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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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세아 세상 1기 운영진입니다.
이세아 헌터에 대한 여러분의 아름다운 애정에 보답하기 위해, 이세아 헌터의 공식 팬 미팅, ‘쎄쎄쎄’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세세와 세아 헌터가 함께하는 첫 공식 팬 미팅을 놓치지 마세요!
일시: 20XX년 8월 31일 오후 1시
장소: 서울. 선정자에 한해 차후 공지
예상 시간: 120분
인원 체크 시간: 12시
입장 시작 시간: 12시 30분
아래의 신청 방법을 확인하시고 양식에 맞게 신청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신청 방법: 메일
신청 양식: 메일에 신청자 이름, 연락처, 팬카페 아이디 기재. 팬카페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면, 메일에 이세아 헌터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기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연을 적는 이유는 기존 팬카페 회원이 아니더라도 팬 미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래 유의사항을 숙지하시고 팬 미팅 당일 혼선이 없도록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1) 선정되신 분들은 반드시 인원 체크 시간인 12시까지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2) 팬 미팅 장소를 SNS 등에 공유하는 것은 가능하나, 입장은 선정자 팔찌를 받은 분에 한해서만 가능함을 안내드립니다.
3) 좌석은 선착순이 아니라 랜덤 배정입니다. 이세아 헌터는 팬분들이 좌석 때문에 미리 와서 힘들게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4) 팬 미팅 당일 사진과 영상 촬영이 가능합니다.
5) 손 편지 등의 작은 선물은 현장에서 직접 전달 가능하지만, 밀봉된 기기 등은 입장 전 검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래는 이세아 헌터의 짧은 영상 편지입니다. 최선을 다해 팬 미팅 준비를 마치고, 당일 즐거운 마음으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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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아 헌터가 팬미팅을 한다.
그녀는 가장 충성도 높은 팬을 가진 헌터였다. S급 헌터는 세계에 열두 명밖에 없으니 주목받는 유명인이지만, 팬까지 거느린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세아가 그 많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고 그녀의 팬들은 꾸준하기로 유명했다.
세아는 심심풀이로 팬 미팅 신청 메일을 열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사연을 읽다 보니 지루한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3년 전에 세아 헌터가 뉴스에 나온 걸 봤습니다. 술 취한 사람이 툭툭 치는데도 가만히 참아 주는 영상을 보고 이 사람은 진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행적을 하나하나 찾아봤는데 언론에 공개된 건 많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던전을 공략하는 헌터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아, 역시 이 사건 영향이 컸지. 세아는 침대에 누운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혼자 납득했다.
재앙 발발 2년째, 술에 취한 남자 미각성자가 시비를 걸어 왔다. 시끄럽고 사람이 번화가 한복판이었는데, 지나가는 세아를 보고 대뜸 시끄럽다며 시비를 걸었다.
한참 얼굴이 알려지던 때라 마스크까지 끼고 혼자 걷던 세아로서는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괜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고 상대가 미각성자 같아 재빨리 지나가려 했다. 남자가 대뜸 세아의 어깨를 잡아챈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남자는 세아의 어깨를 툭툭 치고 가방을 빼앗으려 하는 등 갖가지 행동으로 그녀를 열 받게 만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굴이라도 한번 후려치고 싶었으나, S급 헌터는 완력만으로도 쉽게 미각성자를 죽일 수 있다. 세아는 그저 묵묵히 참고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남자가 달려들어 주먹으로 세아의 어깨를 갈겼을 때, 세아는 결계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미각성자가 주먹으로 결계를 내리치면 손가락뼈가 부러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녀는 조용히 경찰을 불러 상황을 해결했고, 이 상황이 처음부터 끝까지 찍힌 동영상은 어마어마한 조회수를 기록하며 세아를 스타 헌터로 만들었다.
전에도 소소한 응원의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은 몇 있었지만, 그 사건을 기점으로 팬이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공식 팬카페가 생기고, 언론은 그녀를 정의로운 유명인으로 소비했다. 헌터들의 과실치사 문제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을 때라 시기도 적절했다.
생각해 보면 헌터가 미각성자를 상대로 힘을 쓸 수 없는 건 당연한데, 왜 이렇게까지 칭송받는지 모를 일이다. 세아는 늘 그런 의문을 갖고 있었고, 길에서 만난 팬에게 서비스를 하긴 했지만 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번에 팬이라는 사람들과 직접 만나게 된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세아 누나?”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 세아는 툭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
이준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세아의 침대에 살짝 걸터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일리랑 리웨이는 안 가는 게 낫겠죠?”
“응.”
함께 갈 이유가 없다. 거기서 갑자기 습격이라도 당한다면 위험한 건 세아가 아니라 그 둘이었다. 오스카의 몬스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후, 둘은 스킬의 등급을 높이고 공격과 방어의 균형을 맞추는 데 전념하는 듯했다. 팬 미팅에 끌어들여 시간을 빼앗을 마음은 없었다.
이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저도 안 가는 게 나을까요?”
세아는 대답 대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준은 살며시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야기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팬 미팅이라고 해도 꼭 좋은 마음으로 오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이건 한국 협회를 의식해서 하는 일인데, 그쪽에서 사람을 보내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
세아는 선선히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팬 미팅 공지가 올라갔고 기사도 나고 있으니, 협회도 바짝 긴장했을 것이다. 한국 협회뿐 아니라 오스카를 보냈다가 실패한 미국 협회도 애가 타리라. 미각성자가 많은 팬 미팅 장소를 폭격하지는 못해도 수를 쓰려 들 게 분명했다.
“그리고 팬이라면서 사진을 몰래 찍거나 이상한 약이 든 음식을 먹이려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 사람 많겠지.”
팬으로 위장해 해를 가하려는 사람도 꽤 있었다. 길에서 만나면 팬이라며 달려들어 위험한 약을 탄 음식을 주고, 안 먹으면 왜 안 먹느냐고 보챈다. 외출한 세아의 모습을 몰래 찍어 인터넷에 올리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헌터든 미각성자든, 악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세아는 악의가 살갗에 닿을 때마다 슬퍼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누나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요.”
이준은 살며시 세아의 손에 제 손을 겹치더니 중얼거렸다. 그는 세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리 제가 팬인 척하고 거기 있을까요? 아니면 진행 요원인 척해도 되잖아요.”
세아는 자기도 모르게 픽 웃었다. 이준을 비웃은 게 아니라 진짜 웃겨서 웃은 건데 이준은 오해한 듯 낯빛이 변했다. 세아는 시무룩해진 그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말이 돼? 너도 인터넷에 얼굴 팔릴 만큼 팔렸어.”
“얼굴 가리고 있으면 되죠.”
“거기서 수상쩍게 모자 눌러쓰고 마스크도 쓰고 그러려고? 네가 제일 수상해 보일걸.”
이준이 살짝 속입술을 물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세아의 귓가에 스몄다.
“걱정돼서 그래요.”
“그럼 따라와.”
“네?”
이준이 놀라서 멍하게 되물었다. 내내 안 된다는 듯이 대꾸하다가 갑자기 따라오라니, 허락이 너무 시원스러워서 오히려 바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아는 이준의 의문을 해결해 주는 대신 자기 말을 반복했다.
“따라오라고. 왜, 싫어?”
“아, 아뇨. 근데 저 왜 데려가는 거예요?”
“뭐야, 방금까진 따라오겠다고 하더니 막상 오라니까 귀찮구나?”
“그게 아니라…….”
세아는 그렇게 어물쩍 넘어갈 뿐,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카일리와 리웨이는 데려가지 않는데 왜 이준만 데려가는지, 팬 미팅에서 무얼 해서 협회의 시선을 끌 작정인지……. 이준은 하나도 짐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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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미팅 장소는 아트센터 메인홀로, 나무랄 데 없이 넓고 쾌적했다. 메인 홀 안에도 밖에도 사람이 많았는데 모두 세아의 팬이었다. 팬 미팅에 당첨되어 입장 팔찌를 찬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서로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자리에 앉아 주세요! 팬 미팅 곧 시작합니다! 여러분, 자리에 앉아 주세요!”
진행 요원들이 바쁘게 계단식 좌석 사이를 뛰어다니며 내부를 정리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한국의 또 다른 S급 헌터, 김현호도 그 자리에 있었다.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면서.
“저거 김현호 아니에요?”
“진짜 김현호 헌터다. 웬일이지?”
“설마 이세아 헌터 팬인가?”
김현호는 억울함에 순간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릴 뻔했다. 그는 세아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절대 그녀의 팬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아의 예상대로, 한국 협회는 이세아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긴장했다. 협회에 협력하느라 김현호 역시 팬 미팅 신청 메일을 보냈다. 이세아 쪽이 생각이 있다면 자기를 들여보내지 않을 줄 알았는데, 당첨 안내 메일을 받았을 때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와서 감시해 봤자 뭐가 나온다고. 불퉁한 심정으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데, 좌중이 갑자기 확 조용해졌다. 무서울 정도의 침묵 사이로 뒷자리 여자의 흥분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온다. 진짜 들어와!”
세아가 단상 쪽으로 걸어오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카메라 소리가 어마어마해서 소리에 머리통을 얻어맞는 듯했다. 현호는 조금 기가 질린 채로 이세아의 움직임을 살폈다. 자리가 앞쪽이라 세아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여러분.”
세아는 스탠드 마이크 앞에 서더니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어색해 보였지만 현호의 예상만큼은 아니었다. 팬들은 그런 엉거주춤한 인사라도 좋은지 미친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환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