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101화 (101/112)

101화.

“나 걱정해요?”

“당연하지, 넌 약하니까.”

“언젠 나보고 강하다고 했잖아요.”

세아는 눈을 깜빡이며 이준과 마주 보았다. 아득한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이 선하고 어여뻤다. 그가 떨면서 다가와 서툴게 입술을 겹치던 날이 바로 어제인 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세아는 입술을 움직여 뱉었다.

“그래서 더 걱정이야.”

아마 그는 부상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살기를 각오하면 죽고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는 말도 있지만, 각오가 어떻든 죽음은 공평하게 닥쳐온다. 세아는 죽음의 그림자가 두려움 없는 이준의 눈을 뒤덮을까 두려웠다.

“어쨌든 가자.”

히든 퀘스트만 클리어하고 나면 이 불안도 사라질까.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움직일 시간이었다.

14.18

4층, 5층, 6층을 차례로 지나 7층에 다다랐다. 세아는 이제 앞선 사람들이 남겼을 흔적을 찾으며 상대의 정체를 가늠하려 했다. 이준과 나머지 파티원은 필사적으로 그런 세아를 모르는 척하며 태연한 기색으로 무장했다.

리웨이가 이준에게 슬쩍 다가와 물었다.

“괜찮은 거야? 그 사람이 핸드폰 잃어버려서 너랑 연락 안 되는 거 아니야?”

“모르겠어요. 전화했다가 괜히 저 핸드폰이 울리면 누나가 알아차릴 테니…….”

“그냥 세아한테 솔직하게 말하는 건 어때?”

“안 돼요.”

이준은 딱 잘라 거절하고 멀리서 기계 장치를 이리저리 만져 보는 세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복잡한 회로와 전지를 들여다보는 진지한 옆얼굴을 보며 이준은 반복해 말했다.

“말할 필요 없어요. 리웨이도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네 일이고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니 존중한 것뿐이야.”

이준은 의외라는 얼굴로 리웨이를 보았다. 그녀에 대한 특별한 감상은 없었는데, 세월이 나이답게 스민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더 진중해 보였다. 이준은 그녀와 대화하다가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고맙네요. 그런 줄은 몰랐는데.”

“나중에 세아가 알면 화내지 않겠어?”

“모르겠어요. 그래도 일단…….”

말을 잇던 이준이 눈을 크게 떴다. 벽에 달린 장치를 만지작거리던 세아가 갑자기 맹수를 발견한 사슴처럼 번쩍 고개를 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눈빛은 포식자의 것이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장치를 등지고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누나?”

이준이 목소리를 높여 불렀지만 세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고속 이동 스킬을 사용해 달리자 공기가 뺨을 스치고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주하며 세아는 확신했다.

분명히 봤다. 기둥 너머로 어른거리는 낯선 그림자.

세아는 몇 초 만에 가고자 하는 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둥 뒤를 보았을 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세아, 왜 그래?”

카일리가 가장 먼저 다가와 물었다. 진정하라는 듯 세아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기까지 했다. 세아는 그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몬스터도 아니었다. 빠르게 사라지던 검은 운동화. 그건 분명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땅으로 꺼진 듯 자취를 감출 수 있을까. 혹시…….

세아는 사용한 지 오래된 스킬을 조용히 발동시켰다.

“감지.”

눈앞의 풍경이 파도 출렁이듯 일렁거리더니 곧 푸르게 변했다. 온도를 감지하는 스킬로, 등급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쓸 만했다. 돌바닥과 돌기둥은 차갑고, 곁에 선 카일리는 뜨거워서 붉은빛이다. 세아는 신중하게 전방을 주시했다.

다음 순간, 세아가 앞으로 몸을 날렸다.

카일리의 눈에는 그녀가 펄쩍 뛰어 허공을 움켜쥔 것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세아는 보이지 않는 밧줄이라도 잡은 듯 그대로 팔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군 건 세아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의 여자 하나가 세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세아 역시 그 사람의 몸을 받아 내듯 아래 깔리며 완전히 균형을 잃었다. 세아는 자기 품에 넘어진 여자를 퍽 밀치고 그대로 멱살을 잡아챘다.

“찾았다, 너 대체……!”

그러나 세아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까지 헐떡이는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 익숙했다.

기르기만 하고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머리 스타일에, 이목구비마저 평범했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쉽게 묻힐 인상이었다. 그러나 세아를 바라보는 표정과 눈빛은 더없이 특별했다. 갑자기 붙잡혀 넘어졌는데도 조금 놀란 기색만 있을 뿐 당황의 흔적은 없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달려오는 이준과 리웨이의 발소리를 들으며 세아는 멍하게 입을 벌렸다.

“혜진 씨?”

분명 자신이 아는 김혜진이었다. 이전 생에서 만났고, 또 이준의 과거에서도 보았던 바로 그 김혜진. 이번에는 연락할 일이 없어 전화를 걸거나 만나자고 하지 않았는데, 지금 그녀가 왜 여기 있는 것인가.

“혜진 씨 맞아요?”

맞는 걸 알고도 바보처럼 그렇게 묻고 말았다.

혜진은 헌터가 아니다. 슬라임에게 죽을 뻔한 미각성자다. 길드 소속이긴 하지만 사무직이고, 뒤늦게 각성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것이며 대체 어떻게 7층까지 올라왔을까.

“누나, 왜…….”

급히 달려왔던 이준의 말도 뚝 끊어졌다. 그 역시 혜진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세아는 이 놀라움과 당혹을 공유할 그에게 휙 고개를 돌렸는데, 이준의 표정이 기묘했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낭패한 얼굴이었다. 세아가 미세하게 얼굴을 찌푸린 순간, 세아에게 밀려 바닥에 넘어졌던 혜진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어…… 안녕하세요, 세아 씨.”

세아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서 그냥 조용히 스마일맨 경보기를 켰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한숨을 쉬며 혜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14.19

혜진은 끝까지 모든 게 우연이라고 우겼다.

“길드에서 이 던전을 조사하라고 보낸 거예요.”

“미각성자를 던전에 들여보냈단 말이죠?”

“아니, 길드 소속 헌터랑 같이 보냈죠. 그런데 그 헌터가 늪 몬스터한테 당해서 죽고, 혼자 여기까지 온 거예요. 모습을 감추는 물약이 잔뜩 남아서…….”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세아는 드물게 혜진을 대하며 코웃음을 쳤다.

혜진에게 잘해 주고 싶은 건 사실이다. 지나간 생에서 그녀는 먼저 이준을 찾아와 협력을 제안했다. 혜진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세아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비웃거나 나쁘게 대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세아는 조곤조곤 반박했다.

“그럼 던전 밖으로 바로 나가야지, 왜 여길 헤매고 다녀요. 게다가 날 발견했으면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 왜 숨고요.”

“꼭 조사해야 할 게 있어요. 길드의 지시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문제라고요. 그리고 세아 씨를 피한 건…….”

혜진은 자신 없는 투로 말을 흐리며 슬쩍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절 보면 여기서 내보낼 거잖아요.”

“당연히 내보내죠. 미쳤어요? 미각성자가 죽겠다고 여길 와요? 미각성자가 던전에 들어왔다가 신고당하면 자살 미수자 취급받는 거 몰라요?”

바로 내보내야겠다. 일단 7층까지는 대강 정리해 뒀으니 혜진을 내보내고 다시 돌아오면 된다. 세아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갈 계획을 짰다. 혜진의 ‘중요한 문제’가 뭔지는 모르지만, 그게 목숨보다 중요할 리 없다.

“세아 씨.”

그때, 혜진이 세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진짜 중요한 일이에요. 저 좀 데려가 주세요.”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죽으면 소용없어요.”

“세아 씨가 지켜 주면 되잖아요.”

세아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행동을 멈추었다.

혜진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녀는 정말로 절실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침착하고 차분하더니, 세상이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조차도 더없이 태연하더니, 지금은 다르다. 세아는 조금 누그러진 투로 물었다.

“그 중요한 일이 뭔데요?”

대체 뭐기에 혜진이 이렇게까지 할까?

“말 못 해요.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일이에요.”

세아는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혜진은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답지 않은 고집을 부리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문제는…….

세아가 슬쩍 고개를 틀어 이준을 돌아보았다.

말끔히 정리된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없다.

그런데도 가슴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이 이상한 느낌……. 정체를 규정할 수 없는 꺼림칙함. 원치 않는 결말을 향해 눈 가린 경주마처럼 달려가다가 갑자기 무거운 안장과 고삐, 올라탄 기수를 의식한 기분이었다.

멀쩡한 척하고 있지만 망가진 정신 속으로, 한 줄기 의구심이 스민다. 세아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이대로 혜진을 보내면 마음 한구석이 계속 찜찜할 듯했다.

결심을 마친 세아가 혜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어요. 대신 붙어서 따라와요.”

지금 알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정면으로 부딪쳐서 알아 낼 것이다. 세아는 번지는 두통을 무시하며 성큼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짐 안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혹시 이게 혜진의 것이거나 그녀와 함께 왔다 죽었다는 헌터의 것일까 고민했다.

어쩐지 선뜻 돌려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던전 한가운데서 만난 미각성자 혜진. 좋지 않은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건 그저 자신이 예민해진 탓일까?

바로 그때, 이준이 혜진에게 다가가 불쑥 물었다.

“김혜진 씨, 혹시 핸드폰 잃어버렸어요?”

“네? 네, 맞아요. 늪 지형에서…….”

“우리가 주웠거든요.”

친절하게 대답한 이준이 세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핸드폰 하나 준다고 큰일이 날 리 없지만 무언가 기분이 찜찜했다. 세아는 짐에서 말끔하게 닦은 핸드폰을 꺼내 혜진 쪽으로 내밀었다. 핸드폰을 받아든 혜진이 세아를 향해 조금 수줍은 듯 미소를 보였다.

“고마워요, 세아 씨. 여기 다 기록했는데,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잃어버려서 난감했거든요……. 핸드폰 잃어버린 거 처음이에요.”

혜진과 자주 대화하진 않았지만 평소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그녀 역시 던전이라는 환경 때문에 흥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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