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13.88
[상태 고정. 종이에 파티원 전원의 이름을 적으십시오. 파티장 사망 시, 이 시간과 장소로 돌아옵니다.]
펜은 미끄러운 종이 위에서 막힘없이 움직였다. 세아는 첫 이름을 적었다.
이세아.
히든 퀘스트를 받고 여러 번 실패하고 배신당하기 전까진, 혼자 힘으로 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았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파티 같은 것도 잠시의 편의를 위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흰 종이에 홀로 적힌 이름처럼.
한때, 이준도 카일리도 모두 각자의 이유로 세아를 죽이거나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세아 뒤에 있었다. 앞으로도 이런 아이러니와 더불어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게 싫지 않았다. 세아는 계속 이름을 적어 나갔다.
정이준.
카일리.
리웨이.
올리버.
거기까지 쓴 후, 세아는 잠시 펜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만 망설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곧 다시 펜 끝을 종이에 댔다. 마지막 이름, 의미 없는 이름을 적기 위해서.
스테파니.
[상태가 고정되었습니다. 파티장 이세아, 현재 생존원 5명, 사망원 1명. 이름을 확인한 후 맞다면 펜을 내려놓으십시오.]
세아는 펜을 내려놓았다.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세이브가 완료되었습니다.]
8장. 휴식도 S급답게
13.89
가장 시급한 일은 이준의 정화 스킬을 강화하는 것이다. 지난번 하마 보스와 만났을 때, 정화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대신 스킬 강화 방법이 새로 표시되었으니 그걸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세아는 카일리와 리웨이, 올리버까지 모두 거실로 모은 후 이준에게 스킬 창 내용을 알려 달라고 했다. 올리버에게는 현재 상황, 시스템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준 뒤였다.
“정화. 스킬 등급 S. 스킬 속성은 시스템. 상세 설명은, 시스템 보스 던전을 정화한다. 시스템을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스킬이다. 일반 속성 몬스터에게도 사용할 수 있다. 스킬 강화 방법은…….”
이준이 잠시 말을 끌었다. 세아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
“왜? 또 글자가 깨졌어?”
지난번에는 시스템이 장난질을 쳐 스킬 강화 방법을 확인할 수 없었다. 곽남주 몸을 차지한 시스템을 죽이자마자 이준이 오스카에게 잡혀가는 바람에 이제야 내용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설마 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다행히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잘 이해가 안 가서요. 어쨌든, 마저 읽을게요. 스킬 강화 방법. 모든 시간을 되찾는다.”
“모든 시간을 되찾아?”
카일리와 리웨이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짚이는 데가 있는 세아는 한숨을 겨우 참았다.
지난 생, 자기가 죽은 후에도 이준은 계속 살아갔음이 확인되었다. 정체 모를 귀속 아이템도 남겼다. 그 귀속 아이템은 시공을 뛰어넘어, 튜토리얼 아이템이라는 형식으로 이준에게 돌아왔다.
아마 ‘모든 시간을 되찾는다’는 건 이준이 사라진 시간의 기억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리라. 시스템 던전 하나 없애기 힘드네, 세아는 그 말을 삼키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 퀘스트 새로 온 건 없어?”
보통 스킬 강화 방법이 표시되면 그에 따른 퀘스트도 도착한다. 그게 중요한 힌트가 될 때도 많다. 모두 기대감을 품고 이준을 보았으나 한동안 시스템 창을 뒤지던 이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요. 원래랑 똑같아요.”
“미치겠네.”
세아는 소파에 몸을 푹 묻으며 중얼거렸다. 카일리와 리웨이도, 대체 모든 시간을 되찾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며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이걸 파티에게 숨길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세아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설명했다.
“아마 정이준의 기억을 찾으라는 뜻일 거예요. 난 지난 인생에서 죽으면 바로 회귀해서, 나 죽으면 세상도 거기서 끝나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시간이 계속 이어졌던 모양이에요. 최소 10년 뒤까지.”
귀속 아이템의 귀속 날짜가 10년 후니, 적어도 그때까지는 세상이 계속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세아는 머릿속으로 정보를 정리하며 설명을 이어 갔다.
“난 지금까지 열 번 넘게 죽었는데, 이준이를 만난 후로도 아마 꽤…… 여섯 번? 일곱 번? 그 정도 죽었거든요. 이준이가 먼저 죽은 적도 있지만, 어쨌든 나 죽은 이후 이준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아내야 하는 것 같아요. 본인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간에 대해 알아 내라는 거겠죠.”
“왜 그런 조건이 붙었지?”
리웨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세아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시스템이 그렇다는데 이유를 물어서 뭐 하겠어요?”
세상이 여러 번 다시 시작되는 동안 이준의 스킬이 불완전해졌을 가능성도 크다. 아니면 그저, 소멸하고 싶지 않은 시스템의 발버둥일지도 모른다. 자기 머리로 알기엔 너무 복잡한 일이라 세아는 그저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린 방법을 찾아 낼 거예요.”
세아는 힘을 주어 그렇게 말했다. 이준은 세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그동안 뭘 하죠? 길드에 연락할까요?”
“내가 전화해 볼게. 도와줄 사람 있어. 인사도 할 겸.”
세아는 잠시 물러나 핸드폰을 들었다. 상대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세아는 목소리를 높여 반가운 투로 인사했다.
“혜진 씨! 잠깐 시간 괜찮아요?”
13.90
혜진은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했다. 서울 외곽, 통유리창이 있는 널찍한 카페였다. 공간은 넓은데 자리는 많지 않아 무척 조용했고, 모든 테이블에 ‘예약’ 표시가 올라가 있었다. 이 공간을 세아가 전부 빌렸을까, 혜진은 궁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아도 모습을 보였다.
“혜진 씨!”
활기차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세아와 그 옆의 이준을 보고, 혜진도 살짝 손을 들어 보였다.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세아는 빙긋 웃었다.
“주말인데 내가 괜히 불러 낸 건 아니에요?”
“약속도 없었는데요, 뭐.”
이준은 부드럽게 대답하는 혜진을 살피며 침묵했다. 아주 평범한 생김새에 체구도 그리 크지 않았다. 세아가 어딜 다니든 팔다리를 힘차게 움직여 뛰는 타입이라면 이쪽은 정해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책상만 내려다볼 듯한 느낌이다.
좀 더 침착하고 차분하고, 다른 사람의 기분과 분위기를 살피며 조심성 있게 나아가는 성격인 듯했다. 실제로 그녀는 세아의 인사가 다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충분한 대답을 한 후에야 이준의 소개를 부탁했다.
“이분이 그분이에요? 세뇌 당했다던.”
“아, 맞아요. 혜진 씨 덕분에 도움 많이 받았어요.”
이준도 살짝 고개를 숙이며 부드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이준입니다.”
“S급 헌터시죠? 저는 김혜진이에요. 길드 알고리즘 정보팀에 있고요.”
이준은 혜진과 악수하며 약간 미소 지었다. 길드 정보팀에 있다니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누군지 알았을 텐데, 호들갑을 떨거나 먼저 아는 척하지 않고 신중하게 기다렸다. 세아가 왜 이 사람을 신뢰하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혜진과 눈이 마주쳤다. 혜진은 동그란 눈으로 이준의 얼굴부터 가슴팍까지를 슥 훑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세아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너무 순간적인 움직임이라 이준은 자기가 착각했나 고민해야 했다.
지금 나 탐색 당한 거야? 이준이 당혹한 사이, 혜진이 물었다.
“부탁할 게 있다면서요?”
“네. 매번 전화로만 얘기하는 거 미안해서……. 내가 억지로 불러 낸 건 아니죠?”
“저야 세아 씨 보면 좋죠.”
나도 좋아요, 라고 대답한 세아는 직원을 불러 음료와 음식을 잔뜩 시켰다.
“그동안 도움만 받고 대접을 못 한 것 같아서요.”
“엄청나게 도움된 것도 아닌데요, 뭐.”
“그래도 미국 협회까지 압박하고 나선 마당에, 앞으론 움직이기 더 어려울 거 아니에요.”
자몽 주스를 들던 혜진이 순간 멈칫했다. 그러더니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알고 있었어요?”
“그냥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죠.”
한국 협회는 이미 길드에 연락을 취해 이세아를 돕지 말라고 했다. 영향력 있는 길드나 높은 등급 헌터는 협회의 통제를 받지 않아서, 그 말을 대충 흘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 협회까지 세아를 견제하고 나섰다.
혜진은 막 구운 뜻 따뜻하게 부서지는 스콘을 먹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큰 영향은 없어요. 한국이든 미국이든, 협회가 뭘 어쩌겠어요? 실제로 힘을 발휘하는 건 헌터고, 협회는 사무국이나 마찬가진데.”
“길드가 좀 부담스러워하긴 하겠죠.”
“그건 그래요. 무슨 일이기에 미국 협회까지 나서냐면서 말들은 좀 많아요. 그래도 세아 씨는 워낙 인기가 많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혜진은 슬쩍 이준을 살폈다. 세아는 치즈 스프를 먹느라 혜진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혜진은 감자와 계란을 얹은 오픈 샌드위치를 자르며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한동안 최초의 버그 문제로 시끄럽더니, 언젠가부터 그런 말은 쏙 들어가더라고요. 협회도 더는 정이준 헌터와 협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상황이 좀 변했어요.”
세아는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음식을 씹는 혜진을 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혜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단서가 있는데,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어요.”
세아는 ‘모든 시간을 되찾는다’라는 스킬 강화 방법에 대해 말해 주었다. 폭신한 핫케이크 위에 놓인 블루베리를 포크로 찍으며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모호하네요. 특정 던전으로 가야 할 수도 있고, 그냥 애써서 기억을 찾으라는 얘기 같기도 하고……. 좀 알아볼게요.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 시간과 관련된 던전이 몇 군데나 있는지.”
“고마워요.”
세아는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혜진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길드의 협조를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보를 찾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해야 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