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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의 히든 퀘스트-92화 (92/112)

92화.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쏟아졌는데, 뺨을 적시는 게 눈물인지 피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몸부림조차 칠 수 없는 좁은 틈에서 세아는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무력했다. 태어나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좌절이었다.

바뀐 운명, 인간의 의지, 그런 건 죽음의 고통 앞에서 빛깔을 잃었다. 이준의 모든 시간을 되찾고 세아의 시간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벽 사이에 짓눌린 머리가 그대로 터져나갈 듯했다. 세아는 차라리 그걸 바랐으나, 눈이 먼저 압력에 졌다. 세상이 갑자기 붉게 젖었다가 캄캄해졌고, 쇼크로 죽어야 마땅한데도 목숨은 모질게 붙어 있었다. 몸의 모든 물과 피를 쏟도록 세아는 죽지 않았다.

생각, 감정,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존재하는 건 근육과 뼈와 살일 뿐, 그녀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 덩어리였고 신경이 똘똘 뭉친 살 뭉텅이였다.

벽 두 개가 틈 없이 맞붙은 후에야 세아의 숨이 멎었다. 그녀는 이미 으깨진 후에 또다시 죽었다.

13.182

허공에 열린 거대한 틈이 세아의 몸뚱이를 뱉어냈다. 마치 끈적한 침을 뱉듯 성의 없이. 허공에서 뚝 떨어져 소원 던전의 바닥에 처박힌 세아는 그대로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누나, 하고 이준이 부르기도 전에 폭주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빛 덩어리가 마치 폭탄처럼 날아가 던전 사방에 부딪혔다. 폭죽이 터지듯 펑, 펑 요란한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어둑하던 소원 던전이 폭격에 노출된 도시처럼 간헐적으로 밝아졌다 다시 어두워지기를 반복했고, 세아의 비명은 끝날 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누나!”

“으아아, 으아아아악!”

세아는 감싸는 이준의 팔을 뿌리치고 계속 힘을 방출했다. 이건 스킬도 무기도 아니었다. 그저 세아가 가진 힘 자체였다. 덩어리진 빛과 불과 바람이 벽은 물론이고 천장까지 튀어 올라 폭발하고 명멸하며 스러졌다.

“누나, 진정해요. 세아 누나!”

세아의 몸이 불타는 듯 뜨거웠다. 이준은 그녀의 체온이 위험한 수준으로 치솟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러다가 내장까지 모두 상해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각성자의 폭주는 드문 일은 아니지만, S급 각성자가 이렇게 힘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이준은 세아의 몸에 손을 대고 외쳤다.

“치유!”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세아는 비명을 지르고, 울고, 온몸을 떨고, 구역질을 하면서 자기의 모든 힘을 죽기 직전까지 방출했다. 쏟아지는 힘의 파편에 긁힌 이준의 뺨에서도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제 세아의 폭주는 일정한 패턴을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폭발은 벽에서만 일어났다, 마치 다가오는 벽을 부수려는 듯. 이준은 아득하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세아는 탈출할 수 없는 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폭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으로 땅바닥을 긁고 자기 머리를 찧으면서 발작했다. 시스템이 견고하게 지키는 던전마저 그녀의 힘에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일은 없겠지만, 세아의 힘을 이 안에 온전히 가둘 수도 없었다. 세아는 자기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몸부림쳤다.

이준이 알던 세아가 아니었다. 기억을 되찾은 걸 기뻐할 틈도 없었다. 세아는 정말 죽어 가고 있었다.

그때, 폭음을 뚫고 한가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킬은 소용없어. 완전히 망가져 버렸네.”

“이런 얘긴 없었잖아!”

이준이 악을 쓰듯 외쳤지만 햄스터는 해바라기 씨만 까먹을 뿐 대답이 없었다. 자기 책임은 없다는 듯한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지금 이준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누나.”

바닥에 엎드려 연약하게 웅크린 세아를 억지로 끌어 일으켰다. 치유 스킬도 소용없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이준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떠는 세아의 몸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꽃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이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곧장 쏟아졌다. 이준은 본능적으로 결계를 펼쳤으나, 그의 결계는 이세아의 공격을 무력화할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

첫 번째 불덩이와 부딪친 순간 결계에 금이 갔고, 두 번째 불덩이는 기어이 결계를 깨뜨렸다. 이준은 자해하려는 세아의 몸을 안고 제 등으로 공격을 받아 냈다. 터지는 소리와 함께 등에 엄청난 격통이 전해졌다.

“누나.”

이준은 두려웠다. 제 몸 아래 있는 세아의 얼굴을 보며 그는 아프고 무서워서 떨었다. 세아의 힘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녀가 지금 자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폭발이 너무 심했다. 폭탄 터질 때나 나는 굉음이 연속적으로 들리니 그대로 귀가 망가질 듯했다. 필사적으로 세아를 달래는 자기 목소리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벽에 부딪힌 힘의 구체가 조각조각 부서져 이준의 몸에 꽂혔다. 이준은 세아를 감싼 어깨에 유리 조각과도 같은 파편이 박혔다가 스르르 사라지는 걸 보았다. 세아의 힘은 눈부셨고 또 그만큼 강력했다.

“여길 공격하면 안 돼요. 누나, 지금 죽으면…….”

죽는다, 그 말을 입에 올리니 말문이 턱 막혔다. 세아는 정말 죽으려는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죽어 비명 지르는 시체로 돌아온 듯도 했다.

이준이 미처 막지 못한 조각이 세아의 뺨을 할퀴고 드러난 목에 박혔다. 그리 큰 조각이 아니어서 핏줄이 끊어지진 않았겠지만, 이준은 대경하여 그녀의 몸을 치유했다. 연속적으로 쏟아지는 공격 때문에 이준의 몸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무언가가 머리를 강타했다. 몸을 낮춘 상태로도 균형을 잃을 만큼 강한 충격에 귀에서 찢어지는 이명이 울렸다. 이준은 제 뺨을 타고 뜨끈하게 흘러내리는 피를 훔치며 마치 기도처럼 속삭였다.

“누나. 누나, 괜찮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갔어야 해.

쓰라린 후회가 이준의 머리를 마비시켰다. 그러나 세아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불필요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세아의 몸에서 엄청난 힘이 방출되고 있었기에, 안고 있는 행위조차 쉽지 않았다. 거대한 공기 덩어리가 이준의 몸을 퍽퍽 뚫고 지나가 벽에서 실제 폭발로 구현되었다. 힘을 그대로 받아 낸 이준의 입에서 울컥 핏덩이가 쏟아졌다.

세아의 육체는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어 버릴 듯했다.

“세아 누나.”

이준은 세아가 버둥거리다 자기 몸을 망가뜨리지 못하게 껴안았다. 세아는 그를 밀어내고 때리고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지만, 이준은 그녀의 체온이 점점 내려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땀에 젖은 세아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머리에서 흐른 피가 세아의 뺨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준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손을 떨며 그녀의 뺨을 닦았다. 이건 세아 혼자만의 싸움이었고 그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다.

“누나…….”

“소용없어, 아마 미쳤을 거야.”

이준은 햄스터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아의 등을 부드럽게 쓸며 호흡을 규칙적으로 가다듬으려 애썼다. 자신의 심장 부근에 고개를 묻은 세아가 안정될 수 있도록. 세아는 치명상을 입은 동물처럼 덜덜 떨었다.

폭발이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잦아들기 시작했다. 세아는 이준을 마주 안지 않았지만, 그의 품에서 계속 발버둥치지는 않았다. 수 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린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세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누나?”

세아는 마침내 그 목소리를 들었다.

정이준이다.

뿌연 풍경 속에서 그의 모습만 선명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창백해 보일 정도로 흰 얼굴, 그리고 뺨과 입가에 번진 붉은 피. 둔기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머리카락 사이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상황에 대한 정보는 아주 느리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진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세아의 시야로 불덩이가 가득 쏟아졌다. 명멸하는 별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세아는 눈에 보이는 모든 파괴와 폭발의 흔적이 자신 때문임을 느리게 인지했다.

만신창이어야 할 것 같은데 자신의 몸은 상한 데 없이 멀쩡했다. 이마가 조금 따끔거렸고, 피 냄새가 진하게 전해졌다. 나는 이만큼 피 흘리지 않은 것 같은데, 멍하게 생각하다가 이준을 자세히 살핀 후에야 판단이 섰다.

정이준이 다쳤다. 자신이 광역 공격을 마구 쏟아 부었기 때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벽을 부수고 싶었다. 나가고 싶었고,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통증이 모두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온 후에도 진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여러 번 죽어 봤으니 잘 견딜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해 놓고.’

펑, 펑― 숨 가쁘게 이어지던 소리가 잦아들며 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호수 끝으로 번져가는 둥근 파문처럼 소음도 서서히 기세를 줄이며 희미해졌다.

곧 폭발이 완전히 멎었다.

연기처럼 자욱한 고요 속에서 이준아, 하고 부르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준을 한참 쳐다만 보았다.

은하수처럼 젖은 눈이 애처로웠다. 늘 붉은 기가 맴돌던 입술에서 핏기가 가셔 얼굴이 더 하얗게 보였다. 오른쪽 어깨는 뭐에 맞았는지 찢어져 너덜너덜했고, 세아를 감싼 팔은 희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세아는 기운 없는 팔을 들어 이준의 어깨를 감싸려 했다. 아프겠다, 얘는 힐러면서 맨날 다치네, 그런 생각이 마비된 머릿속으로 서서히 파고들었다. 특별히 비통한 생각은 아니었는데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눈이 달아오르더니,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가 다시 맑아졌다.

“누나, 왜 그래요?”

이준은 피와 눈물 때문에 엉망이 된 얼굴로 세아를 들여다보다가, 그녀가 들어 올리려 애쓰던 오른손을 살며시 감싸 주었다. 그래서 세아는 그냥 다친 곳을 만져 주는 일을 포기했다. 어차피 지금은 움직일 힘도 없었다.

세아는 어이가 없어서 웃을 뻔했다. 만약 입가 근육을 움직일 힘만 남아 있었어도 헛웃음을 쳤을 것이다.

자기가 뭔데. 나보다 훨씬 약한 주제에 자기가 뭐 대단하다고 나서서 막아. 죽게 내버려 뒀어도 어차피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갔을 텐데. 어차피 이번 생이 끝이 아닌데, 죽어도 다시 만날 수 있는데 뭐 그리 간절해서 저런 표정으로 나를…….

어이가 없어. 진짜 기가 막혀. 그래서 웃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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