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91화 (91/112)

91화.

10.10

정이준은 침대에 누워 편안히 눈을 감았고 아늑한 종말이 그의 눈꺼풀을 덮었다. 그의 몸과 정신은 다시 태어나는 사람처럼 모든 일을 잊고 깨끗해졌다.

11.2

열한 번째 생, 그는 이세아의 손에 죽었다. 귀속 아이템이 작동할 틈도 없었다.

12.10

‘너에게 힘을 줄게.’

‘죽일 힘을.’

정이준은 귀속 아이템에 새겨진 자신의 마음을 들었고, S급 헌터로 각성했다. 스마일맨으로부터 세아를 구한 그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13.51

세뇌 상태에서 그는 다시 아이템 너머의 목소리를 들었다.

‘다시는 너를 빼앗기지 않을 거야.’

두 번 다시 이세아를 속박하지 않겠다는, 두 번 다시 시스템에 몸과 정신을 강탈당하지 않겠다는 과거의 다짐을 그는 잊었다.

‘다시는 누나를 잃지 않을 거야.’

그러나 상실의 고통은 잊지 않았다.

13.81

“정이준.”

세뇌당한 채 스스로의 이름을 부를 때도 정이준은 자기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몰랐다. 세뇌 스킬의 시전자를 코앞에 두고, 어떻게 거기 저항할 수 있는지 몰랐다.

“속박.”

어떤 힘이 이세아 대신 스스로를 묶게 했는지 몰랐다. 모르는데도 그는 이세아가 아닌 자기 자신을 묶었다. 그 자신이 바꾼 운명대로.

세아는 입술을 겹치며 속삭였다.

“내가 낫게 해 줄게.”

그녀가 그렇게 선언했기에 정이준은 깨어났다. 묵직하게 절그럭거리던 세뇌의 사슬이 해초처럼 하찮고 연약하게 풀어져 발밑으로 떨어졌다.

“세아 누나.”

웃으며 세아를 부를 때조차 그는 몰랐다.

“누나다.”

수 번의 시간을 건너 마침내, 그녀와 만났다는 사실을.

13.181

세아는 헉, 숨을 토하며 이준의 과거에서 빠져나왔다. 우물 밑에 처박혀 있다가 겨우 지상으로 올라온 듯 숨이 가빴다. 누가 머리채를 잡고 억지로 끄집어낸 듯한 느낌마저 들어 뒤통수가 얼얼했다. 오른손으로 자기 머리를 문지르며 세아가 옆을 돌아보았다.

“야, 진짜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간다고, 말하려 했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햄스터가 있는 소원 던전도 아니었다. 세아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뒤는 벽으로 막혔고, 양옆은 어떤 장식도 불빛도 없는 회색 벽이 가로막은 상태였다. 정면을 향해 끝없이 펼쳐진 길. 낯선 건물의 복도에 내던져진 듯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왔다.

‘압사랬지?’

세아는 두 벽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족히 10미터는 될 듯했다.

등 뒤는 막혔으니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세아는 조심스럽게 벽에 손을 댔다. 벽이 갑자기 움직이는 건 아니겠지? 각오하고 대가를 치르겠다고 했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제일 좋기는 했다.

세아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우르릉 소리와 함께 벽이 다가올까 싶어 망설였는데, 공간은 거대한 관처럼 적막했다.

‘빨리 가자.’

불안이 세아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자신이 얻은 정보를 정리했다.

자신이 죽은 후, 정이준은 계속 살아 갔다. 그는 몇 번의 생을 거듭한 후에야 세아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품고 조사를 시작했다. 거듭된 좌절,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혜진이라는 행운. 김송숙 협회장과도 손을 잡고 10년을 노력한 결과, 그는 마침내 귀속 아이템을 손에 넣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정이준은 S급 헌터가 되었다. 그때의 그는 세아를 속박하여 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아를 대신해서 죽었다. 마침내 시스템의 견고한 프로그램에서 벗어날 힘을, 진정으로 시스템을 죽일 힘을 얻었다.

시스템이 처음 미각성자의 몸을 입고 나타난 시점도 그쯤이었다. 이준에게 심은 디버그 프로그램이 망가지자 직접 개입할 필요를 느꼈으리라. 시스템의 계략은 성공했고, 서아정의 이간질 때문에 이세아는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런 다음 새롭게 시작된 세상에서…….

‘그래서 회귀 지점이 바뀌었던 거야.’

깨달음은 벼락같이 세아의 머리를 후려쳤다.

인터뷰장에서 눈을 뜨지 않고 호텔 객실에서 깨어났다. 인터뷰 하루 전, 그때의 이준은 이미 5년 전부터 S급 헌터였고 부모님까지 살아 계신 상태였다. 그때의 그는 원래의 정이준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S급 헌터로 각성한 후 그는 단 한 번도 세아를 배반하지 않았다. 결국 이준은 세아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동시에 바꾼 것이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을 죽이고 난 후 평범하게 살았겠거니 막연히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왜 던전 앞에서 사람을 죽이나 억울하고 화가 났는데 그는 정말로 프로그램된 디버그였다.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준이 자의로 자신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해 이유도 모르는 채로 오래 방황한 그를 동정해야 하나. 노력해서 인생을 바꾸다니 대견하다고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나.

확실한 건 단 하나,

지금 정이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바로 그때.

“어?”

세아의 입 밖으로 소리가 튀어나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서서 좌우를 번갈아 살폈다.

‘벽이 이렇게 가까웠나?’

통로가 아까보다 좀 좁아진 느낌이었다. 갑자기 식은땀이 솟아서 세아는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대가를 치르겠다고 약속했으니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지만,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자기 발소리가 칼 든 추격자처럼 뒤를 따라왔다. 소리가 울리는 공간은 아니었지만 혼자 달리니 스스로의 모든 기척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고속 이동 스킬을 사용했는데 뛰는 속도는 여전했다. 숨이 찰 때까지 끝없는 통로를 달리다가 세아는 문득 깨달았다.

스킬이 발동되지 않았다.

멈춘 후에 다시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몸과 다리가 가벼워지고 바람만큼이나 빨리 달릴 수 있을 듯한 고양감이 하나도 없었다. 달리다가 뛰어 봐도 도약하는 거리는 평범했다.

‘설마.’

중력 상쇄 스킬을 사용하고 뛰어도 몸은 허공에 뜨지 않았다. 무기를 만들어 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세아가 자랑하는 결계도 펼칠 수 없었다. 심장이 온몸에서 뛰는 듯 피가 빨리 돌았고, 속이 몹시 메스꺼웠다.

이 안에서 이세아는, S급 헌터가 아니라 평범한 미각성자였다. 아니, 세상이 각성자와 미각성자로 나뉘기도 전의 일반인에 불과했다.

세아는 상황을 알기 위해 한쪽 벽에 등을 대고 섰다. 발을 앞으로 밀어 가볍게 버텨 보니, 몸이 스르르 앞으로 밀려났다. 벽이 등을 밀고 있었다. 두 벽 사이는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좁아졌다.

본능이 세아를 달리게 했지만 소용없었다. 벽은 마치 발을 맞춰 진군하는 군대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가왔다. 점점 좁아지는 통로는 희망도 질식시켰다. 세아는 결국 자기가 이 대가를 피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그녀는 한쪽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섰다. 벽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앞으로 튀어나온 곳부터 차례로 눌릴 게 분명했다. 세아는 의미 없는 심호흡을 하면서 아직 팔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손을 들어 식은땀을 닦았다.

벽이 서서히 세아의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세아는 손바닥을 맞은편 벽에 대고 잠시 버텨 보았지만 괜한 저항이었다. 이제는 벽에 등을 붙이고 있는지 가슴과 뺨을 대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간격이 좁아졌다.

벽이 다가오는 속도는 처음처럼 답답하다 싶을 만큼 느렸다. 가죽과 살, 근육과 뼈가 차례대로 눌렸지만 처음에는 가벼운 압박감이 있을 뿐 큰 고통은 없었다. 세아는 허공의 좁은 틈을 보며 숨을 헐떡였다.

이렇게 답답하고 좁은 곳에 있으니 사고가 마비되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자꾸 결계를 발동해 보고 스킬 시동어를 외쳐 보았으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수천 번쯤 벽을 깨부수는 사이 틈은 더욱 비좁아졌다.

머리 아니면 가슴부터 고통을 느끼겠지 예상했는데, 고통이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곳은 의외로 폐부였다. 누가 폐를 눌러 터뜨리려 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속을 태우는 불덩어리를 삼키는 듯해 세아는 신음했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이러다가 목뼈 부러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심장이 터질 듯 뛰며 공포와 고통을 동시에 호소했다. 식은땀이 나서 온몸이 축축해졌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겁이 나는데 틈에 끼어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세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공포감이 나아지지 않자 다시 떴다. 시야로 들어오는 두 벽 사이가 좁아지는 속도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아까와 똑같았다. 세아의 몸이 끼어 있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코가 먼저 부러졌는데, 세아는 사람의 코가 생각보다 망가지기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을 견뎌 내겠다는 각오도 그만큼 쉽게 부러졌다. 세아는 무릎이 꺾이는 듯한 환각을 느끼며 자기 입에서 쏟아진 비명을 들었다.

턱과 턱관절이 동시에 망가졌고, 짓눌리던 어깨뼈도 빠져나갔다. 그런다고 감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어서, 척수를 타고 올라온 격통이 뇌를 태웠다. 손발톱이 깨지며 손끝 발끝에도 통증이 새겨졌다.

동시다발적인 통증을 하나씩 곱씹을 틈도 없이 갈비뼈가 부러졌다. 혼절도 허락되지 않았다. 세아는 맨정신으로 자기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고, 입에서 터진 피를 삼키기 위해 고개를 젖혀야 했다. 피가 목구멍으로 잘못 넘어갔는지 구역질이 났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살아 있을까. 이 공간이, ‘대가’가, 목구멍에 억지로 산소를 쑤셔 넣어 숨을 붙여 놓는 듯했다.

히든 퀘스트, 이준, 몬스터, 파티원, 시간, 던전, 시스템, 모든 게 하얗게 지워지다 끝내 사라져 버렸다.

세아 안에서 공포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 자리에 이제껏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끈질긴 고통이 들어찼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으나, 소리는 좁은 틈 사이에서 뭉개져 버렸다. 물론 피로 가득 찬 성대도 제 기능을 못 하게 되었으므로 머잖아 비명도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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