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세아는 견디지 못하고 카일리의 팔을 낚아챘다.
“그만해, 카일리!”
“말해 줬어야지!”
카일리가 짐승처럼 사납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세아의 양 팔을 움켜쥔 그녀가 눈물과 땀에 젖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외쳤다.
“어떻게 이런 걸 숨겨, 어떻게! 내가 놀랄까 봐 그랬다고? 날 위해서였다고? 아니, 넌 내가 놀라서 네 퀘스트에 방해가 될까 봐 걱정한 거야!”
세아의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카일리의 거친 몸짓에 따라 흔들리다가 멍하게 입을 벌려 물었다.
“뭐?”
“나한테 말했어야지, 내가 결정하게 했어야지! 어떻게 날 빼놓고 둘이서만 얘기해, 스테파니 일인데!”
“카일리, 진정해요!”
세아 곁의 이준이 둘 사이를 갈라놓으며 외쳤다. 서둘러 다가온 리웨이도 세아를 이끌어 뒤로 데려갔다. 카일리는 오물 덩어리처럼 뭉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마구 몸부림쳤다. 이준이 그녀를 붙들어 세아와 멀어지게 했다.
“으아아아악!”
카일리가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세아는 아득하게 그 얼굴을, 리웨이를, 하늘 저편을 바라보았다. 많은 일이 해결되었다 믿었는데 다시 엉망이 된 기분이었다.
13.84
이준의 부모는 돌아온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정상이 아닌 아들을 보며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세아는 그들이 잠시 재회의 정을 나눌 수 있게 내버려 두고 자기 방으로 올라왔다.
피와 땀에 젖은 몸을 씻고, 물기를 닦고, 가운을 걸친 다음 침대에 누워 긴 숨을 토했다. 오스카의 시체를 앞에 두고 느낀 개운함은 이미 다 사라지고 없었다. 불 꺼진 방에 취침 등만 켜 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넌 내가 놀라서 네 퀘스트에 방해가 될까 봐 걱정한 거야!’
그런 게 아니다. 정말 그런 게 아니다. 카일리가 감당해야 할 충격이 너무 클까 두려웠다. 스마일맨과 계속 자매로 지낼 수도 없고, 동생의 마음을 온전히 지닌 몬스터를 죽일 수도 없다. 카일리에게 그런 고통스러운 딜레마를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스마일맨을 떠나가게 하는 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 은둔하고 가족과도 연을 끊은 동생, 그 정도면 카일리가 납득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리웨이는 찜찜해했지만 세아는 자기 판단이 옳다고 확신했다.
세아가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머리가 아팠다.
정말 카일리의 말이 틀린 걸까?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가서 문을 여니 이준이 서 있었다.
“누나.”
“들어와.”
세아는 숨을 토하듯 대답하고 먼저 등을 돌렸다.
차라리 잘 됐다. 혼자 있어 봤자 카일리 생각에 심란하기만 할 것이다. 이준과 지난 일에 대해 이야기라도 하면 좀 나을 듯했다. 세아는 침대에 걸터앉았고, 이준은 맞은편 바닥에 앉아 세아를 올려다보았다. 그 역시 씻고 왔는지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세아는 말끔한 얼굴을, 모든 이성과 이지를 찾은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준의 세뇌가 너무 쉽게 깨져서, 잘 믿어지지 않는다. 고작 스스로 다가가 건넨 키스 한 번에 세뇌가 깨지다니.
“괜찮아요?”
낮은 목소리로 물은 이준이 세아의 무릎에 살짝 손을 얹었다. 세아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복잡하네. 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
세아는 간단하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세뇌 상태였던 이준이 그동안의 일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알 수 없어서, 하나하나 전부 이야기해야 했다.
그가 세뇌된 직후 그의 부모님을 이리로 데려오고, 스테파니를 구하고, 리웨이를 만나 설득하고, 올리버를 구출하고,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 스테파니가 몬스터라는 걸 알게 되고, 세이브 던전을 발견하고, 오스카가 찾아오고…….
“기억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네요.”
간단한 대답만 하며 세아의 말을 들은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말했다. 세아는 피로한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이제 대강 다 해결된 줄 알았는데 카일리가…….”
어쩌면 파티에서 나가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해서 전력에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고, 어차피 이 히든 퀘스트는 궁극적으로 이준만 있으면 클리어가 가능하지만, 마음이 무 자르듯 간단히 잘리질 않았다.
“모르겠다.”
두 번째로 그렇게 말하며 세아는 좀 더 가벼운 어투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너 몸은 괜찮아?”
“네, 문제없어요. 세뇌 당했을 때 무리해서 힘을 써서 그런가 근육통이 있긴 한데, 그럭저럭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다……. 후유증도 없는 것 같고?”
“일단은요.”
재활까지 필요한 경우도 있다더니, 이준은 말끔하게 나아진 모양이었다. 어쩌면 시전자인 오스카가 죽어서인지도 모른다.
세아는 이준에게 무언가 물으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어떻게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녀는 정말 궁금했다. 최후의 순간, 이준이 어떻게 세아 대신 스스로를 속박할 수 있었던 것인지.
침묵 속에서 이준이 먼저 질문을 건넸다.
“그때 왜 계속 도망치지 않았어요?”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추격전을 벌이던 세아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이준에게 돌진했었다. 세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가볍게 대답했다.
“그냥 계속 도망쳐 봐야 술래잡기밖에 안 될 것 같았고, 모르겠어. 그냥 그래도 될 것 같았거든.”
“그럼, 왜 키스했어요?”
갑자기 던져진 물음에 세아는 말을 잃고 눈만 깜빡였다. 막 씻어서, 수정처럼 맑은 그의 얼굴을 본다. 자신은 분명 스스로 몸을 굽혀 이준의 붉은 입술을 머금고 타액을 섞었다. 왜 그랬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럼 넌? 넌 왜 널 속박했는데?”
어둑한 방에서 오가는 물음. 의미 없는 대답.
“누나를 다시 죽일 순 없으니까요.”
세아의 숨이 멎었다. 이준은 두 손으로 세아의 손을 감싸고 거기에 이마를 묻었다. 마치 고해하는 신도처럼.
“말해 주세요, 누나……. 세뇌 당한 동안, 내 머릿속을 헤매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요.”
무릎으로 그의 따뜻한 숨이 느껴졌고, 곧 애걸하듯 속삭여 묻는 소리도 들렸다.
“나 전에 누나를 죽인 적 있나요?”
세뇌 스킬에 걸린 동안 깊은 무의식 속에 갇혔다. 끝없는 어둠 혹은 빛, 가도 가도 무 자체인 공간에서 이준은 자기가 미쳐 가는 걸 느꼈다. 환영, 환청, 차례로 덮쳐드는 환각 속에서 주저앉기도 여러 번이었다. 세아는 평생 알 수 없을, 끝나지 않는 고통.
정신이 드니 명확해진다. 그 안에서 이준은 분명 보고 들었다.
‘이세아, 속박!’
머리 열세 개 달린 용이 세아를 향해 덮쳐든다. 비상 탈출 스크롤을 찢는 순간 어렴풋이 보이는, 세아의 머리통. 몬스터의 이빨 사이에서 무자비하게 으깨진다. 마치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진 수박처럼 허망하게.
바깥세상은 너무 환해서 눈이 부시다. 손을 들어 빛을 가려야 할 정도로. 그리고 그제야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 모든 게 환상일 수 있을까. 그저 오스카의 농락일 수 있을까.
같은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던 것 같은 기묘하고 오싹한 느낌.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하나도 떠올릴 수 없는, 찢어진 동화책처럼 너덜너덜한 결말. 국경이 지워진 지도처럼 모호한 세상.
언젠가 세아는 잔혹하게 선언했다.
‘이번에도 날 배신하면, 너를 영원히 잊어버릴 거야.’
그 순간 느꼈던 기묘한 위화감. 이번에도 배신한다니, 세아가 잘못 말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일을 겪고 나니 느낌이 달랐다. 어쩌면, 그 전에도 자신은…….
이준은 간절히 매달렸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차마 세아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도 없었다.
“전에 누나를 속박한 적 있나요? 무슨…… 무슨 던전인 것 같아요. 머리가 여러 개 달린 용이 있었어요…….”
파편이 된 기억 속에서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다. 세아가 자신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자신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제대로 떠올릴 수가 없다. 기억을 믿지 못하니 자기 자신은 더욱 불신하게 된다.
“누나가 죽는 동안, 난 혼자 스크롤을 찢고 간 것 같아요. 던전 밖으로 나오면…… 날이 환하고, 아니, 가끔은 어둡고요…….”
“이준아.”
그가 감싸 쥐지 않은 세아의 손이 살며시 뒤통수에 닿았다. 그 한 자락 온기에도 이준은 몸을 떨었다. 이준은 방으로 막 들어왔을 때의 평정을 모두 잃어버리고, 오래된 수수께끼의 답을 구하는 순례자처럼 매달렸다.
“거짓말하지 말고요. 그냥 사실대로…… 사실대로요…….”
그는 알아야 했다. 알고 싶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오스카의 세뇌는 그저 세뇌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본의 아니게 이준의 정신 가장 깊은 곳에 잠든 씨앗에 물을 주었다. 씨앗은 싹을 틔웠고, 진실이라는 햇빛을 향해 맹렬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정이준.”
세아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다시 그의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혼자 세뇌에 시달리는 동안, 그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지금에야 생생하게 느껴졌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 몰랐다. 잘 참기에 참을 만하니 참는가 보다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가 대체 무얼 보았는지, 세아는 전혀 모른다. 앞으로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세아가 할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시스템 살해 퀘스트를 달성하지 못할 때마다 회귀한 건 사실이야. 그리고 그때마다 널 만났던 것도 맞고.”
“그럼, 그럼 내가…….”
“하지만 넌 날 죽인 적 없어.”
이준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 스치는 환희를, 세아는 보았다. 안개꽃처럼 은은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기쁨이 번졌다. 세아가 마주 미소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순간.
그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꽃은 모두 지고 곳곳마다 그림자가 스몄다. 돌 틈으로 빗방울이 들이친 듯 얼굴 구석구석이 축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