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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의 히든 퀘스트-70화 (70/112)

70화.

생각하자, 생각해. 이제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해야 해. 오스카를 죽이겠다는 계획은 보류, 이준을 죽일 수도 없고 그의 말처럼 팔다리를 잘라 몸뚱이만 남길 수도 없다.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분명 다른 방법이…….

쾅! 뒤에서 터진 폭음에 고개를 틀었다. 이준이 무언가 공격 스킬을 사용했는지 땅이 움푹 꺼져 있었다. 어느 정도 가까워져야 속박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지, 이준은 필사적으로 세아와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

‘미치겠네.’

멀리서 팔짱 끼고 지켜보는 오스카, 도움을 청할 수 없는 파티원들, 완전히 지배당해 버린 정이준.

세아는 일단 달아나면서 목소리를 높여 외쳐 보았다.

“정이준! 정신 차려! 내 목소리 들려?”

예상했지만 이런 말로는 오스카의 세뇌를 깰 수 없었다. 오스카는 재미있는 코미디 프로그램이라도 본 듯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실컷 비웃어 둬라. 세아는 이를 갈며 계속 뛰었다.

이대로는 영원히 달리기 시합만 해야 할 것이다. 이 기나긴 술래잡기, 어쩐지 이준과는 항상 술래잡기만 하는 것 같다.

세뇌를 깰 방법은 없다. 이준을 죽일 수도 없다. 오스카를 죽여 도박을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

‘싸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아니, 그냥 약한 채로 있어도 돼.’

세아는 달리기를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이준을 향해 돌아선다. 그리고 그대로 마주 달려갔다.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이준아.’

그렇게 말했으니까 이제 약속을 지킬 차례다.

둘은 전속력으로 달려 맞부딪쳤다. 성인 남자와 정면으로 충돌하니 세아의 어깨와 가슴, 배, 허벅지까지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그러나 세아는 방어 스킬조차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부딪쳐 함께 나뒹굴었다.

통증에 머리까지 징 울리고 순간 몸이 터져버릴 듯했지만, 세아는 필사적으로 이준 위에 올라탔다. 그대로 그의 손을 잡아채 턱 자기 가슴팍에 얹었다. 그런 다음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해 봐, 정이준.”

이 상황에서 방법은 하나뿐.

“날 믿고 해.”

도박이다. 이준이 속박 스킬을 사용하든, 정화 스킬을 사용하든, 무조건 죽는다. 회귀하지도 않는다. 그저 여기서 끝이다.

어쩌면 그것도 좋을지도 몰라, 세아는 생각했다.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살았다. 이 난리를 치는 것도 결국 회귀를 끝내고 싶어서가 아닌가. 그렇다면 여기서 정이준의 손에 죽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최악의 결말은 아닌 것이다.

‘던전을 완전히 공략하고, 시스템이 사라져도…… 나 버리지 마요.’

이준이 했던 말은 마음에 걸리지만, 어차피 자신이 죽어도 그는 나름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

세아는 이준을 내려다보았고, 이준은 초점 없는 눈으로 세아를 응시했다. 그의 손가락에 꾹 힘이 들어갔다. 세아는 그가 참고 있다는 걸, 시전자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상황인데도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준아, 해도 돼.”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아.

그때, 이준이 움직였다. 그는 그대로 세아의 몸에서 손을 뗐다. 마치 느린 춤을 추듯 천천히 손이 움직였다. 그의 손이 안착한 곳은 바로 정이준, 그 자신의 가슴이었다.

이준의 입술이 달싹인다.

“정이준.”

스스로의 이름을 담는 붉은 입술.

“속박.”

챙, 사슬이 부딪치는 듯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세아는 눈을 크게 뜬 채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준은 눈을 뜬 채로, ‘속박’을 발음하던 입술 그대로, 조각상처럼 굳어 버렸다. 눈도 깜빡일 수 없고, 호흡은 의미 없이 코와 입으로 드나들 뿐.

세아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터졌다.

“하.”

그를 어느 정도 안다고 여겼다. 여러 번 뒤통수를 때린 남자, 그래 놓고 절절한 사랑을 고백한 남자, 속을 알 수 없는 주제에 연약하고 아름답게 매달리는 남자…….

그런데 지금은 정말 모르겠다.

정이준이 누구인지. 정이준은 자신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이준아.”

속박 스킬에 걸려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텐데, 이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인형이 우는 듯 아름답고 서글펐다.

흰 살결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다가, 세아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살짝 감쌌다.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 주며 물었다.

“힘들어?”

너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낫게 해 줄게.”

알고 싶어서, 몸을 숙여 깊이 입술을 겹친다. 아이 같은 입맞춤이 아니라 진짜 키스였다.

살며시 눈을 감으면 히든 퀘스트도, 페널티도, 적도 동료도 없는 세상으로 잠시 건너갈 수 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고 전해지는 온기를 느낀다. 달지도, 황홀하지도 않다. 아주 독한 약을 머금은 듯 씁쓸하고 혀가 아리다. 이대로 계속 몸을 겹치고 있으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듯한, 쓰디쓴 착각.

그 순간, 세아는 제 뺨에 닿는 이준의 손바닥을 느꼈다. 귀까지 감싸는 긴 손가락도. 그녀가 놀라 눈을 뜬 순간 이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젖은 눈을 접어 웃었다. 머리를 뒤로 빼려는데 그가 세아의 혀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틀어지는 고개와 입 안 깊은 곳까지 침입하는 혀를 느낀다. 이준이 손을 움직여 세아의 어깨와 허리까지 매만지듯 쓸었다. 그런 다음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여전히 입술에 서로의 체온이 남아 따뜻했다. 세아는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너, 이제 괜찮은…….”

이준은 웃으면서 울고 있다. 속박 스킬에 걸렸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그런데도 웃음이 별빛처럼 선명하고 어여뻤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먼 별처럼 아득했다.

“세아 누나.”

세아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이준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미소에, 마음에 압도된다. 세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이준이 환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누나다.”

세아는 어떻게 정신이 들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준의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머리와 뺨을 쓸어 주며 당부했다.

“여기서 기다려.”

가볍게 몸을 일으켜 정이준의 곁을 떠난다. 멀지 않은 곳에 당혹한 오스카가 주저앉아 있는 걸 보고, 세아는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오스카는 너무 놀란 탓인지 바닥에 앉아 굳어 버린 채였다. 세아는 훌쩍 그에게 다가가 앞에 섰다. 시종일관 여유롭고 침착한 표정이 싹 가신 얼굴을 보니, 늪 바닥을 헤매다 지상으로 올라온 듯 상쾌했다. 머리에 가득 찬 진흙을 씻어낸 듯 개운하기까지 했다.

“뭐야, 자신만만하더니 이렇게 쉬운 거였어?”

고작 키스 한 번으로 풀릴 스킬이라니. 정신계 스킬로는 세계 최강이라고, S급 헌터의 정신계 스킬은 다르다고, 그런 말들이 다 우스울 뿐이다.

“이세아, 기다려!”

오스카가 절박하게 외쳤다. 세아는 몇 초 정도는 기다려 주기로 했다. 바람은 더없이 신선했다. 하늘과 땅에 가득하던 몬스터가 사라지고 나니 진정 고요하고 쾌적한 밤이었다.

“실수하는 거다! 정말로 시스템을 없앴다간 수많은 사람이 네게 원한을 가지고 달려들 거야!”

세아는 달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짧은 숨을 토했다. 길진 않았지만 전투까지 마쳤더니, 가벼운 운동을 해서 땀을 흘린 것처럼 몸이 가뿐했다. 게다가 오래 묵은 이준의 세뇌 문제까지 해결됐다. 정말 기분이 좋아서, 오스카를 살려주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지,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물러나. 네가 왜 시스템 살해에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아는 그대로 오스카의 목을 썰었다. 그의 몸뚱이와 머리가 아주 깔끔하게 분리되었다. 협회장 최두정을 죽였을 때처럼 말끔하게. 사람 몸이 아니라 당근 같은 것을 칼로 콱 내리친 듯 깨끗하게. 지저분하게 너덜거리는 살점조차 보이지 않았다.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이준에게 돌아갔다. 뺨에 튄 피를 슥 문질러 닦으며 세아는 그에게 깨끗한 손을 내밀었다.

“자, 일어나.”

이준은 잠시 세아를 바라보다가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기 손등을 감싸는 이준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세아는 그대로 힘을 주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저쪽에 카일리랑 리웨이가 있어. 같이 돌아가자.”

필요한 말을 한 뒤 그녀는 이준의 손을 놓았다. 그런 다음, 그녀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리다가 시원하게 덧붙였다.

“얘기는 나중에 하고.”

“네, 누나.”

13.83

카일리와 리웨이 쪽으로 가니 상황이 좋지 않았다.

스마일맨의 시체와 그 옆에 멍하게 앉아 넋을 잃은 카일리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리웨이는 도움을 구하는 표정으로 세아를 바라보았지만, 세아도 어색하게 제 이마를 문지를 뿐이었다. 리웨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깐 기절했다가 깨어났어.”

세아는 한숨을 꾹 참았다.

예상은 했다. 갑자기 몬스터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듯 사라질 때부터 상황을 짐작했다. 스마일맨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뻔하다. 카일리의 안전을 염려한 탓이리라. 진짜 스테파니를 죽이고 이제껏 자신과 타인을 모두 속였지만 마지막에는 도움이 되고 죽은 셈이다.

물론 완전히 얼이 빠진 카일리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아는 조심스럽게 카일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카일리.”

“다들 별로 놀라지도 않네.”

카일리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마일맨에 대해 알고도 숨긴 세아와 리웨이는 조금 움찔했다. 카일리는 텅 빈 눈을 들어 세아를 돌아보았다.

“알고 있었어?”

“네가 충격 받을까 봐, 말하려고 했는데…….”

카일리는 그쯤에서 고개를 틀며 세아의 말을 묵살했다. 그러더니 비틀거리면서도 혼자 일어나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스마일맨의 시체는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세아마저도 당황하여 그녀의 뒤를 쫓으려는데, 카일리가 갑자기 휙 돌아섰다.

바닥에 널브러진 스마일맨의 시체를 보던 카일리가 돌연 움직여 그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동생의 죽음을 애도하듯 스마일맨의 뺨을 애달프게 쓰다듬었다.

또 갑자기 마음이 변한 듯 벌떡 일어나 곁을 떠난다. 다시 돌아오고, 또 떠나고, 돌아오고, 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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