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73화 (73/112)

73화.

김현호가 여기 온 이유도 뻔하다. 세아가 혹시 난동을 부릴까 봐 협회가 불러다 놓은 것이다. 그는 세아의 히든 퀘스트 클리어를 막으려 하고 협회에도 협조적이니, 흔쾌히 여기 왔을 테고.

조용히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정장 차림의 직원이 긴장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전화로 안내드린 것처럼, 미국 협회장 엠마 카이스가 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기로 온 줄 알았더니 화상 통화네요. 전 언제든 괜찮아요.”

세아가 흔쾌히 대답하자 직원이 태블릿을 작동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엠마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흰머리가 섞인 금발에 주름진 턱, 전형적인 중년의 백인이었다.

“직접 대화하는 건 처음이네요, 이세아 헌터.”

“네, 그러게요.”

세아는 엠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영국 협회장이었던 아이작도, 처음 세아와 만나자마자 엠마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엠마는 영국에만 연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세계의 모든 헌터 협회에 연락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아는 딱히 두렵지 않았다. 세상 모든 헌터가 다 달려들어도 그녀는 이길 자신 있었으니까. 그래도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 성가신 일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다.

“오스카의 죽음에 대해선 들었습니다.”

“아, 시체 수습해 가셔야죠. 저희가 수습을 못 해서.”

“정식으로 협상을 제안합니다.”

“아, 싫습니다.”

세아는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답하려고 답한 게 아니라 정말 입에서 바로 말이 튀어나갔다. 버튼을 누르면 ‘싫다’고 대답하는 로봇이 된 기분이었다.

“몬스터 끌고 와서 죽이려고 해놓고 마음대로 안 되니 협상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닙니다. 그냥, 뭘 준다고 해도 이 퀘스트를 포기할 순 없어서요.”

엠마는 한쪽 눈을 찡그린 채 한참 세아를 바라보았다. 화면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실제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문득 세아는 저쪽에선 자기를 어떤 심정으로 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시간을 두던 엠마는 느리게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 이 퀘스트에 집착하는 거죠? 시스템이 사라지면 당신도 좋을 게 없을 텐데요.”

이 사람에게 회귀에 대해 말해 줄 마음은 조금도 없다. 세아는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그냥 할 말 없어서 웃는 거지만 엠마는 머리가 복잡해질 것이다.

세아는 웃는 얼굴로 화면만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만하면 대화는 끝내도 될 것 같네요. 나는 협상하지 않을 거고, 당신들은 날 막지 못할 겁니다.”

구겨지는 엠마의 얼굴을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버렸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김현호가 허둥지둥 뛰어와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세아는 성가시다는 듯 턱을 하늘로 쳐들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김현호.”

“다시 생각해, 이세아.”

정말 성가시고 짜증스럽다. 마음 바꿀 생각 없다는데 왜 자꾸 아이처럼 와서 징징거리는지. 세아는 그의 손을 떨쳐내며 욕을 퍼부었다.

“이 새끼야, 너나 다시 생각해. 자꾸 나타나서 방해하지 말고. 너도 협회장이나 오스카처럼 목 잘리고 싶어?”

“뭐?”

“오스카는 정이준 세뇌시켜서 날 죽이려고 했지. 덤으로 시스템 몬스터까지 수백 마리 끌고 왔는데도 내 손에 두 동강 났어. 너라고 다를 것 같아? 뭐, 같은 한국 출신이라 봐줄 것 같아? 포기하고 시스템 사라진 후에 어떻게 살지나 생각해. 주식이라도 하든지.”

세아는 당혹과 분노로 붉어지는 김현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이준처럼 자신을 배반했다. 믿고 등을 맡겼는데 뒤에서 칼을 쑤셨다. 새삼 분노하는 건 아니지만 다시 맞붙게 된다면 이번에는 지지 않으리라.

세아는 돌아서서 협회 건물을 떠났다. 이제 가서 세이브를 하자.

아니, 그 전에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13.87

카일리는 집 앞 정원에 나와 있었다.

세아와 스테파니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눈 바로 그곳이었다. 그 일을 모를 텐데, 카일리는 스테파니가 앉았던 자리에 앉은 상태였다. 세아는 천천히 그리로 다가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카일리의 시선이 잠깐 세아의 얼굴로 향했다가 다시 먼 곳으로 사라졌다. 세아는 그녀가 뭘 보는지 알 수 없었다.

“카일리.”

대답이 없다. 말은 한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상대하기 싫다는 것일까. 그래도 언제까지고 이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초췌해진 얼굴을 살피던 세아가 침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저번에 이 근처에서 발견했던 던전에 세이브 기능이 있었어. 이름을 적으면, 내가 죽은 후에 그 장소로 돌아가. 내가 회귀하는 지점이 달라지는 셈이야.”

카일리는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눈도 마주치지 않아서, 세아는 그녀가 자기 말을 알아들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파티원 이름도 함께 적어야 해. 아마 회귀해도 나처럼 기억이 유지되진 않을 거야. 그래도 파티원 전체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으니 그렇게 해야지.”

세아는 카일리의 공허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네 이름은 적지 않을게. 단순히 이름만 적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네가 이 파티에서 나가고 싶다면, 미국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돕겠어.”

이 말에 카일리가 처음으로 시선을 틀어 세아를 바라보았다.

바로 대답을 들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기에, 세아는 결정을 재촉하지 않고 함께 침묵했다. 무척 어색한 몇 분이 흐른 후 세아는 자기 두 손을 깍지 끼워 잡으며 중얼거렸다.

“미안, 카일리.”

“…….”

“너한테 숨겨서 미안해.”

숨길 일이 아니었다. 카일리에게 사실을 알리고 결정을 맡겼어야 했다. 그때는 스마일맨을 조용히 처리해 카일리의 충격을 줄여야 한다고 믿었는데,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왜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넌 내가 놀라서 네 퀘스트에 방해가 될까 봐 걱정한 거야!’

카일리의 외침이 다시 떠올랐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저 파티에 괜한 혼란이 일어나는 걸 원하지 않았던 걸지도. 자기 자신의 마음인데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이제 날 못 믿는다고 해도, 파티에서 나간다고 해도 이해해.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리웨이도 그러더라, 미안하다고.”

카일리가 불쑥 입을 열었다. 세아는 그녀가 말을 했다는 데 놀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카일리는 당혹감에 굳은 세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그랬어? 정말 내가 걱정돼서 그랬어? 아님, 내가 네 퀘스트에 방해가 될까 봐?”

세아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이 대답으로 인해 카일리를 잃는다 해도, 솔직하게 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세아는 최선을 다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풀숲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신중하게.

곧 그녀의 입이 열렸다.

“모르겠어.”

“하.”

“아무렇게나 말하는 게 아니야. 정말 모르겠어. 난 그냥, 네가 너무 좌절할 것 같고, 너무 고민할 것 같았어. 안 그래도 동생이랑 3년 동안 헤어져 있었는데, 다시 만난 동생이 사실 몬스터였다니 너무 심하잖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던전에서 시체를 발견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동생을 찾은 줄 알고 환희에 젖었는데, 알고 보니 모든 게 거짓. 환희를 뒤집는 좌절.

“네가 못 견딜 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세아의 진심이었다.

카일리가 완전히 망가질 거라고 생각했다. 정신을 놓아 버릴 거라고. 카일리는 동생 때문에 세아를 죽이려 했고, 동생 때문에 시스템을 없애겠다고 결심했다. 동생이 모든 삶의 이유인 사람인데 어떻게 그걸 잃고 살 수 있을까.

그런 카일리를 보호하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때, 카일리가 덤덤한 어조로 물었다.

“왜? 네가 너무 강하니까 다른 사람은 다 약해 보여?”

“뭐?”

“내가 스테파니를 잃으면 자살이라도 할까 봐?”

“그런 생각까진 안 했어.”

“했잖아.”

“…….”

아주 어렴풋이, 스치듯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깐 가정해 본 적은 있다. 세아는 입을 다물었다. 마주친 카일리의 눈은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카일리는 더없이 일상적인 투로, 그러나 한 자 한 자 화인을 새기듯 선언했다.

“난 파티에서 나가지 않아. 시스템 죽이는 걸 포기하지도 않아. 내가 시스템 때문에 스테파니를 잃었고, 영영 되찾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난 이미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결정했어. 그러니까 되돌아가지 않아.”

그녀가 당연히 파티에서 이탈할 거라고 생각했던 세아는 눈을 크게 뜬 채 듣기만 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결의에 압도당했다.

“나는 네가 보호해야 할 어린애가 아니야. 네 마음대로 날 어린애로 만들지 마.”

정곡을 찔린 세아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은, 카일리를 내내 그렇게 생각해 온 것 같다. 동생 일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니까 보호가 필요하다고. 굳이 싸고돌지는 않았지만 누가 더 의지가 되냐고 물으면 카일리보다는 리웨이였다. 리웨이와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세이브 포인트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카일리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숨겼다. 악의는 없었지만 내심 카일리를 어린애 취급한 것이다.

“미안해.”

세아는 변명하지 않았다. 네가 시스템 보스 던전에서 동생을 부르짖으며 너무 처참하게 무너지기에, 약초 던전에서 너무 좌절하기에 연약해 보여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사과를 했다.

“미안해, 카일리.”

누군가와 함께 파티를 이루어 움직이는 건 이다지도 어려운 일이다. 반복되는 삶을 여러 번 살 때도 이런 건 느끼지 못했다. 그땐 사과할 일도 거의 없었다. 세아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 카일리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친 카일리는 살며시, 또 힘겹게 웃었다.

“됐어. 세이브할 때 내 이름이나 빼놓지 마.”

카일리의 웃음 앞에 세아는 잠시 아연했다. 이런 사람을 왜 약하다고 생각했을까. 이렇게 고통을 털고 일어나서, 자기 갈 길에 시선을 고정하고 뚜벅뚜벅 걷는 사람인데.

“응, 카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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