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빛에 익숙해지자마자 보인 건 난자된 몬스터의 시체였다. 크고 작은 몬스터를 합하면 족히 백 마리는 죽어 자빠졌을 듯했다. 목이 잘리거나 배가 갈려 죽은 몬스터의 시체에서는 여전히 뜨끈한 진액이 흘렀다.
이준은 몸과 몇 미터는 떨어져 있는 말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카일리의 목소리를 들었다.
“위로 가는 통로는 이쪽이야, 정이준! 빨리 와!”
이준은 제 등에 업힌 세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도 쓰러진 상태다. 위로 올라간 다음 치유하는 게 좋겠다. 어차피 정신의 문제라 치유 스킬은 임시방편이지만, 몸 상태라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준은 세아를 업고 몬스터의 시체를 넘어 공간을 가로질렀다. 그때, 갑자기 얼음처럼 싸늘한 손가락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이준은 놀라지도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덜 죽은 몸뚱이였다. 머리는 어디로 잘려나가 없었고, 잘린 단면에서 피거품이 일었다. 가죽을 뚫고 나올 듯 도드라진 갈비뼈가 보였다.
이준은 발목을 틀어 그 힘없는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나, 자꾸 따라오는 몸뚱이가 귀찮았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오른발을 들어 몬스터의 손목을 짓밟았다. 닭뼈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고, 죽어 가는 몬스터는 더 따라오지 않았다.
카일리는 기절한 세아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기절했어?”
“네. 일단 빨리 올라가죠. 누나가 이걸 보면 의심할 테니까.”
몬스터가 다 죽어 있다. 이 상황이 전하는 정보는 하나, 던전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
그들은 세아 파티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했고, 몬스터를 죽이고 이 층을 통과했다. 그들이 층을 벗어나자 어둠 트랩은 다시 작동되었으나 몬스터는 리젠되지 않았다.
멀리 있지 않다. 아마 그들은 지금쯤 3층, 아니면 4층 정도에 있을 것이다.
이준은 이미 그게 누구인지 알았다. 카일리와 리웨이도 마찬가지였다.
통로를 지나 계단을 오르는 길,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깬 건 카일리였다.
“그러니까 저게 ‘그 사람들’이 한 거지?”
“네, 그럴 거예요.”
“저렇게 흔적을 남겨 놓으면 어떡해? 세아가 깨어 있었으면 바로 수상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사정이 있었겠죠.”
몬스터가 갑자기 달려들어 처리할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컸다. 세아가 자꾸 기절하듯 잠드는 건 반갑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만큼은 다행이었다.
“근데 네 다음 계획은 뭐야?”
리웨이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준은 세아가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걸 확인한 후 되물었다.
“다음 계획이라뇨?”
“그 사람들이 성과를 못 낼 수도 있잖아.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럼 어쩔 거냐고. 세아한테 솔직하게 말할 거야?”
“아뇨.”
이준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그냥 누나가 세상을 정화하게 내버려 둘 거예요. 제가 직접 해도 되고……. 누나를 방해할 필요는 없잖아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말은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카일리는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때 마침 3층의 입구가 나타났으므로 이준은 그 말에 답할 필요가 없었다.
다행히 3층에는 아무도 없었고, 앞서간 사람들은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아마 세아는 앞선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이준은 일단 세아를 바닥에 눕혔다. 밝은 데서 보는 세아의 얼굴은 잠든 듯 평온해 보이기도 했고, 시체 같기도 했다. 이준은 오싹한 한기를 억누르며 손바닥을 그녀의 어깨에 댔다. 임시방편에 불과한 걸 알지만 그래도 치유를 시도해 볼 작정이었다.
“치유.”
14.16
무사히 깨어난 세아는 갑자기 3층에 와 있는 상황 때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다시 일어나 몬스터를 처리했다. 파티원 중 누구도 2층의 광경을 전하지 않았다.
3층에는 트랩이 너무 많았다. 이준이 뛰어난 힐러가 아니었다면 파티원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의 장애를 입었을 것이다. 그냥 칼이 날아오고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수준의 트랩이 아니었다. 건드릴 때마다 층의 생태계가 변했다. 불행히도 지금은 늪이었다.
“이게 말이 돼?”
단단한 돌바닥이 순식간에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늪으로 변하는 걸 보며 카일리가 불평했다. 보통 늪이 아니라, 마치 갯벌처럼 걸쭉하게 늘어지며 사람을 빨아들이는 액체였다. 세아는 하필이면 서 있던 자리가 늪 한가운데로 변한 탓에 그대로 허리까지 잠기고 말았다.
“이준아, 나 좀 끌어 올려 봐.”
세아는 차분하게 이준을 불러 그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풍경이 외부처럼 변하니 두렵지는 않았다. 시각의 기만이지만 왠지 밖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준이 세아의 손을 잡고 힘껏 당겼다. 세아 역시 팔에 힘을 주어 밖으로 빠져나왔다. 진흙 같은 것이 잔뜩 묻은 바지를 털며 세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세아는 자기 발목에 감긴 연약한 무언가를 잡아 뜯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언뜻 보기에는 두꺼운 지렁이 같았다. 한쪽 끝이 늪에 잠긴 걸 보니 아마 늪에 빠졌을 때 사람의 발목을 잡아 끌어당기는 몬스터인 듯했다.
그렇다 해도 너무 연약해 보여 세아는 큰 경계 없이 끈적끈적한 그것에 손을 댔다.
그 순간, 갑자기 우드득 소리가 터지더니 발목에 감긴 것이 두꺼워지기 시작했다. 물컹한 피부 표면으로 힘줄을 연상시키는 무언가가 툭툭 돋아났다. 그게 그대로 세아의 몸을 늪으로 끌어당겨서, 세아는 균형을 잃고 휘청 넘어졌다.
“누나!”
이준이 얼른 세아의 팔을 움켜쥐었으나 늪의 몬스터가 더 강했다. 세아는 잡힌 발목이 빠져 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며 들고 있던 칼을 내리쳐 촉수 몬스터를 잘라 버리려 했다.
그 순간, 몬스터가 늪 바닥에서 빠져나오며 세아의 몸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준은 그녀의 팔을 놓쳤고, 세아는 발목이 붙들린 채 속절없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갑자기 몸의 위치가 변하자 세아의 손아귀에서 검이 빠져나가 바닥 어딘가에 처박혔다.
“이세아!”
리웨이가 경악하여 외쳤으나, 세아는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으면서도 태연했다.
“괜찮아요!”
그녀가 그렇게 외치자마자 촉수가 휙 반원을 그리며 크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대로 세아의 몸을 투포환 던지듯 벽으로 내동댕이쳤다. 세아의 몸이 그대로 벽에 처박히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카일리가 비명을 지르며 벽으로 달려갔고, 이준과 리웨이는 촉수를 상대했다. 카일리가 세아가 떨어진 자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카일리를 보고 세아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 다쳤어. 그냥 혹 좀 난 거야.”
순간적으로 결계와 중력 상쇄 스킬을 동시에 사용해서 살았다. 이 정도 힘으로 사람을 벽에 꽂다니, 일반인이라면 머리가 터져 버렸을 것이다.
“여기 너무 위험해. 던전이 너무 이상하다고.”
카일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세아로부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 아픈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세아는 엉뚱하게도 검은색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전화 와?”
“아니.”
“근데 왜?”
던전이 처음 열리면 한 시간 정도 전파가 불안하게 끊어지지만, 시간이 지나 안정기에 들어서면 통화도 가능하다. 통화 품질이 그렇게 좋진 않아도 대화할 정도는 되었다. 그래도 급박한 상황에 핸드폰을 조작하기 힘드니 헌터들은 주로 호출기를 사용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세아가 지금 핸드폰을 볼 필요가 없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검은 액정만 멍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세아? 중요한 연락이야?”
“아니, 이거 내 핸드폰 아니야. 그냥 여기 떨어져 있었어.”
세아는 멀리서 촉수 몬스터를 상대하는 이준과 리웨이를 흘끗 본 다음 덧붙였다.
“여기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아.”
14.17
으스스한 늪지대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세아는 모여든 파티원 앞으로 핸드폰을 내놓았다. 출시된 지 2년쯤 지난 모델로, 관리를 잘 했는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도 깨진 부분도 보이지 않았다.
“비밀번호로 잠겨 있어서 누구 핸드폰인지는 모르겠어.”
세아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이준과 카일리, 리웨이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지 않으려 애쓰며 세아의 말에 집중하는 척했다.
“분명 얼마 전에 떨어뜨리고 간 거야. 봐, 배터리도 거의 그대로야.”
표시된 배터리 잔량은 86%였다. 세아는 핸드폰을 이리저리 만져 보고 혹시 잠금을 풀 방법은 없나 살폈지만 소득은 없었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이 핸드폰에 자기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리웨이였다.
“그 사람이 여기서 죽었을지도 모르잖아. 우리보다 앞서가고 있다고 해도 목적이 뭔지 지금은 알 수 없고. 그럼 빨리 뒤쫓아 가는 게 나을 거야.”
“협회에서 보낸 헌터일 수도 있죠. 어쨌든 리웨이 말이 맞아요. 쫓아가서 정체를 알아내는 게 먼저겠네요.”
세아도 미련을 버린 듯 핸드폰 액정을 닦아 짐 속으로 던져 버렸다.
“일단 다들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얘기했어요. 그럼 올라가는 길 마저 찾을까요?”
카일리와 리웨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멀어졌다. 이준도 등을 돌려서 가려 했는데, 세아의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이준아, 잠깐 이리 와.”
이준은 조금 긴장한 채 세아 쪽으로 걸어갔다. 축축한 바닥을 딛고 선 세아의 눈이 자신을 빠르게 훑는 게 느껴졌다. 혹시 뭔가 알아차린 걸까. 앞선 사람들이 핸드폰을 흘리다니 최악의 상황이다. 이렇게 일찍 들킬 줄은 몰랐는데.
긴장을 감추며 다가가니 세아가 이준의 팔을 살짝 잡았다. 이준은 의도를 알아차리고 몸을 낮추었고, 세아가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조심해.”
“…….”
“협회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이렇게 타이밍 맞게 우리 앞에 있을 리가 없어. 우리 일정이 새어 나간 게 아니라면 누가 정보를 저쪽에 전한 거겠지.”
세아는 눈동자를 움직여 이미 멀리까지 걸어간 카일리와 리웨이의 뒷모습을 살폈다.
“의심하고 싶진 않아……. 믿기로 했으니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넌 우리 중에 가장 약하니까 네 몸 잘 챙겨.”
“네, 누나.”
이준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세아는 명확한 대답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다시 당부했다.
“자꾸 다치지 마. 알겠어?”
던전에 왔는데, 헌터인데, 다치지 말라고 한다. 그 막막한 요구가 좋아서 이준은 조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