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95화 (95/112)

95화.

“이준이 상태도 좋아졌고, 이제 정말 시스템 보스 던전으로 가서 공략만 마치면 돼요.”

세이브했으니, 시스템 보스 던전도 다수 입장 가능한 상태로 고정되었을 것이다. 파티원을 모두 데리고 갈 수 있다니 든든했다.

그때, 올리버가 불쑥 물었다.

“나도 가는 거야?”

“아, 아니. 대신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세아는 올리버의 눈을 들여다보며 사려 깊은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전처럼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거기서 나오는 몬스터는 대부분 시스템 속성이야. 완전히 죽이려면 정이준의 ‘정화’ 스킬을 사용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쪽은 공격에 특화되지 않았으니 위험하거든. 링크 스킬로 연결할 수는 있는데, 기력을 계속 소모하게 되니까.”

“그래서?”

“정이준의 스킬을 무기에 입힐 수 없을까? 그런 아이템을 만들 수 있겠어?”

올리버는 어린애답지 않게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손으로 자기 턱을 괴듯이 받치고 생각에 잠겼다.

세아는 올리버가 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올리버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경험치를 전달하는 귀속 아이템까지 만들어 낸 천재였다. 그때보다는 훨씬 어리지만, 진지함과 재능은 그대로였다.

문득 이준은 올리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졌다. 이전 생에서는 올리버를 도울 수 없었지만, 이번에라도 구해 다행이라 여길까?

세아가 이준 생각을 하는 걸 읽기라도 한 듯 리웨이가 그의 이름을 꺼냈다.

“근데 정이준은 어디 갔어?”

“아, 약속 있다고 잠깐 나갔어요. 점심 약속이랬으니까 조금 있으면 오겠죠. 이준이랑은 이미 얘기 끝나서 딱히 안 들어도 상관없어요.”

리웨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올리버가 세아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더니 자신 있는 어조로 단언했다.

“만들 수 있어. 시간도 얼마 안 걸리고.”

“이준이가 도와줘야 하지?”

“응. 근데 잠깐이면 돼.”

“좋아, 고마워. 제작자 있으니까 아주 든든하네.”

따뜻한 칭찬에 카일리도 리웨이도 의외라는 시선으로 세아를 바라보았다. 둘의 눈길을 느끼지 못한 세아는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몸을 소파에 기댔다. 사냥감을 다 잡아 놓고 포식을 기다리는 맹수 같았다.

“이제 거의 다 됐어요. 바로 눈앞이야.”

세아의 눈동자에 찬란한 바깥 풍경이 아른아른 비쳤다. 히든 퀘스트를 끝나고 나면,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나면, 이 모든 게 달리 보이리라. 빛이 번진 풍경이 가물가물 흐려지고 세아는 그대로 잠에 빠졌다.

물론 이 모습을 지켜본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카일리가 조심스럽게 세아 쪽으로 팔을 뻗으며 불렀다.

“세아?”

카일리의 손이 닿자마자 세아가 퍼뜩 깨어났다. 크게 움찔한 세아 때문에 건드린 카일리가 더 놀랐다.

“아, 아아. 어? 왜?”

“너…… 자?”

“아니? 그냥 밖에 좀 봤는데?”

카일리와 리웨이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는 광경을 본 세아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느냐고 묻기도 전에 현관문 도어 록 소리가 났다. 안으로 들어온 건 이준이었다.

세아가 손을 들며 그를 불렀다.

“아, 이준아. 네 얘기 하는 중이었어.”

“자고 있었잖아.”

리웨이가 지적하듯 꼬집자 세아는 웃는 듯 찡그리는 듯 리웨이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니까요? 내가 언제 잤다고 그래요.”

그런 다음 세아는 이준에게 올리버를 좀 도와주라고 말했다. 이미 이 문제를 놓고 세아와 대화한 이준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올리버와 함께 사라진 후, 거실에는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세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카일리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지만, 리웨이는 단호했다.

“난 반대야.”

“네?”

“바로 캘리포니아 던전으로 가는 거 반대라고. 너 지금 던전 갈 상태 아니야.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아까까진 아무 말 없었잖아요?”

“그건 네가 기면증 환자처럼 픽 잠드는 걸 못 봤을 때 얘기고.”

“나 진짜 안 잤다니까.”

세아는 답답한 마음에 카일리를 휙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카일리는 기대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너 잤어.”

당황한 세아가 두 사람을 바라보다 고개를 틀었다. 피곤해서 좀 잠들 수도 있지, 왜 유난스럽게 구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은 아까도 갑자기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거실로 늦게 나오고 말았다.

정말 내 몸이 이상한가?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세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컨디션은 최고였고, 힘도 문제없이 사용 가능했다. 지금 바로 보스 앞에 던져져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 그런데 왜?

그때, 카일리가 갑자기 팔을 뻗어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런 다음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세이브 하러 던전에 혼자 갔을 때, 무슨 일 있었어? 업혀서 돌아왔잖아.”

이런 분위기는 낯간지럽다. 세아는 카일리의 손을 뿌리치지 못한 채 당혹으로 굳어졌다. 자신은 위로나 안정이 필요한 환자가 아니다. 그런데 카일리도 리웨이 모두 주의 깊게 자신을 살피는 이 상황이 어색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여기서 모든 과거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자기가 겪은 끔찍한 일을 입에 올릴 수도 없다. 세아는 슬그머니 잡힌 손을 빼며 모르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좀 피곤한가 보다. 올라가서 쉬다 올게요.”

달아나듯 방으로 갔는데, 등 뒤로 문이 탁 닫히자 갑자기 식은땀이 솟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세아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잠이 부족한가 싶어 누워 자려고 하는데, 빛이 너무 환해 잘 수가 없었다.

‘커튼이라도 치자.’

암막 커튼을 쳐 빛을 차단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러고 있으니 또 잠이 오지 않았다.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다음 순간, 세아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빛이 눈부시게 쏟아졌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라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그림 같은 뭉게구름이 햇빛을 받아 얼룩덜룩 아름다웠다. 놀라서 따라 나온 카일리와 리웨이가 그녀를 붙잡았다.

“야, 너 왜 그래!”

“어?”

세아는 상황을 판단할 수가 없었다. 분명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눈을 감았다가 뜨니 갑자기 바깥이다. 그녀는 멍하게 두 파티원을 돌아보았다가 바보처럼 답했다.

“아니, 좀 답답해서…….”

“너 여기까지 맨발로 뛰어나왔어.”

카일리가 핏기 가신 입술로 중얼거렸다. 세아는 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고 눈가를 마구 문질렀다. 머릿속이 간지러웠다. 누가 손톱으로 두개골 안쪽을 살살 긁고 있는 느낌이었다. 옆에 있던 리웨이가 무거운 어조로 그녀를 설득하려 들었다.

“던전 가는 거 좀 미루자. 어? 어차피 올리버가 만든 아이템 시험도 해 봐야 하고, 당장 급할 거 없잖아.”

“안 돼요, 시스템이 개입하기 전에 빨리 가야 된다고요.”

세아는 리웨이의 말을 뿌리치듯 거친 어조로 대꾸했다. 그들은 세아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세아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다.

세상이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났다. 이전 생에서는 시스템이 차지한 곽남주의 몸을 없애 개입을 막았지만, 이번에도 운이 따라 줄까?

이번에는 시스템이 어떤 미각성자의 몸을 빼앗을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이준의 부모 중 하나를 택할지도 모른다. 만일 시스템이 이준의 어머니 몸을 강탈한 후 목숨을 걸고 협박한다면, 상황이 어떻게 급변할까?

그 전에 서둘러서 움직여야 한다. 최대한 빨리. 시스템이 끼어들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여기까지 잘 왔잖아. 약해지면 안 돼. 여기서 무너지면 또 제자리걸음이야.’

곽남주의 얼굴을 한 시스템이 했던 말을 마음에 떠올린다.

‘나도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길 원하지 않았어.’

자신과 이준의 모든 생을 바쳐 세상을 바꾸었고, 글자 그대로 죽어 가며 겨우 얻어 낸 기회였다. 모든 진실을 안 지금, 망설이지 않고 달려 나가야 했다. 세아는 마음을 다잡고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같이 가 줘요.”

세아는 타오르는 눈으로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부탁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봐야 해요.”

14.6

이른 저녁, 세아는 밥을 먹으러 오지도 않았다. 세아 몫의 음식이 식탁에서 차갑게 식어 갔다. 중간에 세아의 아버지가 그녀를 부르러 올라갔지만, 세아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애가 잠이 늘었네.”

세아의 부모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그렇게 말했지만, 카일리와 리웨이는 서로 시선을 나누며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뜻을 공유했다. 이준은 모르는 척 식사를 이어 갔다.

저녁을 다 먹은 후, 카일리는 이준의 팔을 잡아끌어 거실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런 다음 은밀한 회의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네가 세아 좀 말려 봐. 저 상태로 무슨 던전이야? 몸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르는데……. 아무래도 세이브 하러 갔다가 큰일이 났던 게 분명해.”

“제가 뭐라고 말해도 누나는 갈 겁니다. 소용없어요.”

이준은 카일리의 손을 떨쳐 내며 고개를 저었다. 시도도 해 보지 않겠다는 무력한 소리에 카일리는 울컥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자는 거야? 세뇌 당했을 때도 세아 먼저 치유하는 거 보고 좀 괜찮은 놈인가 했더니, 생각이 있으면 같이 말려야 할 거 아니야!”

“소용없다고요. 누나는 던전에서 죽는다고 해도 갈 테니까.”

큰소리를 들은 리웨이가 허둥지둥 다가왔다.

“둘 다 목소리 좀 낮춰. 왜 둘이 싸우고 있어?”

“누나가 왜 그렇게 가겠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준은 리웨이의 말을 무시하고 카일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준이 말을 이었다.

“열 번 넘게 죽었다 살아났는데, 그리고 그걸 죄다 기억하는데, 몸 좀 힘든 게 대수겠어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시라도 빨리 퀘스트를 끝내고 싶은 마음뿐일 겁니다. 말려도 시간 낭비라면, 도와서 일을 해결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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