 얼굴을 바라볼 뿐.
동정심은 일지 않는다. 동정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은 스마일맨이 아니라 죽은 스테파니, 그리고 카일리다.
“내가 널 죽이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야. 카일리를 위해서.”
“난, 아니라니까……. 이상한, 말도 안 되는 걸로, 무슨 소리를…….”
스테파니의 목소리가 우는 듯 떨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 한 방울 없었지만 당장 졸도할 것처럼 보이긴 했다. 세아는 스테파니의 말을 뚝 잘라 버렸다.
“넌 스테파니에 완전히 적응했고, 원한다면 이대로 살아갈 수 있어. 적당한 핑계를 대고 조용히 카일리 곁을 떠나.”
어차피 시스템을 죽이면 자연히 소멸할 것이다. 그러니 일단 치워 버리기만 하면 뒷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덤덤하게 선고했다.
“안 그러면 넌 나한테 죽어.”
13.74
다음 날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난 세아는 누운 채로 힘껏 기지개를 켰다. 푹 잔 덕인지 머리가 맑고 몸도 개운했다. 옆에 있는 이준을 확인한 세아가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네.”
“…….”
아침부터 제정신인 경우는 드문데. 세아는 그를 흘끗 살피고 실내복 위에 얇은 겉옷을 걸쳤다. 그런 다음 밖으로 나가며 자기 뒤를 따라오는 이준을 돌아보았다.
“요즘은 좀 자? 통 못 자는 것 같더니.”
“그럭저럭이에요.”
답하며 이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니, 아침부터 세아의 마음에 희망이 가득 차올랐다. 어쩌면 이대로 시스템 보스 던전에 가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낙관이 마음을 지배했다.
거실로 나가니 카일리와 리웨이, 올리버가 보였다. 부지런한 부모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서 햇빛을 즐기는 듯했다. 세아는 빈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스테파니는?”
“문 두드렸는데 대답이 없더라고. 자나 봐.”
카일리가 평이한 투로 대답했다. 세아는 그녀 모르게 리웨이와 시선을 교환했다. 몬스터가 자느라 이 시간까지 못 일어난다니, 그럴 리 없다. 세아는 일단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준도 옆에서 조금씩이나마 자기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세아는 그를 유심히 살피고, 카일리의 표정을 의식하고, 리웨이와 눈빛을 교환하느라 바빴다. 리웨이는 전날 세아가 스테파니와 대화를 나눈 사실을 몰랐지만, 느낌으로 무언가 이상한 걸 알아차린 듯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헛기침을 한 리웨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스테파니도 밥 먹어야 하지 않나? 내가 가져다줄까?”
“피곤해서 오래 잘 수도 있죠. 이따 점심 지나고도 안 내려오면 부르는 게 낫지 않아요?”
세아가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정작 카일리는 애가 자나 보다, 하고 큰 관심이 없는데 다른 둘의 눈만 분주했다.
식탁을 치우자마자 리웨이가 세아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거실과 부엌을 잇는 복도로 세아를 데려간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그냥 경고했어요. 떠나라고.”
“뭐? 카일리한테 상의도 안 하고?”
“뭐라고 상의할 건데요? 사실 스마일맨이 네 동생인 척하고 있어, 몇 년을 혼자 스테파니로 지내서 자기도 정체성에 혼란이 온 것 같아, 어떻게 할래, 네가 죽일래?”
리웨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카일리가 고개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
“둘이 무슨 얘기해?”
“별거 아니야.”
세아는 부러 소리를 높여 대답하고 리웨이의 손을 떨쳐 버렸다. 리웨이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세아에게 무어라 말하진 못했다. 리웨이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다. 세아는 고개만 끄덕여 보인 후 자리를 벗어났다.
그게 최선이었다. 카일리를 위해서도, 파티를 위해서도.
한편 카일리는 점심때가 될 때까지 스테파니를 깨우러 가지 않았다. 던전에서 나온 후부터 제대로 잠을 못 자는 것 같아, 늦잠을 잘 때 내버려 두자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점심은 먹여야지 싶어 정오 무렵 스테파니의 방으로 올라갔다. 똑똑, 두 번 노크하고 잠시 기다린다.
“스테파니?”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카일리는 몇 번 더 노크해 본 후, 너무 곤히 자면 그냥 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살며시 문을 밀었다. 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고, 햇빛 잘 드는 방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빈 침대. 닫힌 창문.
카일리는 멍하게 방을 바라보다가 정원으로 달려 나갔다. 거기도 스테파니는 없었다. 패닉에 빠진 카일리가 세아의 방으로 달려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외치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스테파니가 없어졌어!”
13.75
던전 앞에 선 스테파니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사실 아직도 던전에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지난번에 여기 들어갔을 때, 카일리가 때를 맞추어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올리버마저 곁에 없었다. 스테파니는 바짝 긴장한 채 입구를 바라보았다.
‘넌 스마일맨이야.’
달빛 아래 세아가 무심히 던진 말이 등을 떠밀었다.
스테파니는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안은 깨끗했고, 지난번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했다. 세아와 리웨이는 최종 보상을 취하지 않았을 뿐, 이 던전을 완전히 공략해서 몬스터의 수도 줄었다. 그래도 스테파니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지난번에 스마일맨과 마주쳤을 때, 카일리가 어둠 속성 무기로 해치웠다. 그러나 완전히 죽인 건 아닐 것이다. 인터넷에 나온 정보에 따르면 스마일맨은 시스템 속성 스킬로만 죽일 수 있고, 그 속성 스킬을 가진 건 정이준 헌터뿐이다. 스마일맨은 죽지 않았다.
스테파니는 짐승의 내장처럼 생긴 던전 안을 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스마일맨?”
이렇게 부른다고 나타날까. 만난다 해도, 궁금한 걸 물어보면 대답해 줄까. 지난번에 만났던 스마일맨의 물음도 생생히 떠올랐다.
‘너 대체 뭐 하는 거야?’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왜 그렇게 물었을까. 스테파니는 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세아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스마일맨!”
“안녕.”
스테파니는 바닥에서 반쯤 튀어 오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스마일맨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누구의 모습도 훔치지 않았다. 얼굴은 시꺼먼 구멍이나 마찬가지였고, 표정 따윈 전혀 없었다. 스테파니는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무서웠지만 일단 침착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또 왔네.”
놀라움에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뭘 묻고자 했는지, 여기 왜 왔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스테파니는 두려움에 굴하지 않으려고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너 손톱도 안 자라지, 여상하게 묻던 세아가 다시 떠올랐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목소리가 형편없이 뭉개져서 나왔다. 거의 끽끽거리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스마일맨은 잘 알아들은 듯했다.
“누구냐니? 넌 너잖아.”
답하는 목소리가 기괴하다. 뻥 뚫린 구멍이나 다름없는 얼굴에서 나오는 음성. 스테파니는 그 소리가 끔찍하게 싫었다. 우물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듯 오싹한 소리였다.
스테파니는 마음을 다잡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스마일맨이야? 그래서 그때 나한테 물어본 거야? 뭐 하는 거냐고?”
스마일맨이 얼굴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눈도 없는데, 스테파니를 유심히 살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테파니는 소름이 끼쳐서 그대로 물러날 뻔했다.
다행히 공포에 잡아먹히기 전, 스마일맨이 목소리를 냈다.
“진짜 뭐 하는 거야?”
“뭐? 내 말에 대답…….”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스테파니는 심호흡을 했다. 선문답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부러 사나운 표정을 쥐어짜냈다.
“집어치우고 묻는 말에 대답해! 내가 스마일맨이냐고 묻잖아!”
“넌 스테파니잖아.”
그 한마디, 선언과도 같은 한마디에 우습게도 환희가 차올랐다. 뜨겁고 환한 것이 배 속에서 머리로 용솟음쳤다. 스테파니는 주먹을 불끈 쥐며 쾌재를 불렀다. 그래, 내가 뭐랬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다니!
그대로 달아나려는 순간, 스마일맨이 덧붙였다.
“그러니 어서 나가서 다 잡아먹어!”
스테파니의 몸이 딱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