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85화 (85/112)

85화.

“어…… 안녕.”

세아는 어색하게 인사한 후, 결국 참지 못하고 검지를 내밀어 햄스터의 배를 콕 찔러 보았다. 햄스터는 투정하듯 포르르 고개를 털었다. 세아는 아주 잠깐, 동물을 기를까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들어오는 내내 안 좋은 일이 벌어질 듯한 느낌에 시달렸는데, 귀엽고 작은 동물을 보니 마음이 확 놓였다. 세아는 잠시 이준을 돌아본 후 질문했다.

“네가 소원을 들어줘?”

“응! 뭐든 빌어. 대신 대가도 잊지 마.”

햄스터는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해바라기 씨를 밀어 넣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세아는 잠깐 심호흡을 했다. 동굴 안은 어두웠고, 햄스터는 무언가 신비롭고 강력한 마법을 부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말은 해 봐야지, 세아는 주문했다.

세아는 또박또박 눌러 뱉었다.

“내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 상태로 바꾸거나 아예 없앨 수 있어?”

“당연히 안 되지.”

햄스터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또 고개를 털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귀 뒤를 긁적거렸다.

“그건 시스템의 영역이야. 내가 손댈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

근엄하고 엄격하게 말해도 귀여운 햄스터일 뿐이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 좌절되었는데도 세아는 갑자기 웃음이 났다. 해바라기 씨를 까먹는 햄스터에게 소원을 비는 이 상황이 너무 기가 막혔다. 여기 오는 내내 그렇게 긴장한 것도 우습긴 마찬가지였다.

“그럼 정이준의 ‘모든 시간을 되찾고’ 싶어. 이것도 퀘스트의 일부지만, 아예 클리어 상태로 바꿔 달라는 건 아니니 가능하겠지?”

‘모든 시간을 되찾는다’는 퀘스트 자체가 굉장히 모호하기 때문에, 세아는 햄스터에게 몇 마디 더 설명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햄스터는 바로 알아들은 듯 고개를 까딱거리며 답했다.

“스킬 강화 퀘스트가 요구하는 정이준의 시간은 한두 개가 아니야. 네 시간이 열세 개로 나뉜 것과 비슷하지. 대가도 잊지 마.”

세아와 이준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곧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가 뭔데?”

“일단, 이 세상은 멸망할 거야.”

“…….”

세아는 왜, 라고 따져 묻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세아가 질문을 생각하는 동안 햄스터는 새 해바라기 씨를 꺼내 입에 가득 집어넣었다. 세아는 참지 못하고 빈정거렸다.

“지구에 운석이라도 떨어지나 보지?”

“그냥 이 세상이 종료될 거야. 그리고 아마 다시 시작되겠지, 너 때문에 말이야.”

세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마 지난번에 세이브한 시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때 이후로 대단히 특별한 일은 없었다.

혜진을 만나 이준의 퀘스트에 대한 내용을 전했고, 쉬다가 올리버의 부탁을 받고 아이템 재료를 구하러 갔다. 팬 미팅을 하다가 김현호에게 경고를 전한 뒤 일부러 독을 마시고 쓰러져 시선을 끌었다. 올리버는 귀속 아이템의 제작자가 그 자신인 걸 알아냈고…….

사라지면 안 될 일은 별로 없었다. 어차피 세아가 소원 던전에 대해, 그리고 귀속 아이템의 제작자에 대해 다 알고 있으니까. 혜진을 고생시킬 필요도 없고 올리버가 애쓸 이유도 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딱 두 가지였다.

세상이 다시 시작되면 시스템은 또 미각성자의 몸에 들어가려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디선가 훼방을 놓든지. 그렇게 되면 다시 시스템을 찾아내 세상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처리해야 한다.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할까.

다른 한 가지는…….

“정이준이 기억을 되찾는 거지? 모든 기억을.”

“헷갈리는 것 같은데 ‘시간’이랑 ‘기억’은 완전히 달라.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하지만 뭐, 원한다면 기억도 찾을 수 있어. 그렇게 해 줄게.”

이준도 나름대로 계산을 마쳤다.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킬 강화 퀘스트를 마치고 싶었다. 정화 스킬을 빨리 강화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시간과 기억을 되찾으면, 그는 세아와 만나고 헤어졌던 그 모든 과정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둘 사이에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렇게 되면 세아는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확실한 색과 향을 지닌 운명이 될 것이다.

그때, 세아가 이준을 돌아보았다.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차피 세이브도 되어 있으니, 세상 멸망 정도는 별거 아니잖아.”

“좋아요.”

“아, 잠깐만. 아직 다 설명한 거 아닌데.”

햄스터가 조막만 한 앞발을 번쩍 들더니 두 사람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지나갈 거라서 고통이 심할 거야. 굳이 표현하자면…… 압사?”

“압사?”

되묻는 세아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소원을 빈 헌터가 한 팔과 두 다리를 잃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소원을 빌면 만만찮은 대가가 따라오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압사의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니. 게다가 정말 죽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고통이 금방 끝날 것 같지도 않았다.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데 옆에서 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잠깐, 잠깐, 잠깐.”

세아는 햄스터 쪽으로 손바닥을 보이며 제동을 걸었다. 다행히 이준의 대답이 튀어나가자마자 일이 실행되는 건 아닌지, 햄스터는 다시 해바라기 씨로 관심을 돌릴 뿐이었다.

“왜요, 누나?”

“잠깐 기다려 봐.”

세아는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준은 죽음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해 저렇게 태연할 수 있겠지만, 세아는 자기의 모든 죽음을 기억했다. 호텔 침대에 누워서 촛불이 꺼지듯 평화롭게 생을 다한 적도 있고, 머리가 씹혀 죽은 적도 있고, 칼에 찔려 죽은 적도 있다. 그 모든 죽음은 세아에게 흔적을 남겼다.

물론 세아는 모든 죽음의 충격을 이겨 냈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유쾌한 경험이 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반복된 죽음은 세아 안에서 무언가를 앗아갔다. 동생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우는 카일리에게 ‘네 동생 이미 죽었어.’ 라고 말할 때나, 파티원이 되고 싶다는 올리버에게 ‘넌 우리 파티 아니야.’ 라고 말할 때, 세아는 자기 안의 공동(空洞)을 느꼈다.

이준도 그렇게 되는 건가?

몇 번이고 마음을 거절당해도 다시 다가와 들꽃처럼 웃던 이준의 얼굴을 떠올린다. 원래 마음이 여린지 자기 앞에서만 약해지는 것인지, 눈물을 보이는 일도 잦은 그를 되새긴다. 세아는 그의 솔직함이 좋았고, 그의 연약함 속에서 포기를 모르는 강인함을 볼 때면 가슴이 울렸다. 망가지게 두고 싶지 않다.

“누나, 괜찮아요?”

세아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이준을 보다가 픽 웃었다. 이준이 아픈 사람을 보듯 자신을 살피는 게 느껴졌지만 그냥 웃음이 났다. 어쩐지 들어오는 내내 느낌이 안 좋더라니.

세아는 이준에게 답하는 대신 햄스터에게 물었다.

“대가를 다른 사람이 대신 치를 수도 있어?”

“가능하지. 너희 둘의 퀘스트는 사실상 연결되어 있으니까. 여기 함께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고.”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 와서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세아는 쉽게 대답했다.

“그럼 내가 대신 치를게.”

“누나!”

이준이 경악한 얼굴로 세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세아는 그에게 말할 틈을 주는 대신 곧장 선언해 버렸다.

“내 소원은 정이준의 모든 시간과 기억을 되찾는 거야. 대가는 전부 내가 치르겠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건 무효야!”

이준이 햄스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햄스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 뒤를 박박 긁었다. 이준은 여전히 세아를 붙잡은 채로 강하게 주장했다.

“이건 내 퀘스트인데, 다른 사람이 대가를 치를 순 없어!”

“미안. 소원은 선착순이야.”

그 말과 함께 빛이 번쩍하더니 공중에 깊고 시커먼 균열이 일었다. 세아는 이준의 손에서 자기 팔을 잡아 뺐다. 매몰찬 몸짓과는 달리, 이준을 돌아보는 그녀의 표정은 드물게 다정스러웠다.

“난 괜찮아. 이미 여러 번 죽어 봤으니까.”

이미 겪어 본 사람이 낫지 않겠어?

덧붙이는 말과 함께 세아의 몸이 균열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의 육신을 흔적도 없이 삼킨 후, 균열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세아는 이준이 절규하듯 부르는 자기 이름을 듣지 못했다.

5.12

시스템 보스 던전에서 이준의 스크롤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그는 보스 몬스터에게 머리부터 씹혀 죽는 세아를 버려두고 홀로 탈출했다.

던전 안은 조명이 밝아도 어둑하게 느껴졌는데, 밖은 태양빛으로 눈이 부시게 환했다. 이준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세아를 죽게 했다는 데서 오는 슬픔이나 죄책감은 한 톨도 없었다.

‘이상하네.’

이준은 새하얀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그는 세아를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했다. 제대로 만난 첫 번째 S급 헌터였고, 그녀는 내내 자신에게 잘해 주었다. 함께 던전을 공략하며 목숨이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던전을 돌파하다가 지쳐서 쉴 때 세아는 늘 이준을 위해 주었다. B급 헌터인 그가 자신보다 훨씬 더 일찍 지치리라는 걸 아는 듯했다. 이준은 불을 피워 주고 음식을 챙겨 주는 세아를 보며 힘이 있어서 여유로워 보이는 건지 본래 성격이 그런지 남몰래 호기심을 품었다.

보스 룸 문을 앞에 두고 섰을 때까지만 해도 세아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가도 잘 부탁해요.’

세아가 그렇게 말했을 때도 조금 아쉬운 정도였다. 이대로 보스를 처리하고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지. S급 헌터의 지위가 사라진다 해도 세아는 어마어마한 갑부였다. 처음 몇 달은 관계가 유지될지 몰라도 친구가 되진 못할 것이다.

사는 세계가 너무 달라, 그냥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게 아쉬웠을 뿐이다.

‘이세아, 속박!’

그런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움직여 세아를 묶었다.

그때 이준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할 때와 똑같은 상태였다. 이렇다 할 ‘기분’이라는 게 전혀 없었다.

이준은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며 앞으로 다시는 세아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마음이 행동보다 한발 늦게 결승선에 들어온 듯, 뒤늦은 감정이 해일처럼 일어났다. 슬픈 듯도 했고 괴로운 듯도 했는데 사실 가장 강력하게 느껴지는 건 그게 아니었다.

‘왜 죽였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문.

연극배우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정해진 대사를 외우고, 순서가 끝나 무대에서 내려온 느낌. 관객을 등지고 무대를 떠나 불 꺼진 분장실에 홀로 선 듯 공허하고 캄캄했다. 이제 살아 갈 의미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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