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기분 좋은 압박감과 따뜻한 체온이 규칙적으로 전해졌다. 세아는 나른한 숨을 내쉬며 간만의 감각을 느꼈다. 히든 퀘스트를 받기 전에는 마사지도 자주 즐기고 휴양지로 놀러 가기도 하며 인생을 즐겼는데, 그 기억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준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누나.”
“으응.”
세아는 잠결인지 아닌지 모를 소리로 대꾸했다. 이준은 세아의 손과 손목, 팔까지 부드럽게 주무르고 문지르다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자요?”
“음…….”
잠들 수 있을 것도 같고. 세아는 굳이 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준의 목소리와 온기가 마치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낮고 침착한 음성이 세아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우리, 무슨 사이인가요?”
세아는 숨을 부드럽게 내쉬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정신이 또릿할 때 저런 질문을 받았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마음은 맑은 이슬에 젖은 나비 날개처럼 느긋하고 보드라운 상태였다. 세아는 그저 평온히 모르겠어, 하고 중얼거렸다 생각했지만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준의 마음이 한때의 착각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자신이 그를 꽤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도 알겠다. 그럼 뭐가 달라지는 걸까. 오늘부터 연애하자, 땅땅, 이렇게 되는 것인가. 갑자기 법봉을 든 판사가 “연애 시작!”이라고 외치는 모습이 꿈처럼 떠올랐다.
흐흠, 하고 세아는 잠꼬대처럼 웃었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모호한 날처럼, 꿈과 현실의 구분선이 흐리게 뭉개졌다. 세아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웃기지 않아? 진짜 어이없다.”
“네?”
이준의 되물음에 세아가 눈을 떴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근엄한 연애 판사는 사라지고 갑자기 현실의 정경이 나타났다. 세아가 멍하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물었다.
“뭐?”
“뭐가 웃겨요?”
“어?”
“…….”
세아는 머쓱하게, 나 꿈 꿨나 봐, 하고 중얼거렸다. 이준은 비식 웃었지만 꿈의 내용을 캐묻진 않았고, 그래서 세아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번 미룰 수 있게 되었다.
13.97
며칠 내내 혜진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핸드폰은 조용했다. 카일리와 리웨이는 여기저기 다니느라 바쁜지 얼굴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이준은 자기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세아를 챙기며 지냈지만, 세아는 그렇게 느긋하지 못했다.
저녁 무렵 전화가 왔을 때, 세아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핸드폰에 혜진의 이름이 정확하게 새겨져 있었다.
“여보세요?”
“아, 세아 씨. 혹시 실망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새로운 소식은 아니에요.”
혜진은 정말로 세아의 실망감을 염려했는지 재빠르게 말을 쏟았다. 그녀의 염려대로 세아는 정말 실망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알아보고 있는 사람에게 괜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세아는 부러 느긋하게 자기 침대에 몸을 눕혔다. 자세가 편안해지면 마음도 잠시 이완된다.
“아니요, 실망은 무슨. 그냥 휴가 즐기고 있었어요. 간만에 쉬고 좋네요.”
S급은 어디로 움직이든 시선을 끌기 때문에 세아는 정보를 얻기 위해 나서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지금은 혜진을 믿고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혜진이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세아는 그녀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곧 혜진이 넌지시 물었다.
“요즘 바쁘진 않죠?”
“네, 한가해요.”
“그럼…… 잠깐 인터뷰나 뭐 그런 거 할래요?”
“네?”
난데없이 인터뷰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세아는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심각한 투로 대답했다.
“왜요? 혹시 혜진 씨 위험한 상황이에요? 내가 뭐 도와줘야 하나요?”
“아,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협회 감시가 좀 유난스러워서요.”
“아아.”
그러니 인터뷰든 뭐든 대외 활동을 해서 협회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는 모양이었다. 세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가벼운 투로 물었다.
“사실 이번에 부탁한 게 좀 어렵죠? 아무래도 민감한 시기인데, 길드도 움직이기 조심스러울 테고……. 혜진 씨 단독으로 조사하고 있을 텐데 들키면 입장이 곤란해지잖아요.”
“전 크게 신경 안 쓰는데요.”
참 시원스러운 대답이었다. 혜진은 조용하고 침착한 사람인데, 이럴 땐 참 단호했다. 그렇게 대답해 주니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그래도 단숨에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세아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혜진 씨가 그렇다는 건 아는데, 그냥 제가 좀 신경이 쓰이네요…….”
사실 혜진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도와줄 이유는 전혀 없다. 잠시 직장 동료였지만 서로 잘 알 정도로 오래 알고 지내진 않았다. 목숨을 구해 준 것도 그저 우연에 불과했고, 그 이후에도 각별한 친분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애써 주는 걸까.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 혜진의 도움을 거절할 필요는 없지만 세아에게도 양심이란 게 있었다.
그러나 혜진의 대답은 가차 없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협회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한 이틀 정도면 충분한데…… 좀 공개적인 이벤트면 좋지 않을까요?”
혜진이 너무 쉽게 화제를 돌려 세아도 말려들고 말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해 보겠다고, 그리고 일정이 정해지면 연락하겠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이틀 정도 소요되는 공개 이벤트.
인터뷰처럼 진지하고 재미없는 건 안 된다. 좀 더 이목을 끌 수 있는 일이어야 하는데, 사람을 많이 모을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세아는 방에서 한참 고민하다가 밖으로 나갔다. 이준과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볼까 싶었던 것이다. 거실로 나가니, 익숙한 목소리가 서로 엉켜 들려왔다.
“그리고 이게 초등학교 졸업 사진이에요.”
“와, 어릴 때부터 똑 부러지게 생겼네요.”
“이건 중학교 올라가서 가족들끼리 여행 갔을 때……. 제주도였나?”
“돌 위에 올라간 것 좀 보세요. 어릴 땐 장난꾸러기였나 봐요. 지금도 그러니, 이준아?”
“세아 누나요? 장난기가 있는 것 같긴 해요.”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 거기 더해 이준의 부모님과 이준까지. 세아는 통로 벽에 기대선 채 이 낯선 조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직 아무도 세아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한참 세아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갑자기 이준의 어머니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이 귀한 사진을 저만 보다니, 세세 1기 회원들한테 미안해지네요.”
“세아가 팬클럽한테 뭔가 해 주나요? 아직도 유지되고 있어요?”
세아의 어머니 이은선은 관심이 가는 듯 물음을 던졌다. 딸 팬 카페니 부모님은 당연히 가입되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사실 세아의 부모는 인터넷 문화를 거의 몰랐다.
이 질문에 이준의 어머니는 신이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팬은 뭘 받으려고 활동하는 건 아니니까, 이세아 헌터가 뭘 안 해 줘도 상관없어요. 사실 3년 전에 1기 모집하고 아직도 2기 모집을 못 하고 있는 게 좀 아쉽죠. 가입 문의는 쏟아지는데, 세아 헌터가 팬클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계속 회원을 받기가 민망하더라고요.”
아, 이건 기억난다. 세아는 혼자 이준의 어머니 말을 이해했다. ‘세아 세상’ 팬클럽이 처음 생겼을 때,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소소한 인터뷰 자리여서 대강 대답했는데, 그냥 감사하다고 짤막하게만 대답했었다.
“소소하게 굿즈도 만들고 싶고……. 아, 굿즈라는 건 이세아 헌터 얼굴이나 상징이 들어간 물건인데요, 컵도 좋고 가방이나 티셔츠, 책갈피도 만들 수 있고요……. 근데 사실 세아 헌터가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어서 우리끼리 매일 이야기만 해요. 대신 도촬 화보집 내는 사람들을 고소하거나 기사 사진을 모아서 한정판 화보집을 내기도 하고 그러죠.”
“오, 그래요? 굿즈는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그냥 사서 가진다는 데 의미가 있죠!”
세아의 부모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잇대는 비슷한데 서로 이야기가 전혀 안 통하는 게 신기해서 세아는 픽 웃었다. 자기 어머니 옆에 앉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준도 웃기긴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서 몇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라 머리를 스쳤다.
굿즈, 화보, 팬 미팅. 세아는 흠, 하며 턱을 쓸었다.
‘괜찮은데?’
13.98
이준의 어머니는 카메라를 설치하고 떨리는 손으로 녹화 버튼을 눌렀다. 카메라 뒤로는 이준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이준, 세아의 부모님, 올리버, 카일리와 리웨이까지 모여 있었다.
소파에 앉은 세아는 조금 긴장한 채 렌즈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런 건 처음이라 뭐라고 말해야 할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몇 번 촬영해 보고 자연스럽지 않으면 대본을 쓰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일단은 즉흥적으로 말을 뱉어 볼 작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세세 1기 여러분, 그리고 저를 사랑해 주시는 많은 분들.”
어색하다. 진짜 어색하다. 세아의 표정에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세아의 시선이 어지럽게 사방을 방황했다. 그때, 눈이 마주친 이준이 살짝 웃음을 보였다. 세아는 작게 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어, 첫 공식 팬 미팅을 하게 되었는데요, 저도 어떤 분들을 만나게 될지 설레고 그러네요. 제가 연예인도 아니고 배우도 아니라 이런 건 서툴지만, 그래도 즐거운 시간 보내실 수 있게 많이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안녕!”
세아가 어색하게 두 손을 흔들자 촬영이 끝났다. 이준의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세아를 바라보더니 두 손을 맞잡고 외쳤다.
“너무 예뻐요!”
“아, 어, 감사합니다.”
“이걸 실사로 보다니……. 이대로 올려도 되겠어요!”
길 가다 팬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사진을 찍어 주거나 사인을 해 준 적은 있어도, 이렇게 본격적인 팬 서비스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여러 번 반복해 살면서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인데 잘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잘하든 못하든 일단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도 팬이 있고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이 있어 협회의 위협을 피해 왔으니, 가서 잘해 주고 와야지. 세아는 괜히 머리를 한번 쓸며 어설프게 다짐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