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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의 히든 퀘스트-82화 (82/112)

82화.

“아, 잠깐만. 또 전화 왔어.”

“지금…….”

세아는 이준의 항변을 무시하고 전화를 받았다. 기다리던 연락이었다.

“혜진 씨.”

“기사 봤어요. 팬 미팅에서 쓰러졌다면서요.”

혜진의 어조는 늘 그렇듯 침착했지만,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세아는 이준으로부터 몸을 틀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옆에 힐러도 있었고요.”

“정이준 씨요?”

“네, 뭐. 그보다 알려 줄 거 있어서 전화한 거 맞죠?”

잠깐 침묵하던 혜진은 세아가 멀쩡하다는 걸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네, 하고 대답하더니 한참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종이가 어지럽게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세아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이준의 얼굴을 슬쩍 확인했는데, 그는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곧 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찾았다. 죄송해요, 이게 기록이 남으면 안 돼서 다 바로바로 출력했거든요. 음, 근데 혹시 다음에 만나서 직접 이야기할까요? 요즘 느낌이 안 좋아서, 좀 오싹하네요.”

“느낌이 안 좋다고요? 아.”

세아는 되묻자마자 바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협회가 혜진을 감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협회의 시선을 잠시 돌려놓긴 했지만, 도청이라도 하고 있다면 위험하다. 세아는 핸드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 들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좋아요. 내일 바로 만나죠.”

간단히 장소와 시간을 정한 세아가 전화를 끊었다. 그런 다음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이준을 돌아보았다.

“들었지? 알아냈대. 네 정화 스킬 어떻게 강화할 수 있는지 말이야. 협회는 불안해서 김현호까지 보냈고, 날 감시하느라 바빴을 거야. 그 사이에 혜진 씨가 움직였으니 이렇게 알아 낼 수 있었던 거고.”

“그래서 일부러 쓰러졌다는 거예요? 더 이목을 끌려고?”

“당연하지.”

이준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세아를 바라보았다. 입은 반쯤 벌어지고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여 세아를 살피고 있었다. 세아는 더 설명할 게 없어서 침묵을 지키는 중인데, 그는 이보다 더한 설명을 기다리는 듯했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그가 확인하듯 느린 어조로 물었다.

“그게 다라고요?”

“응. 그게 다인데. 이왕 제대로 준비해서 판을 벌였으니까 확실하게 하면 좋잖아. 네 덕분이기도 해. 널 믿었으니까 나도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거야.”

이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무섭도록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세아는 결국 깨달았다.

‘얜 이해 못 하는구나.’

무슨 말을 해도 이준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사실을 안다면 부모님도, 카일리도, 리웨이도, 혜진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하겠지. 세아는 정말 더는 생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아주 독한 약을 물 없이 삼킨 듯 입안이 얼얼하게 썼다.

화려한 야경을 등지고 앉아 자신에게 눈물로 사랑을 고백한 남자를 보고 있는데, 핸드폰에는 아직도 걱정하는 문자가 쌓이는 중인데, 그녀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 순간, 이준이 세아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온기에 세아는 자기 손이 차갑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이준의 손이 뜨거웠는지도 모른다.

그는 세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녀의 손만 내려다보았다. 곧 그가 세아의 손을 들어 제 이마에 대고 애걸했다.

“그냥 나 믿지 말아요.”

“뭐?”

갑작스러운 말에 세아가 바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다시 묻기 전에 이준이 답했다.

“나 믿어서 다치는 거면, 믿지 말라고요. 저번 생에서도 누나를 계속 죽인 게 나라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날 믿을 수 있죠? 내가 이번에 누나를 치유하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요.”

대답할 말을 잃은 세아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그는 고통에 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누나, 나는 누나를 걱정해요.”

어차피 죽으면 되살아나는데 뭐 하러 걱정하나. 너무 많은 생을 반복해서 죽음 앞에 덤덤해지고 있다. 세이브도 했으니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도 된다. 세아는 잠잠히 앉아 그런 생각을 펼쳐 놓았다.

“누나가 아무리 강해도, 죽으면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다 계획한 일이라도, 나는 누나를 걱정한다고요.”

“어차피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런 걱정하지 마.”

세아의 대답은 아주 침착했지만, 이준은 그녀가 참 무자비하다고 생각했다. 뒤나 옆을 돌아보지 않는, 악의 없는 잔인성이 세아의 일부였다.

“다시 시작하면, 나는 누나와 함께한 일을 전부 잊잖아요.”

세아가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세아가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날이 온다 해도 세아는 세아일 테니까. 좁힐 수 없는 최후의 거리를 실감하며 이준은 절망으로 떨었다.

“그리고 또 누나를 원하겠죠. 이유도 모르는 채로 누나만 좋아하겠죠. 누나는 나와 함께한 모든 생을 다 기억하는데, 나는 누나와 수십 번을 만난 것조차 알지 못해요.”

세아를 좋아하게 된 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처음부터 그녀가 좋았으니까. 그런 감정이 심장에 새겨져 있는 듯도 했다. 아무래도 이 사람과 만나기 전부터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 빈약한 운명론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이미 그녀와 몇 번의 생을 함께 보냈다고 한다.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속에서 세아는 어떻게 지냈을까. 몇 번이나 자신을 향해 웃어 주었을까. 어떤 추억을 함께 만들었을까.

그렇게 어둠.

지나간 생은 텅 빈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

“누나.”

이준이 숨을 토하듯 그녀를 불렀다. 만약 세아가 죽고 세상이 다시 시작된다면, 그는 이 시간도 잊을 것이다. 쓰러지던 세아의 몸을 받아 낸 순간의 경악도, 치유된 채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며 느낀 고통과 안도도 잊을 것이다.

“제발 날 이 세상에 버리고 가지 말아요.”

세아는 이준의 숙인 머리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이준은 쓰라린 통증을 느끼며 그녀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다음 생에서는 이마저도 잊게 될 것이다.

“알겠어.”

세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물에 뜬 나뭇잎을 건지듯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스러워도 파문은 이는 법이어서 이준은 그녀가 거짓말을 했음을 알아차렸다. 이 거짓말이 세아의 위로임을 아는 이준은 모르는 척 다시 속았다.

13.104

이준이 나간 후 세아는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확인했다. 포털 사이트 메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쓰러지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도 몇 장 걸려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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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가 노린 게 정확히 이것이었다. 자신에게 독을 먹인 게 누구인지는 알아내기 어렵다. 협회에서 보낸 사람일 수도 있고 그냥 악의를 가진 일반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협회가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뿐이다.

시선을 끌어 혜진이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왔고, 협회의 손발까지 묶었다. 원하는 대로 됐는데 기분이 썩 개운치 않았다.

‘제발 날 이 세상에 버리고 가지 말아요.’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자신이 죽으면 세상이 바로 다시 시작된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일정 시점까지 세상은 계속 유지된다. 이대로 자신이 죽으면, 이준이나 카일리, 리웨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부모님이나 올리버는?

되도록 이번 생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싶긴 했다. 자신을 위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압도적인 힘으로 목표를 향해 돌진하면 된다 여겼는데, 생을 거듭할수록 그게 쉬운 일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세아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취침등까지 다 끄고 아늑한 어둠에 잠기려는데, 계속 이준의 얼굴이 떠올라 피로했다. 그녀는 한참을 뒤척이며 이준 생각을 떨쳐 버려야 했다.

13.105

세아는 혜진 쪽으로 차를 보내고 싶었지만, 이목을 끌까 봐 그러지 않았다. 다행히 혜진은 아무 위험 없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만났던 서울 외곽의 널찍한 카페였다.

“저번에 여기 브런치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서요.”

세아는 웃으면서 그렇게 인사했다. 혜진은 세아 맞은편에 앉으며 이번에도 모든 테이블에 ‘예약’ 표시가 올라가 있는 걸 보았다. 이번에 세아는 혼자였고, 혜진은 왜 오늘은 이준과 같이 오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혜진은 갈색 가죽 가방에 챙겨 온 종이 뭉치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때마침 직원이 브런치 그릇을 내려놓고 가서, 둘은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혜진은 종이를 넘겨 보는 세아를 보며 설명했다.

“확인해 보면 아실 텐데, 정확히 기억에 대한 던전은 아니에요. 몬스터가 나오고 트랩이 있는 평범한 던전도 아니고요.”

“이름이 특이하네요. 소원 던전?”

“거기 시간과 공간을 주무르는 몬스터가 있다고 해요.”

세아는 따뜻한 장미차를 마시며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남태평양의 섬 어딘가에 소원 던전이 있다. 사람의 눈으로는 찾을 수 없고, ‘안내자’를 만나 뒤를 따라가야 한다. 소원 던전은 1인 던전으로 파티원을 데려갈 수 없으며, 한 번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던전을 다시 이용할 수 없다.

던전 깊은 곳에 모습이 시시때때로 바뀌는 몬스터가 살고 있는데, 그 몬스터는 대가를 받고 소원을 이루어 준다.]

“대가를 받고…….”

세아는 그 부분을 보며 혼잣말로 되뇌었다. 혜진은 뭐라고 더 설명하려는 듯하더니, 세아가 읽는 게 낫다고 여긴 듯 입을 다물었다. 세아는 쭉쭉 글자를 읽어 나갔다.

[최초 발견은 1년 전, 여행 중이던 헌터가 우연히 소원 던전에 입장했다. 그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는 모르지만 대가로 두 다리와 한쪽 팔을 바쳐야 했다. 던전 밖으로 내팽개쳐진 그는 한 팔로 소속 협회에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고, 협회가 그를 구출했을 때는 빈사 상태였다.

이후 협회에서는 이 정보를 비밀스럽게 공유하며 다른 헌터를 보내 던전을 조사하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 던전 입구조차 발견하지 못했고, 조사도 흐지부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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