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카일리는 말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세아의 마음을 모른다. 열 번 넘는 생을 모두 기억하는 세아, 그만큼의 죽음을 기억하는 세아의 심정을 누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리웨이가 이준을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
“그러다 세아가 죽으면?”
“…….”
“그래도 상관없겠지. 죽어도 세아는 이리로 돌아올 테니까. 그래서 말릴 생각도 없는 거 아냐? 안 그래?”
“제가 누나가 죽든 말든 신경 안 쓴다고요?”
이준이 코웃음을 치며 리웨이의 비난을 받아쳤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리웨이도 지지 않고 이준의 타오르는 눈을 마주 보았다. 이준이 분노로 갈라진 목소리를 토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바로 그때, 급한 발소리가 세 사람의 긴장을 깨뜨렸다. 2층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소리였다.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계단 쪽을 돌아보았고, 반쯤 구르다시피 내려오는 세아를 발견했다.
“누나!”
“세아!”
다들 본능처럼 세아를 향해 뛰었다. 그러나 가서 붙들기도 전에 계단을 다 내려온 세아는 균형을 완전히 잃고 쾅 무너졌다. 그러고도 혼이 나간 사람처럼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누나, 세아 누나!”
이준이 얼른 쫓아가 세아의 팔을 잡았다. 다행히 세아는 탁 트인 하늘을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 멀리까지 뛰어가진 않았다.
“누나, 괜찮아요?”
“괜찮아.”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세아도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또 맨발로 정원까지 뛰어나왔음을 깨닫자 머리가 무거워졌다. 가슴 안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도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혹시 방이 답답해서 나온 거예요? 압사…….”
세아는 자기 발등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침묵했다. 흰 발가락 사이로 비죽비죽 나온 잔디 때문에 조금 간지러웠다. 밤공기를 머금은 흙은 축축하고 차가웠다.
“그냥 거실에서 자야겠다.”
“누나…….”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무감하게 말하고 돌아서니, 울기 직전인 카일리와 착잡한 표정의 리웨이가 보였다. 세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무너졌다.
정신이 왜 무너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히든 퀘스트만 클리어하면 모든 게 좋아질 거야. 일단은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14.7
다음날 정오, 세아는 점심도 거르고 혼자 마당에 나와 있었다. 식사하는 공간이 좁거나 답답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묘하게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세아는 배가 고프지 않은 척 마당을 걸어 다니며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할 일은 정말로 중요하다. 작은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몸이 이렇게 엉망이라,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때, 불쑥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돌아보니 이준이 접시를 들고 서 있었다. 베이컨을 넣은 샌드위치를 보고 세아는 약간 웃음을 보였다.
“밥 먹으라고?”
“네.”
답답해서 함께 못 먹은 거 아니냐, 그런 말을 덧붙이는 대신 이준은 바깥에 놓인 테이블에 접시를 올려놓았다. 약한 부분을 찌르지 않는 그가 고마웠다.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물며 세아는 침묵했다. 이준 역시 세아가 샌드위치 하나를 다 먹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부스러기가 묻은 손을 탁탁 털며 세아는 잠시 찬란한 햇빛을 누렸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쾌청한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속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했다.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세아가 말했다.
“난 갈 거야. 말려도 소용없으니까 괜히 힘 빼지 마.”
“알아요. 그냥 누나한테 다른 부탁이 하고 싶어서.”
“부탁?”
지금 던전에 가지 말자고 보챌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이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었다. 잠시 시선을 맞대던 이준이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살며시 웃었다.
“우리 데이트 가면 안 돼요?”
던전 다녀와서 해도 되잖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이전의 세아였다면 분명 그런 식의 말로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이준을 낙담하게 만들기 싫었고, 또 한편으로는 이준이 간절한 기색이어서 거절할 수 없었다.
“시스템 없앤다고 세상 끝나는 거 아니야.”
“알아요.”
“근데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이게 마지막이라는 표정.”
“그랬어요?”
이준은 멋쩍은 듯 손을 들어 제 뺨을 문질렀다. 그런다고 표정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미소는 아까보다 한결 보기 좋아졌다.
“불안해? 잘못될까 봐.”
“아뇨, 불안하진 않아요.”
“그럼 내 몸 때문에? 이건 며칠 쉬거나 몇 달 요양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야.”
“정말로,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에요. 이런 세상에서 누나랑 처음 만났고 지금까지 함께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싶어서 그런 거죠.”
마지막으로 돌아본다.
그런 일에 의미가 있을까? 세아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테이블 너머에 앉은 이준의 얼굴을, 그 얼굴에 드리운 나무 그늘을 보고 있으니 생각이 바뀌었다. 아마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래, 그럼 가자.”
이준이 피어나듯 웃었다. 분명 기뻐서 웃는 것일 텐데, 그런 밝은 느낌이 전해지질 않았다. 몸이 안 좋아서 내가 예민한가, 세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넘겨 버렸다.
“나, 가 보고 싶은 곳 있어.”
14.8
세아가 이준을 데려간 곳은 크레이지 펍이었다. 이준이 지난 생에 근무했던 곳으로, 세아가 자신을 경계하는 그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던 장소였다.
이준이 S급으로 각성하고 세상이 뒤틀린 후, 여기도 여러 이유로 사라졌을까 했는데 그대로 있었다. 물론 바텐더는 다른 사람이었다.
“뭐 마실래?”
“아무거나요.”
세아가 픽 웃었다. 이준에게 아무 맥주나 달라고 했던 과거가 떠오른 덕이었다.
“나 따라하지 말고 골라.”
주문하고 잠시 기다리니 직원이 맥주 두 잔을 테이블에 놓고 사라졌다. 세아는 앞에 놓인 미니 브레첼을 하나씩 집어 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내라 답답하진 않아요? 왜 여기 오자고 했어요?”
“여기 왔을 때 처음으로 널 이해해 보자고 생각했거든.”
그 전까지는 이준을 이용해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할 계획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배신에, 이유를 알고자 이준을 파헤쳤다. 이 자리에 앉아 바지런히 움직이는 이준의 옆얼굴을 보던 날이 아득히 떠올랐다.
그땐 그리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 그와 마주 앉아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계속 날 배신하니까 네가 왜 그러나 했어. 사실 그땐 네가 시스템 없어지는 게 싫어서 그런다고 생각했거든. 헌터의 능력이 사라지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죄송해요.”
그의 사과에 세아는 맥주잔을 들었다. 이준이 눈치껏 잔을 부딪쳤고, 세아는 흑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약한 탄산의 느낌과 함께 씁쓸한 향이 입안에 번졌다.
“사과받으려고 옛날 얘기 한 건 아닌데.”
이준은 알 수 없었다. 세아는 자신을 용서했을까. 그가 원한 일이 아니라 해도 행위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네가 원하지 않았으니까, 프로그램된 행동이었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일까.
“너 그때 나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이준은 그냥 빙긋 웃어 대답을 피했다. 스폰서가 되어 주겠다고 나서는 헌터가 워낙 많아서 세아도 그런 부류인 줄 알았다. 괜한 소리는 하지 말자 싶어서 이준은 다른 말을 했다.
“누나도 나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잖아요.”
“당연하지. 넌 진짜 이상했어, 알아? 계속 배신하다가 갑자기 좋아한다고 매달리질 않나. 솔직히 하나도 이해 안 갔다고.”
그때는 이준 안에 축적된 과거의 잔상을 몰랐으니, 갑자기 바뀐 이준의 태도가 황당할 뿐이었다. 아마 이준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준은 검지로 슬쩍 세아의 손등을 쓸었다. 장난치는 듯한 손길이라 조금 간지러웠다. 그때 이준이 물었다.
“근데 왜 흔들렸어요? 이해 안 갔다면서, 왜 받아줬어요?”
세아는 잠시 시선을 바 너머로 던져두었다.
언젠가의 생, 이준은 거기서 맥주를 따르고 컵을 닦고 안주를 만드느라 나무 싱크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둑한 공간의 노란 조명이 그의 속눈썹 아래 촘촘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세아는 그 모든 걸 보고 있었다.
“예뻐서.”
이렇게 대답할 작정은 아니었는데 저절로 말이 튀어나갔다.
“진짜 짜증 났는데, 너 예뻤어.”
그 전에도 시선을 빼앗는 얼굴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준의 외모가 그때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펍 특유의 분위기 탓이었을지도. 낮게 잔 부딪치는 소리, 도란도란 들리는 대화, 작은 음량으로 흐르던 팝송…….
아니면 그냥, 정이준이라는 한 인간을 이해하려고 시도한 첫날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가 아름다운 재투성이 소년 같았다.
고단한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어린 별.
그때의 이준은 정말 힘들었겠지만, 담담하게 처연해서 더 어여뻤다.
이준이 턱에 손을 괴고 배시시 웃었다.
“다른 헌터들이 그런 말 하면 정말 싫었는데.”
“싫을 만도 하지.”
“근데 누나가 해 주니까 좋네요. 나 아직도 예뻐요?”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인형처럼 흰 얼굴과 대비되는 새까만 머리카락도 여전히 탐스러웠다. 크고 작은 비밀을 감춘 사람 특유의 애련한 분위기마저 빛처럼 그의 주위를 떠돌았다.
“그때보다 훨씬 예뻐.”
“나중에…… 나보다 더 예쁜 사람 보면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 사진 찍을까?”
“내가 죽고 없으면 그 사람도 받아줄 거예요?”
세아가 좀 더 정신이 있었더라면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마침 그녀는 다시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세아는 나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런 건 왜 궁금해?”
“그냥 미리 질투 좀 해 봤어요. 우리 나갈까요, 누나? 답답해요?”
이제 슬슬 정말 나가고 싶었고, 이준의 말은 물 흐르듯 지나가 세아의 마음에 의구심을 심지 못했다. 세아는 반도 마시지 않은 맥주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