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10.2
세아와 한 달 넘게 함께 보낸 생이었다. 세아는 이준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지만 이준은 밖으로 나다니기보다는 세아 옆에 붙어 있었다. 세아는 배반의 쓰라림을 참고 기꺼이 이준과 어울려 주었다.
그리고 죽었다.
‘내가 누나를 죽였을 리가 없어.’
모든 일이 정리되면 세아에게 누나라고 불러도 되냐고 묻고 싶었다. 가까워진 후부터는 세아 씨, 하는 그 호칭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세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호칭에 대해 일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이준은 그녀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는데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안달하고, 세아는 왜 자신에게 존댓말을 쓸까 부질없이 고민하면서, 남몰래 누나라고 불러 왔다.
그런데 왜? 이 갈망은 거짓이 아닐진대 대체 왜?
이준은 자신의 정신이나 인품을 의심하는 대신 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시스템 보스 던전과 자신이 가진 정화 스킬의 상관관계를 알아냈다. 스킬 설명만 자세히 읽어 보고 신중하게 분석하면 되는 일이었으므로 거기까지는 쉬웠다. 이준은 몰랐지만 지나간 생에서도 여기까지는 제대로 도착했다.
하지만 이준이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왜 세아를 죽였는지, 세아를 속박하던 순간에 느낀 강력한 이질감은 뭔지. 그걸 알아내야만 했다.
몇 년이 지나도 새로운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협회와 길드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정확한 사정을 몰랐으므로 별다른 도움이 되어 주지 못했다. 게다가 이준은 B급 헌터였다, 별다른 영향력이 없는.
아마 혜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준은 또 그대로 세상 최후의 날과 조우했을 것이다.
10.3
“당신이 세아 씨를 죽였죠.”
혜진은 특유의 침착함과 차분함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이준을 추궁했다.
그때까지도 이준은 세상에 세아의 죽음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범죄자로 몰릴 게 분명하고, 구속이라도 되면 진실을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혜진이 나타나 세아의 죽음에 대해 밝히라고 요구한 순간, 이준은 안도했다. 은밀한 비밀과 궁금증을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게 되었음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세아 씨는 사라지기 전에 캘리포니아 행 비행기를 탔어요. 당신도 함께 입국했더군요. 그런 다음 한국으로 돌아와 계속 캘리포니아의 던전에 대한 정보와 조사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상하지 않은가요?”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어떤 거짓말을 해야 하나 궁리하느라 시간을 끈 건 아니다. 그저 세아의 실종을 조사하다 마침내 자기 앞에 다다른 사람을, 기쁨과 반가움에 차 바라보느라 그랬던 것뿐.
그러나 혜진은 침묵의 의도를 오해한 듯 좀 더 격양된 음성으로 다그쳤다.
“물론 그날 캘리포니아로 간 헌터가 한두 명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전부터 세아 씨와…….”
“맞아요.”
혜진의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이준이 대답했다. 그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입을 다문 혜진을 바라보며 부연했다.
“제가 세아 누나를 죽인 게 맞다고요.”
이준은 혜진이 자신에게 달려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출입 카드로 호텔 객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다. 반듯한 정장을 입고 차분하게 걸어 들어왔지만 표정과 몸짓에서 분노와 의문이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이 세아를 죽였다는 걸 알면 곧장 신고를 하거나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는데, 혜진의 얼굴은 귀신을 본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그녀는 넋을 놓은 듯 멍하게 이준을 바라보더니, 부축해 줄 틈도 없이 침대에 주저앉았다.
혜진은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애를 쓰고 있는 듯 보였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바닥만 멍하게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있었다.
“그러니까, 세아 씨는 정말 죽은 거군요. 어디로 사라진 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혜진이 번쩍 고개를 들고 이준을 노려보았다.
살인자의 얼굴이라기엔 너무나 고요하다. 비현실감마저 안기는 표정이었다.
혜진은 내내 세아의 실종에 의문을 품어 왔다. 세아는 세상에서 이길 사람이 없는 S급 헌터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는 건 말이 안 된다. 분명 종적을 감춰야 할 이유가 있어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겠지,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자 혜진의 짐작은 불안으로 바뀌었다. 돌아올 때가 지났는데 왜 나타나지 않을까. 개인 번호로 연락도 해 보았지만 핸드폰은 그때마다 꺼져 있었다. 그렇게 가진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세아의 뒤를 쫓다 도착한, 바로 이곳.
한 남자의 앞.
“왜죠? 왜 죽였죠? 아니, 당신이 어떻게 세아 씨를 죽였죠? 그래 봤자 B급 헌터일 뿐인데.”
슬라임에 갇혀 질식사할 뻔한 경험은 혜진에게 특별한 침착함과 차분함, 냉정함을 선사했다. 남몰래 동경하고 또 좋아해 온 세아의 죽음을 알고도 그녀는 앞뒤 이치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B급 헌터에 불과한 정이준이, 어떻게 이세아를 살해했는가?
이준은 혜진이 찾아온 게 더없이 반가웠다. 섣불리 흥분하지 않고, 살인자 앞에 있는데도 겁먹지 않고, 물을 것을 묻는다. 어쩌면 혜진은 제게 큰 도움이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저도 지금 그걸 알아내려 하고 있어요. 제가 왜 세아 누나를 죽였는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혜진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하려면, 또 그녀를 설득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이준은 상관없었다. 남는 게 시간뿐이었으니까.
“절 도와주시겠어요?”
10.4
이준이 한국 협회장과 만난 건 폭설이 쏟아진 날 아침이었다. 도로 상황이 최악이었지만 이준과 혜진, 김송숙 중 누구도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세 사람은 한국 협회장실에서 만났는데, 김송숙 협회장이 미리 손을 썼는지 안내실에조차 사람이 없었다.
“반갑습니다. 협회장 김송숙입니다.”
김송숙 협회장이 손을 내밀며 그렇게 인사했을 때, 이준은 그녀의 얼굴에 깃든 억센 의지와 추진력을 보았다. 혜진의 고요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김송숙은 장애물이 있으면 밟아 으깨며 지나가는 탱크나 불도저를 연상시켰다.
“김혜진 씨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시스템’ 속성 스킬을 가지고 있다죠. 우리는 몇 년 전부터 변종 몬스터와 이상 던전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협력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몬스터나 던전엔 관심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예, 들었습니다.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밝혀질 게 많으니 우리를 믿으십시오.”
이준은 몸을 살짝 뒤로 빼며 대답을 미루었다.
변종 몬스터, 이상 던전, 그는 그런 게 궁금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조사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자기 궁금증이 해결될지도 알 수 없었다. 혜진이 비장하게 연락하여 이리로 오라고 하기에 기대감에 부풀었는데, 이런 이야기나 들을 줄이야.
여차하면 거절하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협회장은 이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디자인의 은테 안경을 걸친 그는 마른 얼굴에 비해 너무 큰 안경을 써서인지 인상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인지 거북이처럼 고개가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김송숙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소개했다.
“곽남주 연구원입니다. 시스템 이상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냈죠. 물론 이 연구를 반기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 대외적으로는 다른 일을 하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않냐고, 이준이 항변하려는 순간 김송숙이 오른손을 들었다. 이준의 말을 막은 그녀는 곽남주 연구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라도 받은 듯, 곽남주 연구원이 기계처럼 말을 시작했다.
“일단, 몇 년 전부터 새로운 종류의 던전과 몬스터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던전과 몬스터의 속성은 ‘시스템’으로, 기존의 스킬이나 기술로는 정리할 수 없습니다. 정이준 헌터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우리는 세상에 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는 헌터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1,203건의 시약 테스트와 270번의 몬스터 임상 실험 결과 우리는 이들이 모두 오류, 혹은 일종의 ‘버그’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현재 이 버그를 정리할 수 있는 시스템 내 유일한 디버그는 정이준 헌터뿐입니다.”
이준이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던전 공략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런 지엽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정이준 헌터.”
김송숙은 이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그녀는 소파에 앉은 채로 팔꿈치를 허벅지에 대고 깍지 끼운 손에 턱을 올려놓았다. 표적을 응시하는 듯한 자세였다.
“혜진 씨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의도치 않게 이세아 헌터를 죽였다고 하더군요.”
“…….”
“이상하지 않습니까? 몇 년 전에 갑자기 나타난 버그 던전과 몬스터, 유일하게 시스템 속성 스킬을 지녀 ‘디버그’일 가능성이 있는 정이준 헌터, 그리고 이세아 헌터를 죽이던 순간의 이상한 느낌.”
서늘한 냉기가 이준의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차가워지며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김송숙은 이준의 충격을 위로하는 대신 무감한 어조로 덧붙였다.
“어쩌면 이세아 헌터가 ‘최초의 버그’고, 정이준 헌터는 ‘디버그’로서 시스템이 맡긴 임무를 수행한 것인지도 모르죠.”
말도 안 되는 비약이다. 시스템 던전이니 버그 몬스터니, 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 세아가 최초의 버그고 자신이 디버그라면, 세아를 죽이던 순간의 정체 모를 무력감은…….
이준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이세아 헌터를 속박해서 살해하도록 프로그램되었단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