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그때. 퍽, 카일리가 리웨이의 몸을 밀쳤다. 옆으로 밀려난 리웨이가 균형을 잡기도 전에 카일리가 스테파니의 양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녀의 몸을 앞뒤로 흔들며 절규했다.
“내 동생 어디 있어? 내 동생 어디 있냐고, 어디 있어, 내 동생! 내 동생!”
스테파니의 얼굴이 시체보다 더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카일리를 뿌리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떨면서 토막토막 단어를 뱉었다.
“카일리, 나, 나는…….”
그 순간, 스테파니가 웩 구역질을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커다란 풍선을 삼킨 것처럼 등허리까지 둥글게 부풀었고, 안에서 수백 개의 공이 튀는 듯 피부가 울룩불룩하게 꿈틀거렸다. 스테파니는 그대로 카일리를 밀치며 우욱 안에 든 걸 토했다.
번뜩이는 칼날이 길게 늘어나더니 그대로 스테파니의 배를 찔렀다. 푹, 몬스터의 몸일진대 가죽이 뚫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칼은 힘겹게, 마치 사냥한 짐승의 뱃가죽을 자르듯 앞뒤로 왔다갔다 움직였다. 스테파니의 배에서 무언가 우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푸확, 스테파니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 피가 그대로 카일리의 얼굴에 쏟아졌다. 스테파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을 쥐더니 억지로 자기 입 속에 밀어 넣었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데도, 잘 갈린 날을 입으로 으적으적 밀어 넣는 건 끔찍한 광경이었다.
“뭐 하는 거야…….”
떨어져 선 카일리의 뺨이 경련을 일으켰다. 겨우 소리를 뱉는 입술까지 쉴 틈 없이 달달 떨렸다. 리웨이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가서 어깨를 감싸 주었다. 그러나 카일리는 그 온기를 인지하지도 못하는 듯했다.
힘겹게 칼을 삼킨 스테파니는 입가를 문지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피 아니야.”
스테파니의 몸이 우르르 무너졌다. 종이처럼 잘린 배에 손을 얹은 채, 그녀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곧 죽겠군. 리웨이는 바로 깨달았다. 너무 많은 몬스터를 삼킨 데다, 덜 소화된 몬스터에게 공격당하기까지 했다. 이 스마일맨의 숨은 곧 끊어질 것이다.
그러나 카일리는 그런 걸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로 달려들어 스테파니 위에 올라탔다. 카일리의 눈에서 눈물이 미친 것처럼 쏟아져, 스테파니의 흙투성이 뺨 위로 뚝뚝 떨어졌다.
“내 동생 어디 있어. 언제 바꿨어. 스테파니 설마 그 이상한 던전에 있는 거야? 말해, 말하라고, 당장 말해!”
“카일리.”
스테파니가 누운 채로 카일리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처음부터 나였어.”
약초 던전에서 처음 나왔을 때부터.
약초 던전 지하를 헤매다 스테파니를 발견했다. 먹잇감이었고, 몸을 취했고, 그대로 삼켜 버렸다. 그러나 다음 먹잇감을 찾지 못해 혼자 3년을 거기 머물렀다.
스테파니의 기억, 스테파니의 감정, 오직 혼자인 공간.
언제부터였을까, 흘러 들어왔던 기억과 감정이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고 말았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둠 속에서 카일리를 원망하는 동시에 그리워했고,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렸고, 결국 본래의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카일리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래도 내 마음은 진짜라고. 스테파니의 것이라고, 그러니까 다 가짜는 아니라고. 정말 그리웠고, 사랑했고, 구하고 싶었다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러나 카일리의 눈을 본 순간, 절망이 하늘에 뜬 별만큼이나 선명하게 박힌 얼굴과 마주한 순간. 그런 말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스테파니 자체였으며 동시에 스테파니의 살해자였다.
그래서 스마일맨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내가 스테파니를 죽였어.”
전부 거짓이었다 해도 잠시나마 카일리의 동생으로 지낼 수 있었다. 모두 기만이었는데도 거기서 행복을 느꼈다. 얼마나 뻔뻔하고 어처구니없는 감정인지 알면서도 잠시의 황홀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카일리, 정말 미안해.”
눈물이 흘러내린다. 몬스터도 울 수 있었나. 이 미안함은 스테파니의 것인가, 스마일맨의 것인가. 스마일맨은 자기의 생명이 끊어져 가는 걸 느끼며 카일리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내가 그저 남의 것을 빼앗은 가짜라면 왜 이렇게 속이 끊어지는 듯 아픈 것인가. 이것이 내 강탈의 대가인가. 스테파니가 되어, 정말로 목숨과 언니를 잃는 것. 이 고통이 대가란 말인가.
“동생인 척해서 미안해.”
이 생각은 인간의 것일까, 몬스터의 것일까…….
“안녕, 카일리…….”
카일리는 멍하게, 빛이 꺼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 눈물도 나지 않는다.
스테파니의, 스마일맨의 시신에 올라탄 채로 카일리는 한기를 느꼈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추워서 온몸이 벌벌 떨렸다. 가슴 안에서부터 번진 냉기가 몸을 얼려 버릴 것 같았다. 아주 독한 감기에 걸린 느낌이라 카일리는 천천히 숨을 토했다.
“스테파니?”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걸 알면서도, 이게 스테파니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부르고 있는가.
“스테파니.”
눈을 뜨고 죽은 몬스터. 아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동생. 아니, 몬스터, 동생, 동생이었던, 동생의 마음을 가진, 아니…….
나,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지?
카일리의 눈이 뒤집혔다. 세상이 암흑으로 굴러 떨어졌다.
13.82
세아는 꾹 오스카의 목을 짓눌렀다. 그러나 그녀의 혼란과 두려움을, 오스카는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죽일 작정이었다면 이세아는 시간을 끌지 않는다. 곧장 목부터 잘라 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머뭇거리며 목을 조를 이유가 없다.
“너, 뭐라고 했어.”
세아는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물었다.
“정이준이 평생 저렇게 살 거라고?”
오스카는 대답하기 전에 제 목을 조르는 세아의 손을 뿌리쳤다. 대답을 듣고자 했는지 세아도 순순히 놓아 주었다. 오스카는 뻐근하게 아파오는 목을 문지르며 코로 줄줄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세뇌 스킬이 그렇게 만만할 것 같았어? 시전자가 죽는다고 그냥 풀려 버리면, 그게 무슨 세뇌야.”
“이 새끼가…….”
세아는 분을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오스카만 죽이면 만사가 해결될 거라고 확신한 건 아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했다. 정신계 스킬은 복잡하고 변수가 많아 여전히 연구 대상이기에,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이준이 평생 저런 상태로 살게 될 거라니.
“나만 정이준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어.”
오스카가 피투성이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시스템을 죽이려면 정이준의 정화 스킬이 필요할 테니, 너는 정이준을 죽일 수도 없고 정이준에게 죽을 수도 없어. 그렇다면 그냥 포기하고 저 어린 남자애랑 연애나 하며 살아.”
세아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오스카만 내려다보았다. 정이준의 정신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좋아.”
세아는 오스카에게서 떨어지며 선선히 응낙했다. 그녀는 아예 다리를 펴고 바닥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코뼈가 부러져 피가 줄줄 흐르는 오스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웃었다.
“씨발, 네가 이겼어. 좋냐?”
“널 어떻게 믿지? 날 안심시켜 놓고, 정이준을 원래대로 돌린 후 다시 시스템을 없애러 달려갈지도 모르지.”
“날 뭘로 보고.”
세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그녀는 오스카를 향해 손을 뻗으며 잡고 일어나라며 고갯짓을 했다. 오스카는 의심 어린 얼굴로도 그녀의 손을 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시스템 살해 같은 게 정이준의 목숨보다 중요할까? 난 그런 사람은 아니야.”
그때, 몬스터의 비명이 울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몬스터 전부가 어느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세아는 우뚝 선 스마일맨의 뒷모습을 보았고, 카일리와 리웨이까지 확인한 후 씩 웃었다.
“네가 자랑스럽게 끌고 온 몬스터도 다 당한 모양인데. 제대로 협상하자. 정이준을 제대로 돌려 놔. 그럼 나도 모든 걸 깔끔하게 포기하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겠어.”
“좋아.”
오스카는 땅바닥에서 일어나며 이준을 가까이 불렀다.
세아는 천천히 다가오는 이준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지금까지 어디로 피해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분명 오스카가 안전한 곳으로 움직이게 했을 테다. 세아는 신중하게 기회를 노렸다.
이준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가 제정신을 찾기만 하면.
“오랜만이네, 정이준.”
오스카는 짐짓 다정한 투로 이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더니 상태를 살피려는 듯 손을 이준의 이마에 갖다 댔다.
이준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잠깐씩 이성을 찾던 시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영국에서 다시 만났을 때처럼 텅 빈 눈, 기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이는 팔다리, 오스카를 응시하는 감정 없는 눈동자.
지금까지 애쓴 게 다 허사가 되었음을, 세아는 느낄 수 있었다.
“빨리 되돌려 놔.”
세아는 가만히 재촉했다. 그 순간, 오스카가 휙 뒤를 돌아보며 세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세아는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지는 걸 보았다.
“이세아, 목적보다 정이준이 소중하다고?”
세아는 대답하는 대신 몸을 긴장시켰다. 그래, 협상이 잘될 거라고 여기진 않았다. 오스카는 태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랬다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나부터 죽이려고 했을 리가 없지.”
“무슨 개소리야.”
오스카는 세아의 대답을 무시한 채 이준의 몸을 가까이 당겼다. 시선은 여전히 세아에게 고정한 채, 그가 이준의 귀에 속삭였다.
“가서 속박해.”
이준이 눈을 한차례 깜빡이더니 고개를 돌려 목표에게 눈길을 꽂았다. 오스카의 얼굴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갔다.
“정화는 그 다음이다.”
세아가 재빠르게 거리를 벌림과 동시에 오스카도 옆으로 비켜섰다. 이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세아에게 돌진했다. 엄청난 속도로 따라오는지라, 방심하고 있던 세아는 하마터면 그대로 따라잡힐 뻔했다.
세아는 흙바닥을 박차고 있는 힘껏 달렸다. 바람이 귀와 뺨을 마구 스치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