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88화 (88/112)

88화.

“그건 지금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연구가 그렇게까지 진행되지는 않았으니까요. 정이준 헌터의 이상 행동은 앞으로 알아 가야 할 것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당장 대답을 해 줄 것처럼 추측을 늘어놓던 김송숙은 고개를 뒤로 빼며 이준의 말을 부인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준과 혜진을 훑어보는 몸짓에서, 그녀가 지금 두 사람을 거의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무언가 공유하지 않은 정보가 더 있을 텐데 김송숙은 그쯤에서 인사를 건넸다.

“일단 새로 알아 낸 게 있거나 협조가 필요하면 두 분을 부르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혹시 저에게 따로 연락할 일이 있으면 그냥 협회 번호로 하시면 됩니다.”

“잠깐만요, 이게…….”

제대로 말해 준 것도 없으면서 이게 끝이냐고 묻기 위해 이준이 일어섰지만 이미 곽남주 연구원은 문을 열고 있었다. 그쪽으로 나가던 김송숙 협회장이 갑자기 벽이라도 만난 듯 우뚝 멈춰 섰다.

이준과 혜진이 동시에 문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김송숙은 밖에 선 남자를 보고 짤막하게 인사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두정아.”

“누님.”

손에 서류철을 가득 든 남자는 흘러내리려는 서류철을 읏챠, 하고 추어올리며 미소를 보였다.

“중요한 손님 만나고 계셨어요? 이거 급한 거라 갖다 드리려고요.”

김송숙은 일단 서류철을 훑어본 후 최두정에게 시선을 꽂았다.

“중요한 일이라 근처에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는데. 앞에서 계속 기다렸어?”

“아, 아뇨, 방금 왔는데요. 그리고 안내실에 아무도 없어서…… 그런 얘긴 못 들었습니다. 아, 엿듣진 않았어요!”

최두정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하듯 가벼운 어조로 덧붙인 후, 김송숙이 지나갈 수 있게 옆으로 비켜 주었다. 그는 길을 터 주며 보고할 자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김송숙은 이준과 혜진을 한 번 돌아본 후 곽남주를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협회장실에 둘만 남았을 때 이준은 혜진을 향해 물었다.

“둘이 잘 아는 사이라 소개해 준 거 아닙니까?”

“그런 거 아닌데요. 전 그냥 길드 사무직입니다. 길드랑 협회가 그리 사이좋은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자기가 왜 한국 협회장과 잘 아는 사이겠냐는 소리였다. 이준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질문을 거듭했다.

“버그니 디버그니 하는 얘기는 지금 여기서 처음 듣습니다. 협회장과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걸 알죠?”

“길드가 S급 헌터보다 더 많은 걸 알 때도 있어요. 헌터들은 화려한 인생 사느라 바쁘지만 길드는 그렇질 못하거든요. 그리고 길드랑은 별개로, 전 계속 세아 씨 실종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협회 자료의 도움도 좀 받았죠.”

‘협회 자료의 도움을 받았다’니, 서버를 해킹했단 소리로밖에 안 들렸다. 어쩌면 짐작보다 정보력이 뛰어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강 알겠다는 표시를 하고 다른 의문을 표했다.

“협회장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혜진은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사실 그녀도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어서, 이준에게 정확한 대답을 줄 수가 없었다.

“어쨌든 협회는 이 일에 대해 계속 연구해 왔어요. 버그 몬스터가 한국에만 유난히 많은 것도 이상하고……. 먼저 조사를 시작했으니 도움이 될 겁니다.”

“협회장이 우릴 안 믿는 기색이던데요.”

이준의 지적도 옳았다. 김송숙은 두 사람과 모든 정보를 나누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혜진은 상관없었다.

“저도 가만히 기다리진 않을 테니 괜찮아요. 당신도 나름대로 계속 움직이세요.”

협회장실 창문 밖에는 아직도 눈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백색의 탄피 같았다. 이준은 긴 여정이 되리라 직감했고, 자신이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10.5

이준과 혜진, 김송숙은 서로 연락을 지속하며 세아의 죽음과 이준의 스킬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어 나갔다. 염려와는 달리 김송숙은 다른 두 사람과 많은 사실을 공유했다. 여전히 한정된 정보만 제공했지만, 점차 둘을 신뢰하기 시작한 모습이었다.

이준은 곽남주 연구원과도 몇 차례 만났다. 그는 김송숙을 대신해 몇 차례 이준과 통화했는데, 목소리가 작고 소심했지만 그만큼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준의 상실에 깊은 이해를 보였다.

“저도 재앙 발발에 휩쓸려서 친구들을 다 잃었습니다. 저 아르바이트 하는 동안 친구들끼리 숙소 잡고 놀러 갔는데, 저는 끝나고 합류할 예정이었죠. 그런데…….”

운이 없었다. 하필이면 숙소 가까운 곳에 던전이 열렸고 친구들은 그대로 몬스터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학원 조교로 일하며 조는 학생을 깨우던 곽남주는 그 덕에 목숨을 건졌다.

“그래서 협회에 들어온 겁니다. 헌터가 되고 싶었지만 각성하지 않았거든요.”

“그랬군요.”

“정이준 헌터도…… 많은 걸 잃었죠?”

곽남주는 조심스럽게 그렇게 물었다. 이준은 부모님에 대해, 세아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다. 그저 짤막한 동의를 표했을 뿐.

사실 이준은 곽남주가 자신만 협회로 부른 중요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협회로 오라고 하기에 당연히 혜진도 여기 있을 줄 알았는데 혼자뿐이었다. 장소도 협회장실이 아니라 연구원 개인실이다. 분명 은밀하고 무거운 이야기가 나올 분위기였다.

“정이준 헌터.”

곽남주는 검지와 중지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그를 불렀다. 제대로 닦이지 않은 안경알 너머로 그의 눈이 진지하게 반짝였다.

“저는 이 시스템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렇게 사람들이 마구 죽어 나가서는 안 돼요. 헌터들이 아무리 발 빠르게 대처한다 해도, 돌발 던전이 나타날 때마다 희생자가 늘고 있지 않습니까.”

이준은 바로 동의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곽남주의 말을 듣기만 했다. 곽남주가 진짜 하려는 말은 이게 아닐 거라는 짐작이 섰다. 따로 불러 놓고 뻔한 소리만 늘어놓을 리 없다.

“정이준 헌터, 당신은 당신이 정말 ‘디버그’라고 생각하나요?”

“전 모릅니다.”

이준은 딱 잘라 답하며 자기의 생각을 감추었다. 희미하게, 자신이 세아를 속박하여 죽이도록 프로그래밍 되었다는 말에 동의하기는 했다. 물론 그런다고 세아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곽남주는 이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은 스킬이 있죠? 속박 스킬 말고.”

동요를 비치지 않기 위해 이준은 부러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비쩍 마른 연구원이 이미 많은 사실을 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버그 몬스터를 없앨 수 있다면, 분명 시스템 그 자체를 없앨 수도 있을 텐데요……. 사실 시스템 속성 몬스터와 시스템 자체의 상성은 똑같잖아요, 그렇죠?”

이준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세아의 히든 퀘스트에 대해, 정화 스킬에 대해 협회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시스템 정화 이야기는 숨기려 했는데, 협회와 곽남주가 생각보다 빨리 따라잡았다.

“시스템을 없앨 수만 있다면 우리 일이 훨씬 간단해집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시스템만 없어지면, 그리고 정이준 헌터가 그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죄송하지만 전 모르는 일입니다. 시스템을 없애다뇨, 그런 게 가능할까요? 게다가 우리 공동의 목표는 시스템을 없애는 게 아니라, 제가 왜 이세아 헌터를 살해했는지를 밝혀내는 겁니다.”

“다시 생각해 보세요, 결국 이세아 헌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존재도 시스템인데, 진짜 복수는…….”

“오해하셨네요, 연구원님.”

정이준은 그와의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일부러 사무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가까이 앉아 있는데도 몇 걸음 확 멀어진 느낌에 곽남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는 이세아 헌터의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만나고 싶을 뿐이다. 다시 만나, 운명을 바꾸고 싶을 뿐이다.

한 달 가까이 함께 지내는 동안 세아는 이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신의 히든 퀘스트에 대해, 그 내용에 대해, 페널티에 대해. 분위기를 잡고 앉아 하나하나 설명한 건 아니지만 분명 말과 말 사이에 단서가 있었다.

세아는 히든 퀘스트 클리어에 실패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했다. 거기까지 이야기하다가 무언가 찜찜한 듯 입을 다물어 버렸지만 이준은 분명히 알아들었다.

그때는 자신을 못 믿나 싶어서 서운한 마음뿐이었는데……. 어쩌면 못 믿을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곽남주가 이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아니, 생각해 보세요. 지금도 죽어가는 사람들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얼마 전에는 오지에서 던전이 열리는 바람에 봉사단이며 현지 어린애들 포함해서 스무 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뉴스 보실 거 아닙니까!”

“저도 마음 아프지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준은 곽남주의 손을 부드럽게 떨쳐내며 고개를 저었다. 재앙 발발 때 친구들이 전부 죽었다니 곽남주의 죄책감이 심한 건 알겠지만, 동정심 때문에 일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시스템 살해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해야 안전하다. 정화 스킬에 대해 알리면, 분명 협회 차원의 압박이 가해질 것이다.

곽남주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그 균열을 보며 이준은 잠시,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세아의 죽음에 매달리는 건 시스템에 조종당한 느낌이 싫어서일까, 세아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찌푸린 표정의 김송숙 협회장이었다.

“여기 있었군요. 둘이 만난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정이준 헌터, 당신과는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이야기가 끝났다면 잠깐 따라와요.”

곽남주 연구원 앞을 떠날 핑계가 생긴 상황이 반가웠다. 이준은 그에게 짧은 눈인사를 건넨 후 김송숙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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