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97화 (97/112)

97화.

14.9

집으로 돌아가기엔 서울 한복판까지 와 버린지라, 두 사람은 호텔로 들어갔다. 의도하진 않았는데, 둘이 언젠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던 호텔이었다. 익숙한 객실로 들어가 가방을 침대에 팽개치며 세아가 커튼부터 젖혔다.

별은 어둠에 흩뿌려진 모래알처럼 빛나고 있었다. 슬쩍 지나치면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하늘 저편을 바라보면 무리 지어 뜬 별을 볼 수 있다. 세아가 아무 생각 없이 하늘에 시선을 묶어 둔 동안, 뒤로 다가온 이준이 살며시 그녀를 안았다.

“우리 되게 웃긴다. 여기 기억나?”

“네.”

S급 각성자로 변해 나타난 후 이준은 세아를 따로 불렀다. 무언가 수상함을 느낀 세아는 그가 준비한 차를 보고 잔을 바꿔 두었다. 과연 세아의 잔에는 자백제가 들어 있었고, 이준은 잔이 바뀐 걸 알고도 차를 마셨다.

최초의 버그에 대해, 정화 스킬에 대해 설명하며 그는 다시 세아를 ‘누나’라고 불렀다. 이준도 같은 순간을 떠올렸는지 세아의 뺨에 살짝 키스하며 물었다.

“그때 갑자기 누나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봐서 놀랐죠?”

“당연하지. 얘 왜 이러나 했어.”

“그때 누나 표정 진짜 재밌었어요.”

좀 기막혔던 것 같기는 하다. 그때의 이준은 심문관의 얼굴로 이것저것 캐묻다가 대뜸 누나라고 부르고 어리광을 부리듯 웃었다. 솔직히 급발진하는 자동차를 본 기분이었다.

“그 이전 삶에서부터 누나를 누나라고 부르고 싶었거든요.”

“왜?”

“더 친해지고 싶어서.”

단순한 이유라 세아는 이번에도 웃었다. 둘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맞대고 있었다. 세아를 뒤에서 안은 이준이 손으로 그녀의 몸을 다독이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누나, 심장 뛴다.”

“응.”

“빨리 뛰어요.”

“알아. 나 좀 긴장했거든.”

“왜요, 답답해서? 나갈까요?”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들은 세아가 이번에야말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세아는 예고도 없이 이준의 팔 안에서 휙 몸을 돌려 밤 풍경을 등졌다. 그녀가 이준의 검은 눈동자를 깊이 응시하며 말했다.

“너랑 같이 호텔에 있으니까 그렇지, 이준아.”

이준의 얼굴에 단숨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여전히 세아를 안고 있어서, 둘의 거리는 무척 가까웠다. 당황하여 쩔쩔매는 그의 표정이 귀엽게 느껴졌다. 세아는 이준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누나가 그런 말 할 줄 몰랐어요. 전에는, 내가 졸라서 그런 거니까…….”

“그래서 내가 억지로 했다고 생각했구나.”

“그건 아니지만…….”

“그래, 아니야.”

우리 사귀는 건가? 이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푸는 동안 세아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하나 떠올랐다. 하지만 툭, 툭, 리듬감 있게 풀리는 단추를 보고 있자니 그런 게 무슨 상관이냐는 대책 없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여기, 이준과 있어서 즐거웠다. 이준의 흰 살결에 잇자국을 잔뜩 남기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세아는 부드럽게 이준의 아래를 쓸었다. 옷 위로 건드렸는데, 잔뜩 예민해진 이준은 눈가를 찡그리며 신음을 삼켰다. 세아의 어깨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울리고 싶은 예쁜 얼굴.

이준의 몸은 무척 따뜻했고 그의 품은 넓게 느껴져서, 세아는 숨이 가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준의 목에 입술을 묻으며 자신을 놓았다.

14.10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준이 운전하다 말고 불쑥 물었다.

“누나, 차는 괜찮아요?”

따지고 보면 침실이나 펍보다는 차가 훨씬 더 좁은데, 세아는 멀쩡했다. 세아도 그게 이해 가지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좁은 골목이나 통로가 더 힘들 것 같네. 차는 괜찮아.”

“다행이네요.”

“이렇게 달리니까 바다 가고 싶다.”

“갈까요?”

운전대를 잡은 이준이 시원하게 물었다. 한적한 한강대교를 달려 오후의 강을 바라보던 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돌아가야지. 바다는 다 끝나고도 볼 수 있잖아.”

“그래요, 그럼.”

이준은 조르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창 밖으로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다리 상부를 떠받치는 굵은 기둥이 하나하나 지나가고, 나는 새와 강에서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함께 눈에 들어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비 소식이 다가오는지, 검은 구름이 저편에 무리 지어 있었다.

세아는 문득 궁금했다. 데이트를 하자고 한 건 이준인데, 그는 만족했을까.

그때, 이준이 먼저 세아를 불렀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응.”

“가까운 사람을 잃어 본 적 있나요? 가족이나 친구나…….”

세아는 창문을 조금 내려 바깥바람을 맞이했다. 뛰어드는 듯 다가왔다 휙 사라져 버리는 바람이 이준의 저의를 실어가 버렸다. 세아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헌터 각성한 후에 같이 던전 갔던 사람들은 몇 명 죽었지만.”

“만약 잃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요?”

“모르겠네.”

성의 없이 대답한 게 아니라,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반복되는 삶이 세아에게 준 깨달음 중 하나는, 닥치기 전까진 알 수 없다는 것.

“진짜 모르겠어. 넌?”

“슬프겠죠. 그래도 시간 지나면 잊어버리고 잘 살 거예요.”

속도를 내지 못하는 앞차를 피해 차선을 바꾸며 이준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덧붙였다.

“누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꼭.”

“너, 그런 말 사망 플래그인 건 알아?”

그 농담에 이준이 소리 내어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세아 안에서 고개를 든 희미한 의심을 밀어냈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조금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나 보다. 세아는 그렇게 넘겨 버렸다.

“약속할 거죠?”

“약속까지 해야 해? 그래, 약속해.”

세아는 픽 웃고 운전하는 이준의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인 것 같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대화. 퀘스트도, 던전도, 복잡하게 얽힌 과거도 없는 세상에 온 느낌이었다. 이대로 차를 타고 이준과 영원히 달릴 수도 있을 듯했다.

“누나. 바다 안 가도 아쉽지 않겠어요?”

“응.”

이준은 더 묻지 않았다. 둘의 차는 다리를 빠져나와 복잡한 도로로 합류했다. 푸른 강 풍경이 아득히 멀어졌다.

14.11

올리버는 세아, 카일리, 리웨이가 사용할 무기 세 개를 며칠 만에 만들어 냈고, 이준의 도움을 받아 무기에 정화 스킬을 입혔다. 이준이 던전 안에 살아만 있다면 무기에 깃든 힘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리하여 네 사람은 시스템 보스 던전 앞에 섰다.

“여길 드디어 오네.”

세아는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입구를 내려다보았다. 구멍은 짐승의 아가리 같았다.

빛 한 줄기 없는 컴컴한 통로를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히며 심장이 밧줄에 묶인 듯 답답해졌다.

내려가는 도중에 통로가 좁아져 몸이 터져 버리면 어쩌지?

말도 안 되는 두려움을 떨치고자, 세아는 모두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기 잘 챙겼죠?”

올리버가 만들어 준 아이템은 가방에 들어가는 크기가 아니었다. 평소 자기 힘으로 이 무기 저 무기 만들어 내 사용하고 없애 버리던 세아는, 긴 검을 내내 들고 다녀야 하는 게 성가셨다.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 했다.

세아의 물음에 먼저 불만을 토한 건 카일리였다.

“난 보통 암흑 스킬 써서, 이런 무기는 불편해.”

“그래서 올리버가 총으로 만들어 줬잖아.”

“총도 잘 안 쓴다고.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리웨이의 목소리에는 불만보다는 염려가 가득했다.

“보통 소환수를 보내 싸우는데…… 괜찮으려나.”

“일반 스킬로 쓰러뜨리고 마무리만 정화 무기로 하면 되죠.”

세아는 명쾌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래도 둘의 얼굴은 그리 편안해지지 않았다. 세아의 몸도 좋지 않고 던전의 난이도도 꽤 높은데, 낯선 무기를 들고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차피 적응해야 할 문제였다. 두 사람이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한 세아는 이준의 상태를 확인했다.

“넌 어때, 컨디션 괜찮아?”

“네, 좋아요.”

“근데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세아가 덥석 이준의 손을 잡더니 무뚝뚝하게 물었다. 말 너머에 감춰진 염려가 느껴져서 이준은 잡힌 손을 빼지 않고 그저 웃었다.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그래, 별일 없을 거야.”

“누나.”

“응?”

세아는 이준의 손을 잡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부르기에 심각한 얘긴가 했는데, 그는 평소와 비슷한 얼굴로 세아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죠?”

“걱정하지 마.”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가자고 해도 소용없겠죠?”

“나 멀쩡해. 네 목이나 걱정해, 정이준.”

그렇게 대답한 순간, 이준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눈이 가늘어지며 미세하게 웃는 듯도 했고, 미간을 좁히며 슬픔을 억누르는 듯도 했다. 세아는 그의 수려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감정을 잡아챌 수 없었다.

수상한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처럼 찜찜했다. 세아는 그 느낌을 무시하지 않고 물었다.

“뭐야,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누나랑 여기 다시 오니까 기분이 새로워서.”

새로울 만도 하지, 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러려니 받아들여 버렸다.

“나도 좀 그래. 그래도 이제 거의 다 끝났어. 또 죽지 말자.”

“네.”

“새로운 세상에서는…….”

세아는 느리게 말을 끌었다. 처음이다, 히든 퀘스트를 끝낸 후 뭘 할지 상상한 건. 늘 목표만 보는 외눈박이처럼 질주했는데 이제는 새로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도 생각하게 된다. 세아는 공연히 민망해져서 모호한 표현으로 말을 맺었다.

“이런 거 말고 다른 일도 같이 하자.”

평범해서 소중하게 빛나는 시간을 나누면서. 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이준이 수영장을 갖고 있다니 거기서 함께 물장난을 쳐도 즐거울 것이다. 레이싱 트랙을 빌려 자동차 경주를 하거나 한적한 날 바다에 요트를 띄워도 좋겠다.

이준은 세아의 마음을 이해한 듯했다. 아침 이슬처럼 웃으며 좋다고 답할 줄 알았던 그가 대답을 주저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여서 세아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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