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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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도 갈림길을 만났고, 머리카락을 보고 손쉽게 방향을 찾아냈다. 그 역시 세아처럼 신중했다. 신이 나서 뒤를 쫓는 대신 느리게 나아가며 주위를 살피기를 택한 것이다.
수중 던전은 분위기가 수시로 달라져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공간이 환하다가 어둡다가 넓다가 좁다가 하니, 그때마다 다시 적응해야 하고 시야도 새롭게 확보해야 했다.
그래도 이준은 겁을 먹진 않았다. 이것도 세아와 마찬가지의 이유였다. 그는 인어의 생태를 잘 알았다. 사냥감을 깊은 곳으로 유인해서…….
그때, 갑자기 뒤에서 누가 어깨를 두드렸다. 톡톡,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찌르듯이. 이준이 휙 돌아보니 뒤로 다가온 건 세아였다.
세아는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댔다. 곧 그 손을 그대로 움직여 먼 곳을 가리키며 함께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이준은 갑자기 나타난 세아 때문에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나란히 앞으로 나아갔다.
은은한 빛이 어룽진 통로. 끝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깊은 곳까지, 같이 헤엄친다. 가면 갈수록 주위가 어두워져 앞을 보기가 어려웠고, 물고기나 산호는 진작 자취를 감췄다. 이제 비죽비죽한 바위와 물밖에 없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때, 갑자기 세아가 이준을 좁은 곳으로 부드럽게 밀쳤다. 어깨를 짚고 꾹 밀어내는지라 이준도 그대로 떠밀렸다. 둘은 마치 물에서 짝을 이루어 무용하듯 둥글고 유연하게 움직였다.
어두운 통로 어디쯤, 바위와 바위 사이에 이준을 기대서게 한 세아가 살짝 웃음을 보였다. 이가 아주 조금 드러나고 물속에서 더욱 붉게 보이는 입술이 달처럼 고혹적으로 휘어졌다. 이준은 왜 이러느냐고 묻는 대신, 넋을 잃은 듯 세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이 찬데도 세아의 뺨에는 홍조가 어려 생기 있어 보였다. 세아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이준의 뺨을 장난스럽게 감싸더니, 드러난 맨살을 살며시 쓸어 주었다. 손가락은 우아하고도 명랑하게 움직여 이준의 가슴을, 또 복부를 지나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이준은 어지럼증을 느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두운 통로의 천장과 맞은편 벽까지 환히 보였고, 세아가 유혹하듯 하늘하늘 움직여 그의 다리 사이를 쓰는 것도 생생히 느껴졌다. 이준은 자신을 억제하기 위해 숨을 토했다. 물방울 몇 개가 춤을 추며 날아갔다.
세아의 몸이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이준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 안쪽에 있었다. 애를 태우듯 살금살금 표면을 쓸며 간지럽히고, 키스를 원하는 듯 서서히 얼굴을 가까이 한다.
이준은 어느새 자기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린 걸 깨달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세아의 뺨을 감싸고 그녀의 목을, 맨 어깨를 더듬었다. 욕망은 잔혹하게 치밀어 몸 안쪽을 뭉개듯 부수고 있었다.
어느새 세아의 상의가 사라졌다. 이준은 이를 악물고 서서히 세아의 살결을 쓸며 손을 미끄러뜨렸다. 목과 어깨를 지나, 곧고 선명하게 뻗은 쇄골을 어루만지는 동안 서서히 이준의 눈이 내리 감겼다. 입술은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한껏 쥐어 보고 싶었던 가슴이…….
우드득, 정이준이 뒤집힌 비늘을 쥐어뜯으며 번쩍 눈을 떴다. 인어의 머리가 확 멀어지고 물에 붉은 피가 선명히 번졌다. 비늘이 뜯긴 자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인어가 입을 벌려 소리 없는 비명을 토했다. 멀쩡하던 다리가 어느새 꼬리로 바뀐 게 보였다.
들을 수 없는 음파 탓인 듯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준은 그대로 인어를 버려 두고 힘껏 팔다리를 움직여 달아났다. 왔던 길을 되짚어 세아와 처음 헤어졌던 곳으로, 그 밝은 광장으로. 뒤에서 통로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지만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우르릉! 이준이 빠져나오자마자 등 뒤의 길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준은 숨을 헐떡이며 한동안 물에 둥둥 떠 있었다. 빛의 광장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로웠다.
‘세아 누나는 어디 있지?’
세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준은 한참 넓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세아가 있나 살폈지만,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혹시 먼저 돌아갔나, 손에 든 비늘을 움켜쥐며 고민했으나 세아가 그랬을 것 같진 않았다.
이준의 불안한 시선이 푸른 풍경 안에서 어지러이 헤매다가, 세아가 사라졌던 왼쪽 통로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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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목소리만 나왔다면 세아는 입 밖으로 그 욕을 뱉었을 것이다.
갑자기 등 뒤에서 이준이 나타났을 때부터 이상함을 느꼈다. 당연히 인어일 거라고도 생각했다.
인어는 스마일맨처럼 모습을 바꾸어 사냥감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스마일맨과 다른 점이 있다면, 타깃이 성적인 매력을 느낄 법한 모습으로 접근해 입을 맞춘다는 것. 그렇게 헌터의 호흡을 빼앗는다.
인어와 입맞춤을 하고 나면, 던전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오기 전까진 물에서 호흡할 수 없게 된다. 그대로 익사한 헌터도 몇 있었다.
헌터와 키스하기 위해, 인어는 보통 이상형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읽는지는 밝혀진 바 없으나, 연예인의 모습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고 들었다.
사실 세아는 이 방식을 비웃었다. 헌터가 바보도 아니고, 어떤 아마추어가 그딴 작전에 속아 넘어가느냐고. 뜬금없이 나타나 이렇게…….
‘누나.’
이준이 입술을 벙긋거리며 세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몬스터 주제에 체온은 진짜 같아서 정말 따뜻했다. 맨살이 드러난 목에 촉, 입술을 대며 이준이 애처롭게 머리를 비볐다.
세아는 벽에 꼼짝없이 등을 대고 붙어 서서 탄식했다. 힘이 없어서, 혹은 인어의 마력에 홀려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 이런 취향인 거야?’
잠시 이유 모를 인생무상의 허무함이 밀려 왔을 뿐!
인어는 팔을 뻗어 세아의 허리에 매달렸다. 그러면서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어, 그녀의 배와 허벅지에 계속 입술을 눌렀다.
이준이 살짝 이를 보이며 허벅지 안쪽을 어린 짐승처럼 깨물었을 때,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순하고 말간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봤을 때, 서글픈 듯 촉촉한 두 눈을 보았을 때.
세아는 못 이기는 척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내 이상형이 진짜 이거라고?’
이준이 몸을 일으켜서 세아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세아와 눈을 맞추던 그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입을 맞추려는 줄 알고 반격할 준비를 했는데, 뜻밖에도 인어는 시선을 얽더니 애처롭게 속삭일 뿐이었다.
‘나 버리지 마요.’
별걸 다 따라하네, 그런 생각에 헛웃음이 났지만 한편으론 가슴이 철렁했다.
서서히 얼굴이 다가온다. 세아는 이 김에 눈을 똑바로 뜨고 이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흠 없는 얼굴이다, 헌터가 아니라 연예인이 되었어도 좋을……. 어떨 때는 성인 남자답게 단단하다가, 허물어질 때는 여지없이 무너져 모든 약점을 드러내는 이 얼굴.
어쩌면 이 약한 부분을 아끼는지도 모르겠다.
세아가 그대로 손을 뻗어 이준의 가슴팍을 짚었다. 그리고 그대로 손톱을 세워 우둑, 가차 없이 비늘을 쥐어뜯었다.
그대로 인어를 밀어 팽개치고 헤엄치는데, 맞은편에서 진짜 이준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세아는 손을 들어 아직 피가 나는 비늘을 보여 주었다. 이준은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제자리에서 세아를 기다렸다. 세아는 멈추지 않고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고, 이준도 재빨리 몸을 움직여 뒤를 따랐다.
넓은 빛의 광장을 지나 어두운 통로 속으로,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으로. 둘은 헤엄치고 또 헤엄쳐서 마침내 던전 밖 뭍으로 나왔다.
파, 둘 다 잠수하고 올라온 것처럼 숨을 토했다. 안에서 숨이 막혔던 것도 아닌데, 물에 머무는 건 본능을 거스르는 짓이라 그런지 지상으로 올라오면 개운하긴 했다. 세아는 흐르는 물을 닦고 수모를 벗었다.
“비늘 챙겼지?”
따끔거리는 눈을 문지르며 묻자 이준이 비늘을 보여 주었다. 세아는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기 전에 물었다.
“왜 내 쪽으로 왔어? 뭐 문제 있는 줄 알았잖아.”
“아니, 혹시 누나가 위험할까 해서요.”
“내가 왜 위험해. 나보다 네가 약한데.”
세아는 픽 웃으며 긴 머리의 물을 짰다. 물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고, 던전으로 입장하려는 사람들 여럿이 그녀 곁을 스쳐갔다. 이준은 세아를 바라보다 조금 머뭇거리며 불렀다.
“누나?”
“응?”
“누나는 누가 나왔어요?”
세아는 입을 꾹 다물고, 머리카락을 짜는 일에 집중하는 척했다. 이준이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머리를 털고 탈의실로 가며 툭 던지듯 답했다.
“몰라, 무슨 영화배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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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는 세아와 이준을 반기며 얼른 아이템부터 확인했다. 그는 두 사람이 구해 온 인어의 뒤집힌 비늘을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진짜 최고야! 상한 데가 하나도 없어!”
“잘됐지?”
세아는 올리버의 머리에 톡 손을 얹었다가 금세 거둬들였다. 올리버가 빛나는 눈으로 세아를 바라보더니 와락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팔에 힘을 주어 세아의 허리를 꼭 안고, 곧 뒤돌아 종종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세아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머리를 쓸었다. 옆에 있던 이준이 빙긋 웃었다.
“쟤가 누구한테 저러는 거 처음 보네요.”
“그러게. 좀 안정되고 있는 것 같지?”
오늘도 역시 카일리와 리웨이는 집에 없었다. 다들 뭘 하느라 이렇게 바쁜지 모를 노릇이다. 세아는 두 팔을 위로 쭉 뻗어 올리며 오래 헤엄쳐 뻐근해진 몸을 풀었다. 그때, 이준이 세아의 양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마사지했다.
“아파요?”
“아니.”
대강 고개를 저은 세아는 거실 소파로 가서 축 늘어졌다. 이준은 소파 아래 바닥에 앉아 그녀의 손바닥을 주물주물 문질러 주었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멍하게 천장만 보며 마사지를 즐기던 세아는 곧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뺐다.
“됐어. 아픈 건 아니야.”
실제로 몸은 그리 피로하지 않았다. 이것보다 훨씬 더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도 멀쩡했는데, 이 정도로 지칠 리가 없다. 이준은 웃는 얼굴로 누운 세아를 보더니 다시 그녀의 손을 쥐었다.
“손잡고 싶어서 그래요.”
“…….”
이렇게 말하면 대답할 말이 없다. 세아는 그냥 침묵을 지키며 살짝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