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5.13
B급 헌터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
세아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괜찮은 차를 한 대 샀고, 시간이 나면 백화점으로 가서 쇼핑도 했다.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들과도 소식이 닿아 몇 차례 모임을 가졌다.
여자를 소개받아 데이트도 몇 번 했지만, 이준은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꼭 연애 문제만 그런 건 아니었다. 미각성자일 때 그토록 동경했던 헌터로서의 삶을 사는데도 즐겁지 않았다.
세아가 죽은 날 품은 의문은 그의 가슴 밑바닥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준은 자기 행동에 이유를 만들어 붙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싫었나?’
당연히 싫었다. 이제 겨우 헌터의 힘을 얻었는데 그러자마자 또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세아를 죽일 계획을 세웠던 건 아니다.
‘세아 씨랑 더 못 보게 될 게 아쉬웠나?’
하지만 누가 그런 게 아쉬워서 사람을 죽이겠는가. 게다가 이준은 세아를 속박하여 그녀의 사망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단순한 아쉬움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속박 스킬은 왜 사용했지?’
던전 공략 중, 새 스킬이 개방되었다는 시스템 창을 보기는 했다. 세아와 이야기하던 중이라 제대로 읽지 않고 창을 꺼 버렸고 그 뒤로도 스킬을 제대로 확인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마치 스킬의 존재를 진작 알고 있던 사람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속박 스킬을 사용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지자 좋지 않은 방향으로 튀어나갔다.
‘나 혹시 정신병 있나?’
가설을 세워 보면 이렇다. 자신은 사실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너무 싫어서 세아를 죽이려고 했다. 속박 스킬이 개방된 후 상세 내용을 확인하고 보스 룸에서 세아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세아를 살해한 후에는 죄의식 때문에 기억을 조작하고 해리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소리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 기이한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살인을 저질렀는데 이유를 모른다. 그는 쓰임이 다한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이 음습한 비밀은 서서히 이준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다. 불가해한 운명의 궤적 앞에서 정이준은 무력했다. 세상이 갑자기 사라진 S급 헌터 이세아에 대해 떠들어 댈 때마다 그는 들불처럼 번지는 의문을 가라앉히느라 진을 뺐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10년이 갔다. 세아가 살아 있었다면 서른아홉이 되었을 그 해, 어떤 전조도 없이 세상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었다.
6.9
이준이 던전 밖으로 나왔을 때는 해가 지기 시작한 저녁이었다. 그는 자기가 마지막으로 세아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
‘친구로는 싫어요.’
지금, 친구로는 싫어서 세아를 죽인 것인가?
세아를 속박하던 순간의 느낌은 지난 생과 똑같았다. 물론 이준은 지난 생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므로, 고민과 의문은 처음처럼 새롭고 생생한 고통을 안겼다.
지난 생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에 그는 세아와 함께하기를 꿈꾸었다는 것.
그는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죽인 채 홀로 남았다.
6.10
세상이 사라진 S급 헌터 이야기를 하느라 시끄러울 때, 이준은 작은 집에 처박혀 던전에서 일어난 일을 상세히 기록했다.
세아를 속박하던 순간의 기이한 느낌, 멋대로 움직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뱉은 입술, 죽어가는 세아를 보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순간, 그리고 던전 밖으로 나왔을 때 스위치라도 올린 듯 급작스럽게 밀어닥치던 자신의 감정.
자기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고 싶었다. 정말 간절히 알고 싶었다.
기록이 소용없기에 상담을 받았다. 정신과 약도 먹어 봤다. 협회와 길드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상세한 내막을 말하진 않고,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만 문의해 보았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리 길지도 않은 세아와의 추억 때문에 이준은 괴로웠다.
세아와 함께 백화점에 가서 옷을 고르던 날을 떠올릴 때면, 세아가 자신을 보고 미세하게 얼굴을 찌푸린 순간이 떠올랐다. 궁핍하게 자라 호화스러운 대접에 당황하고 또 위축될 때마다 세아는 목을 움츠리는 자라라도 본 듯 미간을 좁혔다.
싫어서라기보다는 보기에 불편해서인 듯했다.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면 그런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세아는 너그러운 후원자처럼 웃어 보였다. 이준은 굳이 그녀의 표정에 대해 말하지 않았었다.
카드를 주던 날, 스폰서 제안을 하는 거냐고 물으니 입을 딱 벌리던 세아도 생각났다. 그때 그녀는 드물게 바보처럼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기막힌 말을 들은 듯 입술을 찌그러뜨리는데, 처음으로 그녀가 평범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우린 파트너가 될 거예요. 그러니 내가 이준 씨를 안 믿으면 어쩌겠어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준 씨 편이에요.’
그런 말도 해 주었는데.
그녀는 이제 없다.
자신이 죽였으니까.
대체 왜?
6.11
내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10년을 보낸 건 아니다. 그는 세아를 잊었고, 그녀의 부재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정상적인 생활도 하지 못했다. 언제든 미친 짓을 하거나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불안이 이준을 짓눌렀다.
그 세상은 그렇게 끝났다.
7.2
던전 밖으로 나와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준은 멍하게 제 얼굴을 닦으며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세아는 자신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만나자마자 뺨을 맞았고,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할 때마다 다시 얻어맞았다. S급 헌터인 세아의 힘은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달랐다. 머리를 한 번 맞을 때마다 골이 징징 울리고 뇌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 뇌진탕 증상이 와서 걷다가 쓰러진 적도 있었다. 의식을 잃은 건 아니고 정말 길바닥에서 쾅 넘어졌다. 세상이 어지럽게 핑핑 돌아서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세아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의 팔을 잡아채 질질 끌고 갔다. 치료해 준 힐러가 눈치를 살피며 아무래도 머리를 맞아서 약한 뇌진탕 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세아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혀를 찼다.
‘각성도 시켰는데 너무 허약하네. 치료나 해 주세요.’
치료 후 몸은 정상 상태로 돌아왔지만, 그 뒤로는 세아의 눈만 봐도 다리가 얼어붙었다. 맞을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배신자를 보는 듯한 세아의 표정에 깜짝 놀란 탓이었다.
하지만 늘 그런 순간만 있었던 건 아니다. 샌프란시스코로 날아오는 비행기에서 잠든 세아의 얼굴을 바라봤을 때는 기이한 설렘을 느끼기도 했다. 비행기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부푼 감정 때문에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래 찾아 헤맨 이와 오래 엇갈린 끝에 재회한 듯 희미한 반가움마저 일었다.
물론 이준이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세아가 번쩍 눈을 떴다. 자다 깨서 기분이 나빴는지 아니면 이준의 얼굴만 보면 속이 뒤집히는지, 세아는 또 그를 때렸다.
시스템 보스 던전의 최종 보스 앞에서 세아는 이렇게 당부했다.
‘이 일만 끝내면 너랑 나랑 볼 일 없을 거니까 잘 해. 알았어?’
‘볼 일 없다고요?’
‘그럼 넌 나 또 보고 싶냐?’
그러게, 왜 보고 싶을까?
왜 이전에도 만났던 듯한 말도 안 되는 느낌까지 들까. 세아는 S급 헌터고 자신과는 사는 세상이 다르니 옷깃 한 번 스친 적 없을 텐데 왜 자주 만났던 사이처럼 익숙할까.
스톡홀름 증후군, 뭐 그런 건가. 사실 자신을 폭행한 세아를 극렬히 증오하는데 애정 어린 마음이라 착각한 건가. 그래서 그때…….
‘이세아, 속박!’
마지막에 정신을 차려 세아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일까. 너무 맞다 보니 머리가 이상해져 버린 건가.
이준은 던전 입구가 있는 공터에 속 빈 허수아비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다. 느리게 흘러내리던 눈물 위로 또 눈물이 떨어졌는데, 그러면 굵은 물방울이 턱까지 이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감정뿐이어서 이준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창백해졌다. 핏기가 가신 입술 끝을 눈물이 적셨다. 찝찌름한 맛이 났지만 남의 감각처럼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 눈을 비비니 속눈썹까지 젖어 버렸는지 시야가 흐리고 축축했다.
자신을 그토록 심하게 때린 세아가 죽었으니 기뻐하며 남은 삶이나 살러 가면 되는데, B급 헌터의 지위를 누리며 인생을 즐기러 가면 되는데, 왜 이러는 걸까. 힘겨운 싸움에서 허무하게 패배한 듯 공허하고 처참했다.
분명 자기의 삶인데, 이길 수 없는 운명에 조종당하는 노예가 된 듯한 구속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이준은 손등으로 젖은 뺨을 닦았다.
그 생에서도 정이준은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8.2
“왜?”
던전 밖으로 나와 이준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물었다. 물론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의 물음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세아가 재산의 절반을 떼어 주겠다고 했다.
달콤한 제안이기도 했지만 사실 이준은 세아와 계속 아는 사이로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세아를 처음 본 순간부터 무작정 그녀가 반갑고 좋았다. 오랫동안 그녀를 그리워했다는 미친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세아를 죽였다.
방금.
아니, 대체 왜? 자기 안에 살인 본능이라도 숨겨져 있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슬픔보다는 황당함이, 고통보다는 시끄러운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번에 이준은 상담도 받지 않고 정신과도 방문하지 않았다. B급 헌터로서 길드에 들어가 활동하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려 하고, 시스템 보스 던전에도 다시 가 보았다.
물론 그의 노력은 전부 실패에 그쳤다.
물거품처럼 그 세상도 사그라졌다.
9.2
다시 세아를 죽인 후, 이준은 전처럼 이유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자기가 이 문제에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움직였다. 이번에도 행운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