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80화 (80/112)

80화.

그때, 세아가 현호 쪽으로 정확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현호가 확신한 순간 그녀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마이크에 대고 또렷한 발음으로.

“안녕, 김현호. 여러분, 김현호 헌터도 이 자리에 와 주었습니다. 한국 협회와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여기까지 와 준 친구에게 먼저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사람들은 그저 이세아가 하는 말이라면 다 박수를 칠 기세로 손바닥을 두드렸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확 현호에게 몰렸고, 그는 카메라 몇 대가 자기를 찍은 걸 알아차렸다. 그는 이가 갈리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세아는 그와 시선을 얽은 후 빙긋 웃었다. 무어라 더 말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화제를 돌려 버렸다.

“물론 가장 감사한 건 여기 와 주신 팬분들이에요. 갑자기 공지했고 또 이런 행사가 처음인데 기꺼이 와 주셔서 정말 떨리기도 하고 그러네요. 오늘 즐거운 시간 보내고 가실 수 있게 저도 많이 준비했어요.”

사람들이 다시 비명을 지르는 걸 느끼며 현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 사람들은 이세아가 멍멍 짖어도 눈물을 흘리며 귀엽다고 감동해 줄 것 같았다. 완전히 적진 한가운데에 던져진 기분이군, 현호는 이를 갈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팬 미팅은 퍼포먼스보다는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세아는 이제껏 온몸에 두르고 있던 신비주의를 과감히 벗어 버렸다. 사실 일부러 자신에 대한 말을 아낀 건 아니었으므로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한 시간 정도 마이크가 객석에서 돌고 돌았다. 현호가 듣기엔 다 그저 그런 질문뿐이었다.

“팬들이 뭐라고 불러 주는 게 가장 좋으세요?”

“언니라고 많이들 부르던데, 나이대가 워낙 다양하니 그냥 편한 대로 불러 줘도 될 것 같아요.”

이러면 객석에서 누군가가 “멋있으면 다 언니야!”라고 빽 소리쳤다. 와르르 웃음이 터지고 마이크는 또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김현호는 그들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잠시 협회의 충고를 떠올렸다.

‘이세아를 정말 막고 싶다면 팬 미팅 때 감시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혹시 협회나 시스템에 대해 허튼 소리를 흘리지는 않는지……. 아직 대중은 이세아 헌터가 최초의 버그인 것도, 시스템을 죽이려 하는 것도 모르니까요. 그쪽에서 먼저 선수를 치면 큰일입니다.’

하지만 막상 팬 미팅에 와 보니 대화는 정말 소소하고 어떤 의미에선 시답잖기까지 했다. 노래와 춤 중 어떤 것을 더 잘하는지, 사진작가와 협업하여 제대로 된 화보를 찍을 계획은 전혀 없는지, 나중에 자서전을 낼 것인지 등등. 심지어 지금 뭐가 가장 먹고 싶으냐는 질문도 있었다.

현호의 얼굴에 슬슬 지루함이 스미기 시작하더니, 그의 몸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협회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고, 심지어 사람들은 한참 화제가 되었던 올리버나 오스카 얘기도 거의 하지 않았다. 세아에 대한 개인적인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하긴, 이들이 기자도 아니니 전문적인 질문을 할 리 없었다. 예전에 협회가 발표했던 최초의 버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헌터로서 협회나 정부와 협업할 때 어떤 점이 어려운지, 이런 건 팬이 궁금해할 건 아니었다. 이들은 이세아를 사랑하니까.

현호는 하품을 겨우 참으며 주위를 살짝 둘러보았다. 낯익은 얼굴도 없고, 사람들은 다 이세아만 보고 있다. 여자 팬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시간을 보내는 건가?’

이럴 거면 왜 굳이 팬 미팅 같은 번거로운 짓을 한 거지?

한 시간이 조금 못 되는 대담 시간이 끝나고, 나머지 한 시간은 사인회와 만남의 시간이었다. 세아는 10분 휴식시간 후에 만나자며 단상 뒤로 사라졌고, 흥분에 찬 웅성거림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13.102

세아는 가뿐한 얼굴로 대기실로 돌아왔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이준이 재빨리 세아를 맞이했다. 그는 세아가 거추장스럽다는 듯 벗는 카디건을 받아 들고 그녀의 차림을 살폈다.

깃이 강조되지 않은 흰 셔츠에 몸에 붙는 블랙진이 잘 어울렸다. 속이 비치지 않는 셔츠라 조금 두껍고 빳빳한 감이 있지만, 단호하고 강한 세아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원래 키가 커서 편안한 로퍼를 신었는데도 작아 보이지 않았다.

걸치고 있던 카디건은 어디까지나 코디에 불과해서, 엷은 청색인데도 안에 입은 옷이 환하게 비쳤다. 자꾸 나풀나풀 흔들리는 게 귀찮았는지 세아는 그 옷을 아예 이준에게 맡겨 버리고 편안한 가죽 소파에 늘어졌다.

“으아, 이것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멀쩡한 표정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전투한 것도 아니고 스킬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몸 중심에 고여 있는 힘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누가 업어준다고 하면 그대로 업혀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뒤로 다가온 이준이 부드럽게 세아의 어깨를 주물렀다. 힘을 강하게 주지 않아 체온을 전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접촉은 기분 좋았다. 세아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나른하게 신음했다.

“아…… 힘들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잖아요. 괜찮아요?”

이준은 뺨에 달라붙은 세아의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 주며 확인하듯 물었다. 세아는 눈을 감고 있다가 그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려 이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붉은 그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응, 괜찮아. 지금부터가 진짜니까.”

“네?”

“아니야. 너도 옆에 있을 거지?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네가 치유할 수 있으니까.”

세아의 신뢰가 이준의 가슴으로 살며시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믿지도 못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이런 말도 해 준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이준은 세아의 뒤통수에 살짝 입술을 댔다 떨어뜨렸다.

10분의 짧은 휴식이 끝나고 밖으로 나가니 이미 테이블이며 펜, 물까지 다 세팅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게 보였다. 세아는 자리에 앉아 사인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와, 정말요? 주말 근무까지 빼고 오신 거예요?”

“제주도에서 오셨다고요?”

앉아서 간단히 얘기만 하고 사인만 해 주면 될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팬의 유형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한참을 세아와 마주 보고 서서 비키지 않으려고 했다. 함께 사진을 찍어 주고 사인을 해 주고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는지까지 다 설명한 후에도 제자리에 서 있어서, 안내 요원인 척 서 있던 이준이 그를 비키게 해야 했다.

그런가 하면 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인사하고, 마치 폐라도 끼칠까 두려운 듯 허둥지둥 옆으로 빠지는 사람도 있었다. 세아는 그들을 붙잡아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며 보내 주었다.

선물과 손 편지도 세아 옆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작은 선물만 받는다고 했는데, 비싼 신발이나 가방, 시계 같은 걸 내미는 사람도 있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도로 가져가라고 실랑이를 할 수는 없어서 세아는 일단 손을 뻗어 그걸 받았다.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언니, 안녕하세요.”

세아는 그들을 바로 알아보았다. 언젠가 약초 던전 앞에서 만난 두 여학생이었다. 기사 사진을 모아 만든 화보집을 내밀며 사인을 해 달라고 하기에 그렇게 해 주었다. 가지고 다니던 펜까지 꺼내 넘겨주었는데,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이야. 물론 그러고 나서 세아는 한 번 죽었으므로, 두 여학생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든 만날 사람은 만난다는 건가? 세아는 괜한 반가움에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하고 사인도 정성껏 해 주었다.

그렇게 줄이 절반쯤 사라졌을 때 김현호가 세아 앞에 당도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도록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하는데?”

“그럼 넌 왜 여기까지 왔어?”

세아는 무감하게 대꾸한 후 옆에 쌓인 종이에 사인을 휘갈겼다. 종이를 김현호에게 건네주자 그는 묘한 표정으로 세아를 바라보다가 툭 내뱉었다.

“아깝지 않냐? 이거 다.”

“종이가 뭐가 아까워.”

“아니, 지금 이거 다 말이야. 시스템이 사라지면 잃게 될 것들.”

세아는 고개를 들어 새삼스럽게 팬들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이세아로 살았다면 이런 경험은 절대 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향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고 애정 어린 인사를 하는 사람들.

김현호가 뭘 묻는지 이해가 갔다. 시스템이 사라지면 돈과 명예, 호화로운 집과 별장, 압도적인 무력이 선사하는 마음의 여유, 그런 것만 잃는 게 아니다. 이들의 애정도 전부 잃어버리고, 헌터였던 자들 사이에서는 미움받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알 게 뭐야, 지금도 자길 미워하는 사람은 팬만큼이나 많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세아는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 그 말 하고 또 하는 거 지겹지도 않냐? 나 보기만 하면 이룬 게 아까울 거라고 하는데, 너나 잘 생각해.”

“뭐?”

김현호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세아는 세 살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스카 그 꼴 난 거 못 봤어? 시스템 속성 몬스터를 그만큼 끌고 왔는데, 목이 잘린 건 내가 아니라 그놈이야. 난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고 조만간 시스템은 반드시 사라질 거야. 그럼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뭘까?”

“널 전력으로 막는 거지.”

“아니지, 돈 모으고 투자하고 건물이라도 여러 개 올려. 멍청하게 나 막는다고 쫓아다니다가 시스템 없어지고 개털 되지 말고.”

세아는 사실 부와 명예 자체에 큰 욕심이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죽은 데다, 당장의 목표를 이루고 나면 아무 소란 없이 평화롭게 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게다가 이미 가질 만큼 가졌으니 평생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김현호는 다르다. 그는 한국의 S급 헌터, 부유하고 멋진 유명인사 노릇을 좋아한다. 대한민국 뭇 남자들은 아닌 척 그를 동경하고 질시했는데, 김현호는 그 시선을 몹시 즐겼다. 그래서 세아마저 찌를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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