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83화 (83/112)

83화.

혜진은 읽으나마나한 조사 결과를 뒤적이는 세아를 보다 말을 시작했다.

“기억이나 시간과 관련된 던전을 찾아봤는데, 그건 대부분 기억하고 있는 과거를 체험하게 하는 형태였어요. 세아 씨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서 범위를 좀 넓혔더니 소원 던전이 있더라고요. 다만…….”

“대가를 바쳐야 한다는 게 좀 맘에 걸리죠.”

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다리 두 개와 팔 하나를 바쳤다니, 대체 무슨 소원을 빌었기에 그런 대가를 치러야 했을까. 그 헌터에 대한 정보는 폐기되었는지 찾을 수 없었다.

“고마워요. 이런 정보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S급 헌터조차 몰랐던 소원 던전의 정보다. 왜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 왜 협회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달라고 부탁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세아의 인사를 받은 혜진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다음 살며시 말을 돌렸다.

“다친 건 괜찮아요?”

“아, 팬 미팅에서. 그거 괜찮아요. 정이준은 괜찮은 힐러거든요. 몸이 너무 멀쩡해서 다친 줄도 모르겠다니까요.”

다행이라며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무어라 말할 게 있는 듯 머뭇거리다가, 이내 말을 아끼고 스프만 몇 스푼 떠먹었다. 세아도 굳이 재촉하지 않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쩌면 소원 던전에 대한 충고를 해 줄지도 모른다. 아니면 길드에서 확보한 새로운 정보라든지, 협회에 대한 소문일지도 모르고.

다음 순간, 혜진이 낯선 말을 꺼냈다.

“저도 팬 미팅 가고 싶었는데.”

“…….”

세아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팬 미팅에 오고 싶었다니, 누가, 혜진이?

“그런데 팬 미팅 하는 시간에 협회 서버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참았어요.”

“그…… 그러셨구나.”

세아가 어색하게 대답하며 괜히 자기 머리를 쓸었다. 예상도 못 한 소리를 던져 놓고 태연하게 베이컨을 먹는 혜진을 보다, 세아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장난처럼 물었다.

“팬클럽도 가입하지 그래요? 몇 년 만에 2기 모집한다던데.”

“저 1기예요.”

더없이 차분한 대답에 세아는 두 번째로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소리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세아는 마른침만 삼키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제안했다.

“사인해 줄까요?”

“네.”

혜진은 마치 그 말을 기다린 사람처럼 가방에서 세아의 화보집을 두 권이나 꺼냈다. 팬들끼리 기사 사진을 모아 만든 화보집이었다. 한 권은 투명한 포장지조차 뜯지 않았고, 한 권은 여러 번 펼쳐본 듯 너덜너덜했다.

“두 권에 다 해 주세요.”

세아는 늘 가지고 다니는 펜을 꺼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안고 두 번 사인했다. 지금까지 몇 번을 따로 만났는데, 진작 얘기하지 않고…….

그때, 화보집 표지 아래 적힌 작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조용하고 행복한 덕질하여 세아를 이롭게 하자.]

‘세세’ 활동 목표였다.

어쩐지 낯이 뜨거워져서 세아는 후다닥 사인을 마쳤다. 그래도 혜진이 만족한 듯 화보집을 다시 챙기는 걸 보고서는 뭐 어떠냐 싶은 기분이 돼 버려서, 세아도 그냥 웃고 말았다.

13.106

혜진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니, 올리버가 세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속 아이템을 연구해야 한다며 몇날 며칠을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더니 마침내 성과가 좀 있는 모양이었다.

널찍한 거실에 혼자 앉아 있던 올리버가 세아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그는 손에 귀속 아이템을 꼭 쥐고 있었다. 비 맞은 개처럼 지친 낯이었는데, 어린애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세아.”

올리버가 짧게 세아를 부르며 도도도 달려와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유독 세아를 잘 따르긴 하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안겨드는 일은 드물었다. 세아는 일단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가볍게 슥슥 쓸어 주었다.

“올리버, 왜 그래?”

“이상해.”

“뭐가, 그 아이템이?”

“응.”

올리버는 세아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작게 대답했다. 세아는 눈동자를 굴려 올리버의 손에 들린 공 모양 아이템을 확인했다. 저건 분명 이준의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올리버가 왜 이렇게까지 동요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세아는 재촉하는 대신 올리버의 머리와 어깨를 다독이며 그대로 머물렀다. 올리버는 똑똑한 소년이지만 갇혀 지낸 탓에 자극에 취약하고 경계가 심했다. 급한 일도 아닌데 빨리 말하라며 다그칠 이유가 없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올리버는 빼꼼 고개를 들었다. 목을 꺾어 세아를 올려다보던 그가 조용히 팔을 풀고 물러났다. 자기 나름대로 진정이 된 듯했다. 올리버는 한참 귀속 아이템을 만지작거리다가 그걸 세아 쪽으로 내밀었다.

“잘 봐, 세아.”

올리버가 아이템을 검지로 톡톡 두 번 두드리며 발동어를 외쳤다.

“아이템 조회!”

아무 소리도 없이 아이템 위로 작은 창이 떠올랐다. 창은 희끄무레하게 빛나며 두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올리버는 세아가 잘 볼 수 있도록 아이템을 손에 올려놓은 채로 설명을 시작했다.

“저번에 구해다 준 재료로 이 아이템을 활성화했어. 이제 제작자 정보나 아이템의 상세 속성 같은 걸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여기를 봐봐.”

올리버가 반투명한 시스템 창의 한 지점을 콕 찍었다. 세아의 눈동자가 휙 그쪽으로 움직였다.

[제작자: 올리버]

세아는 잠시 입술이 붙은 양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죽은 후, 세상은 계속 이어졌고 이준도 이어 살아갔다. 그 후 10년, 이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그의 과거에 올리버의 이름마저 등장하다니.

“올리버.”

세아는 소년을 안정시키기 위해 부러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거실 소파에 앉아 올리버와 시선을 맞추니 그가 세아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많이 놀랐지? 그래도 중요한 건 지금이야. 지금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거.”

전에 시스템 던전에 데려가지 않겠다며 올리버에게 되는대로 내뱉었다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한다. 그래서 세아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번 생이 그녀에게 알려 준 것이었다.

올리버는 흔들리는 눈으로 세아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무서워.”

“그래, 이해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귀속되는 아이템을 만들다니……. 내 재능이 너무 두려워.”

“……응?”

세아는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게 되물었다. 올리버는 아이템을 쥔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이 아이템의 원래 용도가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내가 이런 걸 만들었어. 놀랍지 않아, 세아?”

“어, 그래……. 참 놀랍네.”

올리버는 세아의 예상과는 달리 자기의 재능에 겁을 먹은 것이었다.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 듯 경이에 찬 소년의 표정을 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그냥 픽 웃어 버렸다. 진짜 S급들 다 정상 아니라니까.

세아는 고개를 털며 일어섰고 올리버는 아이템을 마저 연구하겠다며 등을 돌렸다.

긴 숨을 내쉬고 혼자 거실에 앉아 있으니 휴식은 끝이라는 게 실감났다. 이제 이준의 정화 스킬 강화를 위해 바쁘게 움직일 시간이었다.

‘히든 퀘스트 클리어도 멀지 않았어.’

희미한 쾌감과 희열이 배 속에서부터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이 잘못된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 놓을 날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다.

9장. 타인의 기억

13.107

비행기를 타고 남태평양으로 날아가는 동안 세아는 조금 들뜬 채였다.

카일리와 리웨이도 알게 모르게 신이 난 듯 보였다. 오래 쉬며 스킬도 강화하고 개인적인 일도 해결했으니, 새로운 목적을 향해 가는 게 더욱 가뿐한 듯했다.

그러나 이준의 태도는 기묘했다. 소원 던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던 그는 이렇다 할 의견을 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세아는 그가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가 보다 짐작했을 뿐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가 뭐라고 하든, 세아는 목적을 향해 갈 것이고 이준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눈물로 이번 생을 버리지 말라 애원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섬에 도착한 후 카일리가 탄성을 터뜨렸다.

“와, 바다!”

비행기에서 내려 가까운 곳에서 바라본 바다는 정말 눈이 부시도록 맑고 깨끗했다. 관광지로도 이용되지 않는 외딴 섬이라 전용기가 없으면 올 수도 없는 곳인 만큼, 비닐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모래사장 쪽으로 다가가면 투명한 파랑이 잔잔하게 밀려오고, 모래는 햇빛 아래서 순금처럼 반짝거렸다. 물 위에도 별이 가득 떠서 손을 뻗으면 빛을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카일리를 보며 리웨이는 짤막하게 의견을 표했다.

“난 산이 더 좋아.”

그래도 리웨이 역시 기분 좋은 얼굴로 신발까지 벗고 모래사장으로 들어갔다. 모래는 적당히 따뜻해서 맨발로 걷기에도 좋았다. 카일리와 리웨이가 뜬금없는 바다 나들이를 할 때, 세아와 이준은 한쪽에 떨어져 서 있었다.

지난번 호텔에서의 대화 이후 둘 사이는 조금 서먹해졌다. 둘 다 아무 일도 없는 척했지만, 숨길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세아는 그걸 애써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누나.”

이준이 바다를 보는 척하는 세아를 불렀다. 파도처럼 귀를 간지럽히는 다정한 음성이어서, 세아는 그가 먼저 굽히려는 걸 알았다.

“그 던전에는 내가 들어가야겠죠?”

“내가 들어갈까 싶어. 가서 히든 퀘스트를 없애 달라거나 클리어 상태로 바꿔 달라고 말해 봐도 되고.”

뜻밖의 대답에 이준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그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물었다.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가서 들어 보고 결정하면 되지.”

“대가가 영원한 죽음이라고 해도, 누나는 그걸 받아들일 건가요?”

“…….”

세아는 고개를 틀어 이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느냐고 되묻는 방법도 있었다. 그렇게 유연하게 답을 미루고 이준을 속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준의 불안감을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여 세아는 정직한 답을 택했다.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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