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72화 (72/112)

72화.

“거짓말이죠?”

“아니야.”

눈치 빠르긴. 세아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넌 거짓말 하면 티가 난다고, 그렇게 말하며 제 배를 쑤시던 언젠가의 김현호도 떠올랐다. 카일리처럼 잘 속는 사람도 있던데 이준은 그런 사람이 아닌 모양이었다.

“누나, 그냥 다 잊으면 안 돼요?”

이준이 세아의 손바닥에 이마를 묻으며 애원했다.

“다 잊고 나랑 살아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영원히.”

내가 누나를 배반한 것도, 죽인 것도 다 잊어버리고 그냥 함께 영원히. 다음 생에도, 다음 생에도 나는 짙푸른 운명처럼 누나를 사랑할 테니, 그 굴레가 잔혹하고 의미 없다 해도 나와 함께…….

사실은 용서 받을 자신이 없다.

세아가 잊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절망스럽다. 누가 자신을 수차례 배신한 남자를 사랑하겠는가. 어떻게 그 남자를 믿고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겠는가. 죽음으로 믿어서는 안 될 사람임을 배웠는데.

이 좌절 속에 잠겨 익사할 것 같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정이준은 빌었다.

“용서해 주세요.”

세아로부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눈물을 참으며 거듭 말했다.

“예전에 그런 것도, 그리고 지금 이런 말 하는 것도…… 다 잊어버리자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해서 죄송해요. 누나, 저, 저 앞으로 잘할게요. 누나 대신 죽으라면 그렇게 할게요. 같이 퀘스트 끝낼 때까지 계속 노력할게요.”

그러니까 용서해 주세요.

잦아드는 목소리로 덧붙인 말에, 세아는 대답을 미루며 그의 머리를 쓸었다.

이준을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과거는 사진만큼이나 선명하게 고정된 장면, 현재는 흐름을 짐작할 수 없는 물결. 과거의 일을 따져 물을 마음도 없었고 이준을 극렬히 증오한 적도 없다.

눈앞의 히든 퀘스트가 가장 중요하니까. 반복되는 회귀를 끝내는 것 외에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이준의 배반에 대해, 그의 과거에 대해 깊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빈다. 울면서 용서를 구한다.

세아는 빈 벽을 바라보며 멍하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 진짜 이상해진 게 맞나 봐.’

인형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처연히 매달리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치미는 건 컴컴한 의심.

이준에 대한 의심은 아니다. 세아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날 죽인 게 정말 너일까?”

분명 정이준이었다. 스마일맨 같은 건 아니었다. 이준도 기억이 있다고 하니,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때 자신을 속박해 죽게 만든 건 확실히 이준이었다.

그런데 이 느낌은 대체 뭘까. 가슴에 치덕치덕 달라붙은, 끈적한 의구심.

‘이건 해결해야겠다.’

결론을 내린 후, 세아는 이준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이 의심은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애절하게 매달리는 이준이 자신을 죽였을 리 없다는, 헛된 망상이 낳은 감정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나서 이준을 변호해 주고 싶은 건지도.

세아는 인정했다. 이준이 정말 자신을 죽였다 해도, 자신은…….

“이준아, 난 널 용서할 거야.”

이준이 숨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세아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방금 들은 말을 곱씹고 또 곱씹을 뿐이었다. 세아는 충동에 입술을 내어주었다. 때로는 충동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웅크린 진심이다.

“네가 지난 생에서 날 대신해 죽은 적 있어서는 아니야. 이번에 계속 날 도와줘서도 아니야. 네 팔이 녹는데도 내 상처만 돌봐서도 아니고, 네가 끝까지 세뇌와 싸워서도, 지금 이렇게 울어서도 아니야.”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왜 이준만 다르냐고 해도 가진 답은 ‘모른다’ 뿐.

그래서 세아는 나오는 대로 말했다.

“그냥 널 용서해.”

이유도 모르는 채로, 아니,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속절없이.

마침내 눈이 마주쳤다. 세아는 눈물로 붉어진 그의 눈가를 보았다. 나를 버리지 말라고, 그가 처음으로 매달리던 순간이 스치듯 떠올랐다.

“누나.”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더니, 이준은 다시 침묵했다. 쏟아지는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자기가 꼭 쥐고 있던 세아의 손에, 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손등과 손바닥에, 손가락 마디마디에, 푸른 핏줄이 비치는 손목에, 마치 체온을 새기듯 정성스럽게. 작은 새가 자기가 머물 곳을 찾아 날개를 접고 고개를 묻듯이.

“누나를 사랑해요.”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13.85

스테파니가 사라진 후, 함께 머물던 모든 사람이 진실을 알게 되었다. 스테파니가 스마일맨이었다는 것, 아니, 스마일맨이 스테파니였다는 것, 아니……. 무어라 정확히 말할 수조차 없는 비극이었기에, 모두 살아 있는 시체 같은 카일리를 위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세아와 리웨이는 몇 번 카일리와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카일리는 그때마다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다가 슥 일어나 자리를 피해 버렸다. 소리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울음 한 토막 꺼내놓지 않았다.

하루 종일 카일리의 마음만 돌보며 지낼 수는 없었다. 세아는 올리버를 불러 이준에게 소개해 주었다.

“둘이 계속 얼굴은 봤지만, 이준이가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참고로 올리버는 영어만 할 줄 알아.”

이준과 올리버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준은 어린아이에게 익숙하지 않았고, 올리버는 이제 와서 새삼 인사하는 게 어색한 듯했다. 물론 세아는 둘의 감정에 크게 마음을 기울이진 않았다.

“올리버, 아직 그 아이템 가지고 있지?”

“아, 응.”

올리버가 주섬주섬 이준의 귀속 아이템을 꺼냈다. 상황을 전혀 모르는 이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아이템을 내려다보았다.

한가로운 낮, 해가 드는 집 앞 정원, 올리버의 손바닥에 놓인 평범한 돌멩이 하나. 회색 바탕에 검은 점이 콕콕 박혀 있는, 그냥 돌멩이였다. 탁구공처럼 완벽한 구 모양이라는 걸 제외하면 특별할 것도 없었다. 크기도 크지 않아서 올리버의 작은 손으로도 충분히 쥘 수 있었다.

이준의 시선이 닿자 돌멩이가 가볍게 진동했다. 그러더니 스스로 굴러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준은 자기 발치로 굴러온 돌멩이를 보다가 허리를 굽혀 그걸 주워들었다.

세아도 올리버도, 잔뜩 긴장한 채 그를 주시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그래요?”

이준이 돌멩이를 올리버에게 내밀며 세아를 향해 물었다. 세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이상하네. 아무 느낌도 없어?”

“네.”

“그거 네 튜토리얼 보상 아이템이었대.”

이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아이템을 한참 내려다보더니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랬던 것도 같고.”

“그랬던 것도 같다고?”

기억 안 나냐는 듯 묻자, 이준이 머쓱한 듯 이마를 만지더니 설명했다.

“아무 쓸모도 없어서 버리려고 했어요. 부모님이 말리셔서 그냥 드렸던 것 같은데. 첫 아이템이라 무슨 특별한 기능이 있나 해서, 두드려도 보고 던전에도 가져가 보고 협회에 물어도 보고했는데…… 그냥 돌이에요.”

세아와 올리버가 시선을 교환했다. 이준이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었을 때, 세아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이거 네 귀속 아이템이야. 스킬로 상세 조회해 보면, 귀속 날짜가 지금으로부터 10년쯤 뒤야.”

“네? 10년 뒤요?”

“뭐 짚이는 데 없어?”

이준은 잠시 침묵하며 열심히 생각했으나, 희미한 느낌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고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겠어요.”

세뇌 당했을 때 무언가 단서를 얻었던 것도 같은데, 그때의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환상인 듯 진실인 듯 섞여 있어서 제대로 기억해내기가 어려웠다.

“내가 죽은 뒤에도 넌 계속 살았던 거야. 그리고 그 시점에 이 아이템으로 뭔가 한 거지.”

“계속 작동하지 않는다면, 아마 일회성 아이템일 거야.”

올리버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푸른 눈동자가 천재다운 호기심을 품고 반짝거렸다.

“내가 계속 연구해도 돼?”

세아는 아이템 주인인 이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준은 아이템의 비밀을 듣고도 크게 관심이 가지 않는지 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새로 알아낸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줘, 올리버.”

세아는 부드러운 어조로 당부했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세아는 아이템을 꼭 쥐고 멀어져 가는 올리버의 뒷모습을 보며 핸드폰을 꺼냈다. 모르는 번호라, 세아는 일단 전화를 받았다.

“이세아입니다.”

“이세아 헌터, 한국 협회입니다.”

세아는 빙긋 웃었다. 올 게 왔군.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준을 향해 안심하라는 눈짓을 하곤 여유롭게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13.86

협회장실에 온 건 정말 오랜만이다.

세아는 잘 꾸며진 실내로 들어섰다. 처음 보는 한국인 직원이 하나, 그리고 그 옆에는 김현호. 세아는 그를 보고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 앉았다.

“안녕, 이세아.”

김현호가 무거운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세아는 테이블 가운데 놓인 태블릿을 본 후, 다시 김현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어. 잘 지냈지?”

“네 덕분에 잘 못 지내.”

“괜한 소리 하지 마. 뭐…… 새 협회장은 안 오는 거야? 얼굴 좀 익히려고 했더니.”

김현호는 안 와, 하고 짤막하게 답했을 뿐 부연하지 않았다. 세아는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공석이구나? 한국 협회장 자리. 그냥 언론에 발표만 안 하나 했더니.”

“어차피 넌 신경도 안 쓰잖아.”

“무슨 소리야, 신경 써야지. 새 협회장도 날 죽이려 할 거 아니야.”

다행히 아직 한국 협회장 자리는 비어 있는 모양이다. 그럴 법도 하다. 이전 협회장 최두정이 누구 손에 죽었는지 알 테니, 겁도 없이 협회장이 되겠다고 나서기가 어려우리라. 세아는 대강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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