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14.3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세아는 상황을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기억은 소파에 앉아 사람들을 둘러보던 지점에서 멈추었다. 그녀는 멍하게 몸을 일으켜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기 방이었는데,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산자락 풍경을 바라보다가 세아는 눈가를 문지르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밖을 보니 늦은 밤인 듯한데,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다.
손을 뻗어 핸드폰을 쥔 순간, 조용히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이준이었다. 그는 일어나 앉은 세아를 보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급히 다가왔다.
“누나, 괜찮아요?”
“응, 괜찮아. 나 왜 자고 있었지?”
“기억 안 나요?”
이준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자기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세아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내가? 내가 쓰러졌다고?”
“네, 정말 갑자기 확 쓰러졌어요.”
“그래? 근데 몸이 왜 이렇게 멀쩡하지?”
아프지도, 피로하지도 않다. 오히려 세이브 던전에서 나온 직후보다 더 멀쩡하게 느껴졌다. 잠시 고민하던 세아는 대수롭지 않은 듯 결론을 내려 버렸다.
“아마 그 소원 대가 때문에 좀 놀라서 그랬겠지. 어쨌든 지금은 멀쩡해. 잠도 다 깼고.”
“누나, 누나 하루 넘게 의식이 없었어요.”
“그래? 그래서 이렇게 배가 고픈가 보다.”
가벼운 대꾸에 이준이 얼굴을 찡그렸다. 침대에 앉은 세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권했다.
“혹시…… 혹시, 병원에 가 보면 어떨까요?”
“정신과?”
그의 말을 예상한 듯 세아가 웃으며 대꾸했다.
압사의 고통은 확실히 엄청났다. 살면서 그런 아픔과 공포는 느껴 본 적도 없었다. 앞으로 무슨 경험을 해도 그보다는 덜할 것이다. 그래도 미쳐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 증거로 자신은 이렇게 멀쩡히 앉아 있지 않은가.
“잠깐 불안정했던 거야.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게다가 협회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데 병원에 들락거릴 수는 없지. 의사를 부르면 더 눈에 띌 테고.”
“하지만…….”
“그만하자. 더 중요한 얘기가 있잖아. 네 스킬은 강화됐어?”
세아의 어조가 너무 단호해서 이준은 의견을 더 내세우지 못했다. 그는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강화됐어요. 설명은 바뀌지 않았지만 강화에 대한 모든 설명이 사라졌고, 스킬 이름 옆에 플러스 기호가 붙었거든요.”
“아, 잘됐다. 그럼 이제 바로 던전으로 가도 되겠네.”
보스 앞에 도착해 정화 스킬을 사용하기까지 했는데, 스킬 강화가 되지 않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소득 없이 물러나야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먼 길을 돌아 왔는지 아득했다.
그래도 잘 끝났으면 된 거지. 안도한 세아는 다른 걸 확인했다.
“너도 다 기억나는 거지? ‘모든 시간을 되찾는다’고 했으니까…….”
“네.”
이준이 침대 아래 몸을 낮추어 앉았다. 그는 망설이다가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거절하는 대신 이준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누나.”
“응?”
“사과하고 싶었어요.”
지난 생에서 처음 만났을 때 세아가 왜 그렇게 자신을 경계하고 불신했는지 이해가 갔다. 몇 번이고 그녀를 배반해 죽음으로 밀어 넣었는데, 어떻게 선뜻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세아는 자신을 믿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바꿀 수 없는 과거 앞에서 이준은 괴로웠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가 세아를 거듭 죽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때, 세아가 자유로운 손을 움직여 그의 머리를 툭툭 쳤다.
“정이준, 그럴 필요 없어. 네가 원한 일도 아니었고, 결국 네가 직접 바꿨으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운명을 바꾼 건 세아 자신이 아니라 이준이다.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10년을 보냈다면, 세아는 여전히 보스 앞에서 살해당하고 있었으리라. 그녀가 죽은 후 이준이, 또 다른 사람들이 애써 주었기에 지금이 있는 것이다.
복잡하게 얽힌 인연과 인과가 신비로웠다.
열세 번째 생에서 이준은 김송숙 협회장과 협력해 ‘최초의 버그’를 알아내려 애썼다고 했다. 세상이 다시 시작되고, 이준이 S급 각성자가 된 후에도 그들은 알 수 없는 인연으로 묶인 것이다.
심증뿐이지만 최두정이 결국 김송숙을 죽인 일도, 과거에 일어나지 못한 일이 지금 일어났을 뿐이다. 그는 결국 세아의 손에 죽었지만, 김송숙 협회장을 살해함으로써 과거에 품은 숙원을 이룬 셈이다.
섬세하게 이어진 프랙털 무늬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세아는 자신의 생을 이루는 무늬 중 하나인 이준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말했잖아. 이유 없이, 그냥 널 용서한다고.”
그때, 이준은 사랑한다고 답했다. 세아는 아무 대답도 돌려주지 못했다.
이 깊은 이해와 용서가 사랑일 수 있을까. 그를 보면 약해지는 마음에 ‘애정’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가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는 낯선 모습도, 사랑에 물들었기에 자신의 일부가 되었을까.
“누나는 그걸로 된 건가요?”
“되지.”
“어떻게요? 내가 누나를 죽인 게, 상관없어요?”
이준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세아가 자신을 생각해 거짓말을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세아는 제 앞에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준을 가만히 보다 웃었다.
“네가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상관없는데. 상관있는 건 내가 아니라 이준이 너겠지.”
이준은 전에도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듣고 아는 것과 직접 기억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준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세아를 보다가, 애원하듯 그녀의 무릎에 입을 맞추었다. 세아는 그가 조금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나가 화를 냈다면 차라리 나았을 거예요…….”
세아는 화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준의 노력을 보았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해 자신보다 훨씬 더 불리한 처지에 있는 그가 어떻게 발버둥 치는지를 보았다. 그 필사적인 몸부림을 보며 왜 화가 난단 말인가. 오히려, 정이준이 가여웠다.
이 마음을 모를 그가 가냘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용서해 주세요.”
세아는 알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널 완전히 용서했다고, 아니, 애초에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홧김에 죽였던 과거도 사과한다는 말도 접어 두었다. 이준이 이미 자신을 이해했음을 알기에 그런 사과는 불필요했다.
대신 세아는 이준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다독였다.
“고마워.”
“…….”
“너는 강한 사람이야, 이준아.”
언젠가 그는 너무 약해서 미안하다고 고백했지만. 모든 과거를 본 세아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 박힌 단단한 의지를. 포기도 체념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그녀는 이제껏 모든 사람이 자기보다 약하다 여겼지만, 사람의 진짜 힘은 다른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물었다.
“키스해 볼래?”
이준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세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뒤덮은 열망을, 세아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웃음을 본 후에야 이준은 천천히 움직였다. 세아의 뺨을 완전히 감싼 손은 무척 뜨거웠다. 손가락이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그 손을, 세아는 살며시 덮어 쥐었다.
이준의 고개가 틀어지고 어두운 방에서 입술이 닿기 직전, 세아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떨지 마, 우리 같이 잔 적도 있잖아. 이젠 기억하면서.”
“난 항상 떨린다고요.”
이준이 뜨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항상 처음인 것처럼, 하고 덧붙이는 소리를 받아들이듯 세아는 먼저 입술을 겹쳤다. 과거의 그 어떤 입맞춤보다도 따뜻했다.
14.4
세아의 방 밖으로 나온 이준은 문을 닫고 서서 잠시 망설였다. 1층 거실에서 카일리와 리웨이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올리버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는데, 대화 내용을 들으니 모두 세아를 걱정하는 듯했다.
이준은 조용히 자기 핸드폰을 꺼내 주소록을 열었다. 세아가 쓰러진 사이 핸드폰을 뒤져 알아낸 번호가 입력되어 있었다.
그는 세아가 듣지 못하도록 2층 구석으로 걸어가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다이얼이 두 번 울리기 전에 상대가 응답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정이준입니다. 갑자기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이준은 상대가 자기 이름만 듣고도 누군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과연 상대는 누구냐고, 자신의 번호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캐묻는 대신 침묵을 지켰다. 이준은 그 침착함에 안도했다.
“도움이 필요해서 연락했습니다. 만날 수 있을까요?”
14.5
카일리와 리웨이, 올리버는 잔뜩 긴장한 채로 세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두 시에 모이자고 해 놓고 세아는 아직 오지 않았다. 벌써 10분이나 지났는데, 어디 멀리서 오는 길도 아니고 바로 위층에 있는데.
먼저 일어난 건 카일리였다.
“내가 가 볼게요.”
눈앞에서 세아가 기절하는 걸 본 후로 카일리와 리웨이는 예민해졌다. 세아는 강력한 헌터였고, 정신력도 대단해서 그렇게 쉽게 의식을 잃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멀쩡하다고 웃다가 갑자기 졸도했다.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일리가 막 2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세아가 허둥지둥 나타났다. 그녀는 막 계단에 발을 디딘 카일리를 보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사과했다.
“미안, 깜빡 잠들었나 봐.”
“잠들었다고?”
카일리는 의심스러운 듯 되물었지만 그래도 세아가 지나갈 수 있게 비켜 주었다. 나란히 돌아오는 두 사람을 보며 리웨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세아는 손을 들어 보이며 다시 미안하다고 말했다.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깜빡 졸았어요.”
“세아, 졸려? 잠 못 잤어?”
올리버의 물음에 세아는 그랬던 것 같다고만 대답했다. 아직 어린 올리버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지만, 카일리와 리웨이는 눈을 맞추고 의미심장한 시선을 나누었다. 세아는 소파에 앉아 말을 시작했다.
“일단…… 우리 다시 캘리포니아 던전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준비가 끝났거든요.”
지난 생에서, 이준의 정화 스킬을 강화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공유한 건 세이브 이후다. 이들은 스킬 강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세아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준비가 끝났다’라는 표현으로 압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