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13.79
늦은 오후, 세아의 방에서 비밀 회의가 열렸다. 리웨이가 심각한 얼굴로 찾아와 스테파니에 대해 얘기 좀 하자고 했다. 둘은 옆에 있는 이준의 존재마저 잊고 열심히 머리를 맞댔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해진 세아가 불쑥 물었다.
“리웨이, 저번엔 카일리하고 상의하자고 했잖아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요?”
“네가 말도 안 된다며. 카일리한테 어떻게 이걸 말하냐고.”
“뭔가 충격 덜 받게 말할 방법은 없을까요?”
“나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리웨이가 자신 없는 투로 말을 흐렸다. 그러더니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문명에 푹 젖은 리웨이의 머리에서는 라벤더 향기가 났다.
“스테파니랑 같이 지내는 거 보면 볼수록 말을 못 꺼내겠어. 저렇게 꿈만 같아하는데 뭐라고 얘기해?”
실제로 요즘 카일리는 구름 위를 걷는 듯한 표정으로 지내는 중이었다. 스테파니가 옆에 딱 붙어 카일리, 카일리 하며 기대고 수다를 떨고 살갑게 굴자, 과거로 돌아간 듯 행복해진 것이다. 마치 동생과 헤어진 적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잠시 생각에 잠겼던 리웨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냥 이대로 두는 건…….”
세아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리웨이가 얼른 말을 바꿨다.
“말도 안 되지?”
“언제 돌변해서 카일리나 우리를 잡아먹을지 모르잖아요. 너무 위험해요.”
“일단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데, 저렇게 카일리 옆에 붙어 있어서야 방법이 없잖아.”
“찾아내야죠.”
리웨이는 세아가 골치 아픈 얼굴로 얼굴을 감싸는 걸 보았다. 그러더니 부드러운 투로 그녀를 위로했다.
“머리 복잡하지? 정이준 문제만으로도 힘든데 스테파니까지.”
“감수해야 할 일이죠, 뭐.”
그냥 스테파니를 구하지 말걸, 그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세아는 무용한 후회를 멈추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옆에서 이준이 덥석 세아의 팔을 잡았다.
“누나.”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세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준의 얼굴은 무섭도록 창백했다. 입술까지 보랏빛으로 질렸다. 방금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러니 세아도 당황해서 굳어 버렸다.
“왜, 왜 그래? 어디 아파?”
“오고 있어요.”
팔을 쥐는 이준의 힘이 점점 더 강해졌다. 마치 세아를 이 자리에 붙잡아 두려는 듯.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반복했다.
“오스카가 오고 있어요. 느낄 수 있어요……. 누나.”
이준의 눈에서 빛이 사라진다. 깜빡, 깜빡, 점멸하는 빛을 보며 세아와 리웨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도망가야 해요. 누나를 속박한 다음 정화하게 할 거예요.”
이준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세아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자르고, 자르고 가요.”
“뭐?”
되물은 건 세아가 아니라 리웨이였다. 세아는 단단히 굳은 얼굴로 자기에게 매달린 이준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준은 더 간절하게, 혹은 더 강압적으로 세아의 팔을 움켜쥐며 속삭였다.
“내 팔이나 다리 자르고 가요. 속박당하면 끝장이잖아요. 내가 누나를 못 쫓아가게, 지금 여기서…….”
다 자르고 가요.
섬뜩하고 서늘하다. 리웨이는 몸에 얼음이 쏟아진 듯 부르르 떨었다. 자기도 모르게, 팔다리가 모두 잘려 나간 이준의 모습을 상상하고 말았다. 가장 두려운 건, 아주 순간이나마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자신의 마음.
리웨이는 두려움에 차서 세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세아는 가끔 비인간적일 정도로 목적에 집착한다. 그녀라면 이준의 말대로 할 것이다. 이준의 팔다리를 모두 자르고 몸뚱이만 남겨 정화를 피할 것이다.
“하지 마, 이세아!”
리웨이가 덥석 세아의 반대쪽 팔을 잡으며 외쳤다.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이준만 바라보던 세아가 비로소 리웨이를 향해 눈을 돌렸다. 곧 그녀가 리웨이의 손을 떨쳐 버렸다.
안 돼, 이 미친놈이, 리웨이가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동시에 세아도 입을 열었다.
“안 해요. 내가 미쳤어요?”
“…….”
“얘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막 내뱉는 거예요. 당신까지 왜 이래요?”
세아는 멍한 얼굴의 리웨이와, 무언가 더 말하려 하는 이준을 번갈아 본 뒤 선언했다.
“지금 여기서 오스카랑 싸울 순 없어요. 빨리 이동합시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이준이 함께 움직였다. 그가 쥔 팔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아는 느낄 수 있었다, 피가 끓고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닥쳐올 전투에 대한 흥분으로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드디어 오스카가 왔다.
오늘이야말로 그 목을 잘라 버릴 것이다.
13.80
고속 이동 스킬을 사용하여 질주하는 동안, 서늘한 밤공기가 뺨을 스쳤다. 이 정도 속도로 달리면 다리가 바람이 된 듯한 착각이 인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옆에 있는 사람은 카일리와 리웨이, 그리고 뒤에서 맹렬히 따라오는 건 정이준. 오스카가 가까이 올수록 그는 이성을 빼앗긴다. 지금의 그는 세아를 정화하고자 하는 적일 뿐이었다.
“저쪽으로 가자!”
세아가 크게 외치며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언젠가 그들이 이준의 회복을 위해 나들이를 나왔던 벌판이었다. 장애물이 없어 숨지 못하고 곧장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전투 시 불리하겠지만 그건 적도 마찬가지다.
달이 환하고 별빛이 따갑게 쏟아진다. 세아는 빛에 몸을 적시며 주저하지 않고 나아갔다. 드디어 지루한 기다림이 끝나고 전투의 순간이다. 가벼운 긴장과 흥분에 심장이 경쾌하게 뛰었다.
오스카는 당연히 혼자 오지 않았을 것이다. 헌터를 몇 명이나 데려왔을까, 얼굴 아는 다른 S급 헌터도 있을까, 그럼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움직일수록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된다. 선명하게 남는 건 하나뿐, 자신의 오랜 목적.
원하는 곳에 도착한 후, 세아가 말했다.
“정이준부터 묶어야겠다. 리웨이, 부탁해요.”
리웨이는 거대한 황소 모양의 소환수를 불러냈다. 허공에서 휙 떨어진 소환수가 온몸으로 이준의 몸을 짓눌렀다. 세아는 버둥거리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와이어를 꺼내 손과 발부터 제대로 묶었다.
“조금만 참아. 오스카만 죽이면 일이 해결될 테니까.”
듣지 못할 걸 알면서도 달래는 말을 건넨다. 이준이 입을 열어 세아를 속박하기만 하면 다 끝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준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벌어지려는 자기 입술을 있는 힘껏 짓이겼을 뿐.
기특하다.
세아는 엄지로 피가 흐르는 그의 입술을 한번 쓸어 준 후 훌쩍 몸을 일으켰다. 리웨이의 잘생긴 황소 소환수도 사라지고, 이제 남은 건 오스카를 기다리는 일.
떨어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스테파니를 억지로 떼어 놓고 온 카일리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오스카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도 있잖아.”
“정이준이 계속 저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이 올 거야. 스킬을 다시 시도할 수도 있지. 지켜보고 있다면 애가 탈 테니까.”
세아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오스카는 바짝 약이 올랐을 것이다. 분명 세뇌에 성공했는데, 이준은 이 지경이 되어서도 세아를 속박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가까이 다가와 다시 스킬을 사용하려 들 게 분명했다.
세 사람은 이준 앞을 막아서듯 나란히 선 채 오스카를 기다렸다.
밤공기에 풀냄새가 진하게 묻어 있다. 세아는 싸울 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머리를 하나로 단단히 묶었다. 던전에서도 그럴듯한 몬스터는 만나지 못해서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다. 얼마만의 진짜 싸움인가.
마침내, 오스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세아.”
그는 원수를 본 듯 세아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세아는 일단 재빠르게 그의 주위를 훑었다. 예상과 달리 다른 헌터는 데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그가 혼자 이 위험한 곳에 오진 않았을 터.
“그새 동료가 늘었군.”
리웨이를 확인한 오스카가 빈정거렸다. 세아는 굳이 대꾸하고 싶지 않아서 침묵했다. 그가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자마자 바로 달려들어 목을 잘라 버릴 참이었다.
오스카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아의 사정거리에 들 걸 두려워하는지, 멀찍하게 떨어진 채 목소리만 증폭시켜 말하고 있었다. 세아가 자기 쪽에서 먼저 달려들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내가 정이준을 얕봤다는 걸 인정하지. 이렇게 오래 버틸 줄은 몰랐어. 지루하게 시간을 끌더군.”
“닥치고 그냥 오기나 해.”
“협회와 나, 그리고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S급 헌터들이 네게 제안한다.”
오스카는 차가운 투로 말을 시작했다. 세아는 곁에 선 카일리와 리웨이가 긴장하여 오스카의 말에 집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스카는 한 마디 한 마디 정확하게 뱉었다.
“첫째, 네가 시스템 살해 시도를 중지한다면 네게…….”
“아, 됐어.”
세아는 그의 말을 툭 끊어 버렸다. 옆에 있던 카일리와 리웨이마저 당황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오스카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뭘 제안할 줄 알고?”
“돈이든 명예든, 아니, 지구상의 나라 절반을 나한테 준다고 해도 필요 없다고.”
어차피 또 회귀하게 될 텐데 그런 게 뭐가 귀하겠는가. 조건을 거는 걸 보니, 협회나 헌터들은 아직 세아의 히든 퀘스트 실패 페널티를 모르는 듯했다. 남이 알아내기 쉽지 않은 것이니 당연하다. 세아는 느긋하게 웃었다.
“너도 S급 헌터다, 오스카. 그렇게 겁먹고 멀리서 이야기하지 말고 가까이 와서 말해. 네 목을 자르기 전에 혀부터 저며 줄 테니까.”
“말이 안 통하는군. 네가 당연히 날 이길 거라고 생각하겠지?”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놀랍네.”
세아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이 지상에서 그녀를 이긴 존재는 아직 한 명도 없다. 아니, 굳이 꼽자면 시스템이 그녀를 이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적도 곧 회복할 것이다. 오스카부터 죽이고, 시스템을 죽이러 갈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