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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의 히든 퀘스트-81화 (81/112)

81화.

세아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손에 턱을 괴고 현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다른 협회 사람들은 지금 뭐 하고 있을 것 같아? 아닌 척해도 다 비상금 모으고 있는 돈으로 도박하고 투자하고 건물 세우고 있을 걸? 멍하게 보다가 너만 바보 될래?”

그의 눈을 보고 직접 말해 주고 싶었다.

시스템 살해를 방해할 게 아니라 자기 살길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을.

“가라.”

세아는 나가는 쪽으로 고갯짓을 하며 내뱉었다. 김현호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아무 대꾸도 없이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아는 분열의 가능성을 점쳐 보았다.

한국 협회는 물론이고 오스카를 지원해 보냈던 미국 협회도, 서서히 쪼개지기 시작할 것이다. 오스카는 목이 잘렸고, 그가 끌고 온 몬스터 군대는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전멸했다. 이제 포기하고 돈이나 모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생겨날 것이다.

어쩌면 세아 쪽에 붙는 게 낫다고 여기는 이들도 나타날지 모른다. 그런 식으로 협회가 분열되면 자신의 일을 방해할 수 없게 된다.

세아는 김현호를 보내고, 다음 사람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한편 이준은 세아 곁에서 편지와 선물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른 진행 요원도 있었지만, 물건의 양이 워낙 많아 꼼꼼한 정리가 필요했다. 게다가 이준은 세아의 안전에도 신경을 기울이고 있어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와, 고마워요. 직접 만든 거예요?”

세아는 팬이 직접 만들었다는 건강 주스를 보며 감탄했다. 예쁜 유리병에 담긴 녹색 주스였는데, 확실히 신선해 보이긴 했다. 이준은 별생각 없이 흘끗 그 병을 보았다가, 세아로부터 넘겨받기 위해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팬이 와락 달려들듯 외쳤다.

“저, 언니! 그거 지금 드시면 안 돼요?”

“네?”

“아, 아니, 만든 지 얼마 안 됐을 때 마셔야 몸에 더 좋거든요. 시간 오래 지나면 안에 야채가 다 죽어서 너무 걸쭉해지고…….”

보통 팬미팅에서 받은 음식은 그 자리에서 먹어 버리지 않는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선물 받는 양이 많아 그렇게 먹어 버리면 위장이 고통 받을 테니까, 또 위험한 약이나 독을 탔을 위험이 있으니까.

세아는 자기 옆에 쌓아 둔 다른 음식을 흘끗 바라보았다. 정성껏 만든 쿠키, 직접 구웠다는 케이크, 알록달록 예쁜 마카롱, 듣도 보도 못한 각종 화려한 디저트, 색색의 음료…….

다시 팬에게로 고개를 돌린 후 세아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 그러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안 그래도 목말랐는데.”

세아는 이준에게 넘기려던 유리병을 열어 거기 입술을 댔다. 옆에 서 있던 이준이 너무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먹어 달라니, 너무나 수상한 발언인데 세아는 아무 의심도 없이 덥석 주스를 마셔 버린 것이다.

아니…….

이준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자신을 돌아본 세아와 정확히 눈이 마주친 것이다. 세아는 예쁜 유리병을 입술에 댄 채로 아주 미세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웃는 듯도 하고 찡그린 듯도 한 기이한 표정이었다. 곧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왼쪽으로 움직였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준은 세아의 시선을 따라 그녀 앞에 선 팬을, 주스를 건네주고 지금 마셔 달라고 부탁한 팬을 살폈다. 울컥, 그의 가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았다.

‘알고도 마셨어.’

이준은 이제 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수상한 걸 알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서 일부러 입을 댔다. 이준은 세아의 어깨에 손을 댄 후 바로 치유하려고 했는데, 병을 입에서 뗀 세아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하지만…….”

“맛있네요. 진짜 잘 마셨어요.”

그렇게 말한 세아는 그 팬에게 시원한 웃음까지 선사한 후 무사히 보내 주었다. 진행 요원에게 붙잡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팬과 인사하는 세아를 보는 이준의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

지금이라도 주스 팬의 뒤를 따라가 붙잡고 싶은데, 그러기엔 증거가 없다. 게다가 세아도 그걸 원하지 않는 듯했다. 이준은 갑자기 털이 한 움큼 쥐어뜯긴 사자처럼 사납고 예민해져서 주스 팬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 차례가 넘어간다. 이준은 세아의 몸이 살짝 휘청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세아는 좀 더 버텨 보려는 듯하더니, 몇 분을 넘기지 못하고 앉은 채 옆으로 쓰러졌다.

“누나!”

이준이 절규하듯 외치며 그녀의 몸을 받아 안았다.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일을 피한 세아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바로 치유하려는 그의 손을 콱 쥐며 세아가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

뭘 기다리라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팬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졌다. 세아의 혼절을 보고 동요가 일어난 듯했다. 진행 요원들은 몰려드는 팬을 저지하기 위해 일제히 앞으로 나서 인간 방어벽을 만들었다.

이준은 이 소란을 보다가 이를 악물고 세아의 몸에 손을 댔다. 이번에는 그녀가 말리든 말든 바로 치유할 작정이었다. 세아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는데, 그녀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핏기가 싹 빠져나간 입술이 보였다. 무서울 정도로 창백하게 변한 두 뺨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죽음의 베일이 세아의 얼굴을 덮은 듯 오싹했고, 그녀의 옷은 순식간에 수의처럼 보였다.

이준이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누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세아의 숨이 별 지듯 서서히 잦아들었다.

13.103

세아는 마치 무엇에 놀라기라도 한 듯 눈을 반짝 떴다.

몸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저리거나 쑤시거나 무거운 곳조차 없었다. 팔과 다리를 모두 움직여 보았고,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세아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자신이 누운 곳은 푹신한 침대였다. 풍경이 낯선 걸 보니 아무래도 집은 아닌 것 같고, 암막커튼이 쳐져 있어 안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세아는 느긋하게 침대에서 내려갔는데 바로 발 옆에 슬리퍼가 준비되어 있었다.

실내 슬리퍼를 신고 암막커튼을 시원하게 젖혔다.

바깥 정경을 보자마자 아직 서울임을 알았다. 높은 빌딩과 어지럽게 지나다니는 차들의 빨간 불빛, 가까운 곳에 펼쳐진 한강. 모든 생을 통틀어 수백 번은 반복해서 보았을 서울의 야경이었다.

드르륵―

갑작스러운 진동에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에 얌전히 놓인 핸드폰 화면이 잠시 반짝였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세아는 그쪽으로 가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발신인: 엄마

세아야, 이준이랑 통화했는데 깨면 전화 좀 해줘.]

기록을 살피니 문자와 전화가 수십 통 쌓여 있었다. 부모님이 번갈아 전화했었고, 카일리와 리웨이도 문자를 여러 통 보낸 모양이었다. 나머지는 나중에 확인해야겠다. 세아는 일단 엄마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 엄마.”

“세아야! 너 쓰러졌다며!”

“괜찮아졌어. 아마 이준이가 치유했겠지, 걔 힐러거든.”

세아는 마치 남 이야기를 하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딸이 S급으로 각성한 이후 웬만한 사건 사고에는 반응하지 않게 된 부모님도 이번 일만큼은 충격이었는지 말이 길어졌다.

“어떻게 팬 미팅 같은 거 하다가 쓰러져? 이준이가 그러던데, 뭐 잘못 먹은 것 같다고.”

“모르겠어. 그냥 요즘 좀 피곤했잖아.”

“피곤? S급 헌터가 쓰러질 정도로 피곤해?”

여러 번의 생을 반복하고 변수가 발생하는 동안, 부모님이 A급 헌터가 된 건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이럴 때는 조금 불편했다. 헌터의 상태에 대해 너무 잘 아는 부모님은 말 몇 마디로 속여 넘길 수가 없다. 그래도 세아는 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변명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리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막 주방 쪽에서 이준이 나오고 있었다. 세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어붙은 그에게 가볍게 손짓한 후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아, 엄마. 이준이 왔다. 나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

“다시 전화해. 이준이한테 고맙다고 하고.”

“응, 알았어.”

세아는 일단 통화를 종료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가오는 이준을 보며 침대 머리맡으로 손을 뻗어 취침등을 켰다. 불을 다 켜자니 눈이 부실 것 같고, 어둠 속에 있자니 답답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세아는 다가오는 이준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불빛이 이준의 얼굴을 밝혀 주었다. 세아는 마치 시를 읽듯 이준의 표정을 읽다가 덤덤한 투로 물었다.

“수습은 잘 됐지?”

“…….”

이준은 대답 대신 세아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침대가 살짝 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세아는 단단히 굳은 이준의 눈썹과 꽉 다물린 입술을 보다 그와 눈을 맞추었다. 늘 따뜻한 빛을 머금던 검은 눈이 유달리 차갑게 느껴졌다.

세뇌 당했을 때도 저런 눈빛을 본 적은 없었는데. 세아의 머릿속으로 문득 그런 생각이 스몄다.

“잘 수습했냐고 묻잖아, 이준아.”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이준이 반항적인 투로 물음을 받아쳤다.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거나, 목적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거나, 그런 말을 해서 달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듯했다. 세아는 피로한 척 눈가를 쓸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왜 그랬어요?”

“왜 알고도 마셨냐고? 너도 알잖아.”

“아뇨, 난 모르겠어요.”

이준은 고개를 젓더니 벌떡 일어섰다. 거친 걸음걸이로 주위를 어지러이 서성이던 그가 휙 고개를 돌려 세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준의 얼굴은 차가운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찡그린 표정도 아닌데 감정이 너무도 생생히 전해졌다.

“모르겠다고요. 다 눈치챘잖아요, 먹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잖아요. 근데 왜 그걸 마셔요, 치유는 왜 바로 하지 말라고 해요. 누나 정말 죽을 뻔한 거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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