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회귀를 끝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반복해 살고 변화를 경험하며 세상에 더 깊이 뿌리내린 듯한 느낌이었다.
세아는 멀지 않은 곳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물장난을 치는 카일리와 리웨이를 바라보았고, 또 이준을 돌아보았고, 부모님과 올리버와 혜진도 생각했다.
이왕이면 모두와 함께 계속 살고 싶다. 언제부터 이런 바람을 품게 되었나.
“누나는 진짜 나빠요.”
이준이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세아는 그의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면 무척 부드러울 것 같다. 나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한가한 생각만 스쳤다.
“내가 무서워하는 거 알면서, 말로라도 아니라고 해 줄 수 있잖아요.”
“거짓말인 거 눈치채잖아.”
“그래도 누나한테 속을 거예요.”
그게 어떤 심정인지 세아는 모른다. 이제껏 배신한 사람, 속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망설임 없이 죽이거나 배제해 왔으니까. 알고도 속아 버리는 서글픈 나태란 대체 뭘까? 오래 살았는데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이준아, 난 내 목적이 제일 중요해.”
세아는 불쑥 내뱉은 후 스스로 그 말을 곱씹었다.
사람들은 세아가 헌터로서의 윤리와 원칙을 지키며 공공의 안전을 위해 헌신한다고 생각한다. 미각성자가 시비를 걸어도 반격하지 않았다는 미담은 거의 전설 수준이다. 그러나 세아는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건 절대 바뀌지 않아. 네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내가 사라진 세계에서 혼자 살아가는 게 싫다고 해도, 이건 어쩔 수 없어. 난 내가 제일 중요하니까.”
이준은 바다처럼 잔잔하게 글썽이는 얼굴로 세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준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모든 슬픔과 그리움이 우묵하게 고인 눈에 세아를 담을 뿐이었다.
“나랑 잘 맞네요, 누나. 나도 누나가 제일 중요하거든요.”
이준은 애써 웃었다. 그의 눈가가 떨리는 게 보였지만 세아는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이준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세아의 어깨 너머에 있는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저러나 세아 역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우거진 숲밖에 없었다.
“왜 그래?”
“저거 안 보여요, 누나?”
그렇게 묻는 이준의 목소리는 무척 조용했다. 마치 웅크린 작은 동물을 놀라게 할까 염려하듯이.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세아는 일단 카일리와 리웨이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그럴 틈도 없이 이준이 세아의 팔을 짧게 잡았다가 놓으며 신호를 주었다.
“어디로 가고 있어요……. 저게 ‘안내자’일 거예요, 지금 따라가요!”
그렇게 말한 이준은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안내자’라는 말에 세아도 주저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이준이 뭘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와 함께 소원 던전으로 가야 할 때였다.
13.180
“헉, 헉…….”
고속 이동 스킬을 사용하고 전속력으로 달렸는데도 안내자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30분 가까이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으니 제아무리 S급이라도 기운을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눈에도 안 보이는 것을 쫓아 달리려니 결승선 없이 뛰는 마라토너가 된 기분이었다.
앞장서서 달리던 이준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러더니 세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라졌어요. 갑자기 무슨 연기처럼…….”
“다행이다, 더는 못 뛸 것 같았거든.”
세아는 찐득하게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맥없이 멈춰 섰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버거웠다. 그녀는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몸을 구부린 채 숨을 골랐다. 둥글게 말린 등이 바쁘게 오르내리고 긴 머리카락은 뺨에 달라붙으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 진짜 성가시게 하네.”
짜증스럽게 중얼거린 그녀가 몸을 쭉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신없이 뛰는 사이에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숲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길을 찾아 되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지만 여기까지 와서 허탕 친 게 아쉽긴 했다.
한 손을 허리에 대고 서 있자니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서서히 식으며 땀이 날아갔다.
이렇게 심하게 달린 건 오랜만이다. 스킬의 위력이 워낙 뛰어나니 적을 단숨에 처리해 헐레벌떡 뛸 일이 없었다. 또 S급이 된 후로 체력도 훨씬 좋아졌으니, 전투하며 웬만큼 움직여도 목이 아프도록 숨이 차진 않았다. 이준의 도움을 받아 보이지 않는 안내자를 공격해서 죽일 순 있었겠지만 그랬다간 일을 망쳐 버렸을 것이다.
세아는 축축한 이마를 닦으며 무의미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나.”
주위를 둘러보겠다며 걸어갔던 이준이 돌아오며 세아를 불렀다. 큰 기대 없이 돌아보았는데 그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세아는 몸이 회복되는 걸 느끼면서 “왜?”하고 되물었다.
“찾은 것 같아요.”
안내자도 놓쳐 버렸는데 소원 던전을 찾았다니? 세아는 반신반의하며 이준의 뒤를 따라 나아갔다.
정글처럼 무성하게 자란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니, 멀지 않은 곳에 아가리를 벌린 동굴이 보였다. 그제야 이준이 왜 자신 없는 투로 찾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일반적인 던전 입구는 덩그러니 솟은 문인데, 이건 동굴이다. 세아조차도 이게 던전인지 자연 동굴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내자는 두 사람을 이리로 데려왔다…….
세아는 잠시 생각하다 고갯짓을 했다.
“가 보자. 뭐, 아니면 다시 나오면 되잖아.”
세아가 먼저 성큼 걸음을 옮겼다.
인공적인 빛이 전혀 없는 동굴은 무서울 정도로 캄캄했다. 바깥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서늘한 공기가 목덜미를 쓰니, 괜히 오싹했다. 세아는 손을 휘둘러 만든 빛 덩어리로 앞을 밝혔다.
한 발 나아갈 때마다 발소리가 울렸다. 텅, 텅, 소리는 가장 깊은 곳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듯 멀고 희미했다. 통로는 무척 좁아서 두 사람이 나란히 서면 옆에 여유가 없었다.
이 벽이 갑자기 움직이진 않겠지, 자연이 만든 예술품처럼 보이는 돌벽을 바라보며 세아는 공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준과 대화라도 하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 고개를 돌리자 마침 세아를 보고 있던 그와 곧장 눈이 마주쳤다.
이준의 눈동자가 세아의 표정을 살피듯 짧게 움직였다. 이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누나, 괜찮을 거예요. 아직 대가가 뭔지도 모르잖아요.”
그의 말을 들은 후에야 세아는 자기가 바짝 긴장한 채로 걷고 있음을 깨달았다. 단순히 어두워서는 아니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곧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듯 섬뜩한 기분. 그녀의 모든 감이 당장 발을 돌려 여기서 도망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응.”
짤막하게 대답하며 자기 감을 짓누르고, 세아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혼자 걷는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근데 이상하긴 하다.”
세아가 불쑥 던진 말에 이준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뭐가 이상하냐고 되묻기도 전에, 세아는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듯한 팔을 쓸며 중얼거렸다.
“분명히 1인 던전이라고 했는데 우리 둘이 들어와 있잖아.”
“소원을 한 사람만 빌 수 있다는 뜻은 아닐까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던 것 같아. 뭐, 가다 보면 알겠지. 그거 때문에 이렇게 느낌이 이상한가?”
차라리 몬스터라도 나오면 좀 나을 텐데, 무덤으로 들어가는 느낌에 자꾸 진저리가 쳐졌다. 왜 이러지 싶어 괜히 목덜미를 쓸기도 여러 번이던 그때 이준이 허리를 굽히더니 바닥에서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이게 뭐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에 다가가 보니, 이준이 손에 든 건 아주 작은 껍데기였다. 겉면에 난 희고 검은 줄무늬를 본 세아가 대수롭지 않은 듯 뱉었다.
“해바라기 씨잖아.”
“여기 왜 이런 게 있을까요?”
“안에서 해바라기라도 기르나 보지.”
긴장감에 아무 말이나 던진 것뿐인데 이준은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작게 웃었다.
“계속 떨어져 있어요.”
둘은 헨젤과 그레텔처럼 해바라기 씨 껍데기를 따라 한참을 걸어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예고도 없이 공간이 확 넓어졌다. 고개를 들어 앞을 확인하니 마치 예식장처럼 커다란 공간이 보였다.
“인어 잡으러 갔을 때 같지 않아요?”
이준이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다 불쑥 물었다. 세아는 그제야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도 오래 헤엄치니 광장과도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네 말 들으니까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여기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서, 이준이 말을 꺼내기 전까진 두 공간을 전혀 연관 짓지 못했다. 눈에 띄는 건 하나뿐이었다. 멀지 않은 곳, 각진 공간의 중심에 산더미처럼 쌓인 해바라기 씨.
세아와 이준은 본능처럼 그리로 가까이 갔는데, 해바라기 씨는 세아의 키보다 높게 쌓여 있어서 꼭대기를 보기 위해 고개를 꺾듯이 들어 올려야 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더없이 발랄하고 쾌활한 음성이었다. 세아는 소리 낸 존재를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야, 여기!”
마침내 세아는 ‘소원을 들어주는 몬스터’를 발견했다.
무섭도록 쌓인 해바라기 씨 옆에, 사람처럼 주저앉아 있는 햄스터 한 마리.
몬스터를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세아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주위를 살폈다. 설마 저 작은 햄스터, 몬스터라고도 할 수 없을 듯한 게 소원을 들어주는 건 아니겠지. 심지어 배도 통통했다.
‘배 통통 햄스터라니…….’
“이리 와! 이거 먹어!”
해맑게 부르는 소리에 세아는 마지못한 듯 발을 뗐다. 이준은 설마 이게 전부일 거라고 여기지 않는 듯 사방을 살피며 한발 늦게 따라왔다.
가까이서 보니 몬스터는 정말 평범했다. 동글동글한 귀에 코는 앙증맞은 분홍빛이었다. 털이 복슬복슬 난 얼굴에는 흰자위가 거의 없는 새까만 눈이 씨앗처럼 콕콕 박혀 있었다. 털은 아주 엷은 갈색이었는데, 머리부터 꼬리까지 고동색 줄무늬가 죽죽 그어져 있어 다람쥐처럼 보이기도 했다.
분홍빛이 도는 앞발로 해바라기 씨를 야무지게 쥔 모습이 귀여웠다. 심지어 사람처럼 철푸덕 앉아 있는 자세라, 토실토실한 뱃살이 푸근하게 늘어져 있었다. 누군가 손으로 꾹 눌러 놓은 찐빵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