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89화 (89/112)

89화.

협회장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김송숙은 한숨을 내쉬었다.

“곽남주 연구원이 뭐라고 했든 마음에 담아 둘 거 없습니다. 난 시스템을 없애는 일이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연구원님은 생각이 다른 것 같던데요.”

“같이 일하는 사람과 늘 생각이 똑같을 순 없죠. 곧 이해하게 될 겁니다, 이번 세상에서 시스템을 없애긴 어렵다는 걸 말이죠.”

‘이번 세상’. 김송숙이 의미심장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놓은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협회장실 앞 안내실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김송숙은 가벼운 묵례로 답하고 협회장실 문을 열었다.

이준은 말을 아끼며 자리에 앉았다. 김송숙이 무엇을 알고 있든 지금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공유할 때가 아니었다.

의외로 김송숙은 아무것도 캐묻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앞으로는 만나는 장소를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김혜진 씨에게도 따로 연락을 취해 뒀어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지금까진 계속 협회 건물에서 만났는데, 갑자기 장소를 바꾸자는 이유가 뭘까. 김송숙은 이준의 표정을 읽은 듯 안심시키는 말을 덧붙였다.

“큰 문제는 아니고, 그냥 협회 내부 사정입니다.”

“누가 우리 일을 못마땅해하는 모양이죠?”

“…….”

김송숙은 고개를 틀며 대답을 피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짧게 자른 머리며 칼 같은 정장 바지, 굳게 다문 입과 상대를 정면으로 쏘아보는 눈빛 때문에 늘 위풍당당한 인상이었던 그녀가 그 순간만큼은 평범한 중년으로 보였다.

“위험은 돈이 됩니다. 모두가 곽남주 연구원처럼 생각하진 않죠.”

“알겠습니다. 다른 곳에서 만나는 줄로 알고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이준은 일어나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아까 왜 ‘이번 세상’이라고 말했느냐고, 실제로 연구를 진행하는 곽남주도 모르는 걸 당신은 알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10.6

시간은 쉽게도 흘렀다.

최강의 S급 헌터 이세아가 사라졌지만 세상은 무너지지도 망가지지도 않았다. 공략하기 어려운 던전이 열릴 때마다 이세아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들은 실종된 헌터를 차차 잊어 갔다.

하지만 이준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몇 년 내내 김송숙, 곽남주, 김혜진과 협력하며 조사를 거듭했다. 조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모든 일이 손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김송숙 협회장 맞은편에 앉으며 이준이 툭 내뱉었다.

“또 미행이 붙었습니다.”

이런 일이 너무 잦아서 이제 새삼스럽게 소란을 떨기도 우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혜진도 똑같은 소리를 했다.

협회장과 헌터, 그리고 미각성자 사무직. 누가 가장 미행과 위험에 취약한가는 자명했다. 혜진은 목숨을 위협받는 통에 길드까지 그만둬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이준은 몇 달 사이 몰라보게 마른 혜진을 흘끗 살핀 후 김송숙에게 제안했다.

“차라리 문제가 되는 협회원을 정리하시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협회 내에도 내부 위원회가 있고 감사가 있어요. 협회장이라고 아무나 내보내거나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큰 문제는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이건 곽남주 연구원이 준 자룝니다.”

이준은 바로 자료를 들어 살펴보았다. 사실 너무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료는 아니었다.

결국 곽남주는 시스템 보스 던전이 시스템의 심장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실 심장이라기보다는 모든 신경이 모인 뇌와도 같았다. 그곳을 공략하여 무력화하면 시스템을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준은 눈동자를 움직여 다음 내용을 읽어 나갔다. ‘일정 구간의 시간 반복 가능성’이라는 소제목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 순간, 김송숙과 혜진의 대화가 집중을 깨뜨렸다.

“그런데 연구원님은 어디 있죠? 같이 오실 줄 알았는데.”

“죽었습니다.”

“네?”

이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부고를 전하는 김송숙의 표정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기 같았다. 장갑차를 연상시키는 단단한 겉가죽 너머에 어떤 감정이 감춰져 있는지 이준은 알지 못했다.

“연구실에서 작은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살해당한 건 아니고요?”

혜진은 더없이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김송숙은 혜진과 이준을 번갈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모두가 반기는 건 아닙니다. 곽남주 연구원도 이렇게 될 걸 예상했죠. 그래도 자료는 파기되지 않도록 잘 백업해 두었더군요. 우리는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혜진 씨도 길드에 따로 보호 요청을 하는 게 좋고요.”

그래도 몇 년 넘게 같이 일하던 사람이 죽었는데, 김송숙은 놀라울 정도로 동요가 없었다. 이준은 던전 때문에 죽어간 희생자들을 생각해 보라며 자기 손을 붙들고 호소하던 곽남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일단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김송숙은 이준의 손에서 종이 뭉치를 앗으며 주의를 환기했다. 왜 장례식에도 부르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던 이준은 말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긴 그 자리에 자신이나 혜진이 참석했다면 너무도 수상해 보였을 테니까.

“곽남주 연구원은 세상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말하자면 시간의 에너지가, 마치 구간 반복처럼 되풀이된다는 거죠. 측정한 결과 대략…… 8년에서 15년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확인하니 기분이 이상하군요.”

김송숙은 아주 일상적인 어조로 그런 소리를 했다. 이미 세아로부터 대강의 이야기를 들었던 이준은 세상의 구간 반복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혜진은 얼굴을 찡그리며 동요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죠? 세상이 반복되다뇨?”

혜진이라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지, 김송숙은 자료를 들고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이것저것 설명을 시작했다. 이준은 그들의 대화를 대강 흘려들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세상이 어떤 원리로, 어떤 이유로 반복되고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는 세아와 다시 만날 가능성에 대해, 그 세상에서 자신이 세아를 죽이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희망은 연약했다.

그러는 중에도 김송숙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혜진 씨도 이세아 헌터의 죽음을 파고든 겁니다. 정이준 헌터도 자기가 이세아 헌터를 죽인 게 정신 질환 때문은 아닐까 의심하는 대신 곧장 수수께끼를 파헤치기 시작했죠. 일단 우리 가정은 그렇습니다. 무의식이 배운다는 겁니다.”

혜진은 각종 통계와 서술 자료를 천천히 훑어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협회장은 그녀가 직접 검토하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이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 이 반복을 끝낼 열쇠는 이세아 헌터에게 있을 겁니다. 지금은 죽었지만, 다음엔 성공하도록 애써 볼 수 있겠죠.”

“어차피 다음 세상에서 우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뭘 애쓴다는 겁니까?”

“우리 중 누구도 천재가 아니니, 진짜 천재의 도움을 받아야죠.”

김송숙은 말을 명확하고 직선적으로 하는 편이었는데, 이번만은 모호했다. 이준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댔다.

“귀속 아이템을 만들 겁니다. 이 아이템의 용도를 먼저 설명하자면…….”

김송숙은 일정한 어조를 유지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요약하자면 아이템 하나를 이준에게 귀속시켜 시스템을 교란하자는 계획이었다. 그런 아이템을 어떻게 쉽게 만들 수 있겠느냐고 이준이 묻자, 김송숙은 단칼에 답했다.

“영국 협회에 요청해 놨습니다. 올리버 헌터가 우릴 도울 겁니다.”

“올리버요?”

혜진이 살피던 자료에서 눈을 떼며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무언가 안다는 어조라 이준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혜진은 자료를 아예 내려놓으며 설명했다.

“영국 협회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 천재잖아요? 벌써 10대 후반인데도 콧대가 높아서 아이작 협회장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아이작도 지금 상황은 잘 모릅니다. 그냥 정이준 헌터를 위한 맞춤 아이템 제작을 의뢰하고 대가를 지불했으니 그렇게 알고 행동하면 됩니다. 올리버 헌터에게 괜한 말을 할 필요는 없고요.”

뭔가 말하는 기색이 수상했다. 협회장 특유의 당당하고 거침없던 기세는 사라지고 어딘지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이준은 혜진의 얼굴을 살폈고, 그녀 역시 자신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음을 눈치챘다.

10.7

천재 제작 헌터가 아이템을 만든다기에 늦어도 몇 달이면 아이템을 받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동안 김송숙은 무척 바쁜 듯했으나 이준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혜진은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재촉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김송숙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올리버와 직접 만나게 될 겁니다.”

밖으로 나오지 않기로 유명한 헌터인데, 어떻게 설득했을까. 그러나 김송숙은 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 갑자기 혜진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

“시스템 보스 던전에 자꾸 출입하는 것 같던데요. 거기 무슨 용건이 있나요?”

혜진은 불편한 듯 자세를 바꾸더니 방어적인 투로 대꾸했다.

“저희 길드원들과 함께 갔습니다. 뭘 좀 알아보려고 했던 거고 문제는 없어요.”

“알고리즘 사람들도 문제네요. 무슨 생각으로 미각성자를 던전에 자꾸 데려가는지……. 정이준 헌터도 뻔히 알면서 그런 무모한 일에 동참하고.”

이준은 굳이 답하지 않고 헛기침만 뱉었다.

사실 두 사람은 시스템 보스 던전의 아이템과 던전 내부 연구를 하는 중이었다. 김송숙이 올리버 일로 바쁜 동안 둘도 이리저리 분주했다. 시스템 보스 던전 구석구석을 살펴보자는 아이디어를 낸 건 이준이었고, 길드의 도움을 받자고 제안한 건 혜진이었다.

못마땅한 표정의 김송숙을 보며 혜진이 설명했다.

“계속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순 없잖아요. 어쨌든 알아낸 게 있으니 다행이죠. 시스템 보스 던전에 서식하는 몬스터가 어떤 아이템을 주는지 보세요. 분명 올리버 헌터가 아이템을 제작할 때도 쓸모가 있을 겁니다. 시스템 자체에 귀속되는 아이템이에요. 시간이 아니라요.”

김송숙은 말 안 통하는 사람을 만난 듯 혜진을 바라보았으나 그 이상 타박하지는 않았다. 그들 셋은 고용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수는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