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14.20
7층을 지나 8층, 9층을 지날 때도 혜진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던전 안을 조사했다. 다른 헌터가 몬스터를 처리하고 얻은 아이템도 핸드폰에 꼼꼼히 기록하고 속성 확인까지 부탁했다. 어떤 몬스터가 튀어나와도, 어떤 트랩이 작동해도 당황하지 않는 모습은 영락없이 혜진이었다.
그러나 세아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계속 찜찜하게 울렁거렸다. 그녀는 옆에서 11층으로 가는 통로를 찾느라 퍼즐 장치를 조작하는 이준을 톡톡 쳤다. 트랩일지도 모를 장치에 매달려 있던 이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준아. 넌 어떻게 생각해.”
“네? 뭘요?”
이준의 손은 여전히 퍼즐 장치에 닿아 있었다. 세아는 수십 개의 겹쳐진 원을 돌려 모양을 맞추는 흔한 형식의 퍼즐을 보다가 혜진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혜진 씨 말이야. 스마일맨 경보기는 작동하지 않는데, 뭔가 이상하잖아. 안 그래?”
“잘 모르겠는데요……. 중요한 이유가 있겠죠. 게다가 김혜진 씨는 과거에 항상 우릴 도와줬잖아요. 해가 될 것 같진 않아요.”
세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준을 바라보았다. 의심 가득한 시선을 받고도 이준은 순진하게 고개를 기울여 왜 그러느냐는 의사를 전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점이 수상하다.
물론 혜진은 과거에 늘 세아와 이준을 도왔다. 이번에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의심할 이유는 사라진다. 그렇게 손쉽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세아는 혜진을 처음 발견했을 때 본 이준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했다.
“너 혜진 씨 보고 놀라긴 했어?”
이준의 눈이 당혹으로 동그래졌다. 너무 추궁하는 투로 물었다는 걸 깨달은 세아는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알고 있었던 것 같은 표정이어서.”
이준은 한동안 대답을 미루고 세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도 놀라지 않으리라, 세아는 침묵의 시간 속에서 다짐했다.
이준이 차분하게 건넨 답은 예상 밖이었다.
“몰랐지만 왠지 이렇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은 있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보였나 봐요.”
“느낌?”
“왠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 것 같은 느낌……. 그러니까 혜진 씨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았어요. 아마 김송숙 협회장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분도 여기 있었을 것 같아요. 최두정도. 그냥, 말로 잘 설명 못 하겠지만요.”
고작 그런 느낌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고?
세아는 무언가 줄곧 이상하게 다가왔던 이준의 태도를 복기했다. 갑자기 데이트 하러 가자고 조르고, 마지막일 것처럼 인사하고, 혜진의 핸드폰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세아는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너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으아아아악!”
그때, 귀를 찢는 비명에 세아와 이준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세아는 자기가 하려던 말까지 잊고 곧장 소리 난 쪽으로 달음질했다. 이준도 재빠르게 뒤를 따랐다.
멀지 않은 곳에 수라도가 펼쳐져 있었다. 마치 싱크홀이 나타난 듯 던전 바닥이 원형으로 움푹 꺼진 게 보였다. 운이 없어 혜진이 섰던 땅이 무너진 듯, 그녀는 구멍 가장자리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다리를 버둥거렸다.
이미 카일리와 리웨이가 혜진의 양팔을 붙들고 끌어 올리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러나 두 헌터가 당기는데도 혜진의 몸은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아는 숨을 고르고 구멍 안을 들여다보았다. 소름이 등허리를 타고 목덜미까지 치솟았다.
수백, 수천 개의 검은 손이 구멍 속에 있었다. 던전 지하까지 꺼진 듯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팔이 올라와 혜진의 발목과 종아리를 붙잡고 끌어 내리려 들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듯 반투명한 손이었으나, 마치 괴물의 팔처럼 힘줄이 도드라지고 손톱이 날카로웠다.
수천 개의 손이 덕지덕지 달라붙자, 종잇장처럼 연약해 보이는 손톱에 혜진의 청바지가 찢어지고 운동화가 벗겨졌다. 찢어진 바지 틈으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희생자를 낚아채고자 하는 수천의 물귀신 같았다.
세아의 귀에 카일리의 외침이 꽂혔다.
“어둠 속성이야! 세아, 내가 처리할 테니까 이 사람 좀 붙잡아 줘!”
카일리가 외치는 소리에 세아는 얼른 그쪽으로 뛰어갔다. 카일리가 붙들고 있던 혜진의 오른팔을 잡으니, 카일리는 벌떡 일어나 구멍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 어둠들을 흐리게 만들면 약해질 거야! 그때 끌어 올려!”
끌어당기는 힘이 굉장해서 세아도 리웨이도 안간힘을 다해 버텨야 했다. 혜진은 평상시의 침착함을 잃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버둥거렸는데, 그러는 바람에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점점 더 미끄러지는 중이었다.
미각성자 혜진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니 세아는 거기까지 신경 쓰지 않았는데, 함께 혜진의 팔을 당기던 이준이 돌연 외쳤다.
“혜진 씨, 핸드폰!”
하지만 팔과 다리를 모두 붙들린 혜진이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었다. 혜진을 놓은 이준이 과감하게 땅에 엎드려 힘껏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이를 악물고 혜진의 바지 뒷주머니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핸드폰을 낚아챘다.
이준은 그걸 안전하게 짐 속에 넣은 후에야 혜진에게 돌아왔다. 아까처럼 자기 옆에 앉아 혜진의 팔을 당기는 그를 보며 세아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도대체 핸드폰이 뭐라고 이런 위급 상황에 저런 짓까지 한단 말인가.
“카일리, 멀었어?”
목소리를 높여 외친 순간, 세아는 보았다.
카일리의 손으로 어둠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화재 현장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손으로 빨아들이는 듯했다. 처음에는 한 줄기, 두 줄기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허리케인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어둠이 카일리의 손바닥으로 들어갔다.
몸에 무리가 가는지, 카일리는 이를 악물고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한 발을 앞으로 뻗었다. 정말 폭풍이 몰아치는 듯 카일리의 짧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마구 흔들렸다.
세아와 리웨이, 이준도 마찬가지였다. 세아는 제 머리카락이 얼굴을 마구 때리는 걸 느끼며 혜진의 손목을 고쳐 잡았다. 다행히 혜진은 패닉에 빠지지 않고 숨을 헐떡이며 호흡을 안정시키려 하고 있었다.
얼마나 견뎠을까, 세아는 아래서 당기는 힘이 느슨해진 걸 느꼈다. 그녀가 리웨이와 이준을 향해 소리쳤다.
“셋 세면 힘껏 당겨요. 하나, 둘, 셋!”
마치 깊은 뻘에 잠긴 사람을 구출하듯, 세 사람은 일제히 힘을 주어 혜진을 끌어냈다. 마침내 혜진의 몸이 쑥, 안전한 지상으로 올라왔다.
“헉, 헉…….”
바닥에 엎드려 숨을 몰아쉬는 혜진의 다리는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호랑이의 발톱에 긁혀도 사람 꼴이 이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덜 갈린 톱으로 난도질해 놓은 듯 살점과 거죽이 너덜너덜했다. 다리 앞뒤 할 거 없이 모두 피투성이였고, 아직도 피가 울컥울컥 솟아서 어디가 상처고 어디가 멀쩡한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검은 바지는 이미 걸레나 다름없었고, 혜진이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크고 작은 살점이 조각조각 바닥에 흩어졌다. 어둠을 모두 무력화하고 일행 쪽으로 달려온 카일리가 입을 막으며 움찔할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고통을 참으며 덜덜 떠는 혜진을 보고 이준이 재빨리 그녀의 몸에 손을 얹었다.
“치유!”
움푹 파인 상처 부위에 뻘건 새 조직이 차오르고, 힘줄과 근육이 덮이고 가죽이 원래대로 봉합되었다. 언제 봐도 신기한 광경에 카일리와 리웨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세아 홀로 식은땀을 닦으며 구멍을 노려보았다.
이런 던전은 들어 본 적도 없다.
어둠 속성 몬스터는 드물지 않지만, 이렇게 던전 바닥이 꺼지는 현상은 한 번도 보고되지 않았다. 물론 갑자기 발아래의 땅이 덜컹, 하며 열릴 때는 있지만, 이 싱크홀의 범위는 너무 광범위하고 비뚤비뚤했다. 정말 재난이 벌어진 것처럼.
아는 시스템의 농간에 이를 갈았다.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그때, 혜진이 덜덜 떨면서 몸을 일으켜 세아도 그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앉은 채로 돌아보니 혜진이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닦으며 머리카락을 떼어 내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미각성자라, 세아의 마음에서 잠시 의심이 가셨다.
모두가 위기를 넘긴 후의 탈력감에 잠겨 있는 사이, 리웨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봐요, 그냥 이쯤 했으면 밖으로 나가요. 진짜 죽을 뻔했다고요.”
그 순간 세아는 분명 목격했다.
혜진이 슬쩍 시선을 돌려 이준과 눈을 맞추는 걸. 치유하느라 혜진 바로 맞은편에 있던 이준이 아주,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흔드는 광경까지 전부 보았다. 그의 선명하고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한 점 떨림도 없었으나 이준은 분명 혜진에게 대답했다.
나가지 마세요.
“전 안 나가요.”
혜진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이준에게서 시선을 떼며 리웨이를 바라보았다. 그 광경을 모두 보고 있던 세아가 구멍을 완전히 등지고 서며 주저앉은 혜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혜진 씨, 정말 죽을 수도 있어요.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말해 주면 내가 나가서 전해 줄 테니까…….”
“누나!”
이준이 경고하듯 외친 소리에 세아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지금 나보고 물러나 있으라고 성질낸 거야? 그러나 이준의 시선이 자기 등 뒤로 간 걸 확인한 순간, 서늘한 손이 뒷덜미를 낚아챈 순간, 어떤 감정을 느낄 틈도 없이 몸이 붕 떠올랐다.
“세아 누나!”
이준이 절박하게 외치며 세아 쪽으로 손을 뻗었다. 세아도 본능처럼 그쪽으로 팔을 내밀었지만, 차가운 손가락 끝이 간신히 닿았다 멀어질 뿐이었다.
세아는 자기 발밑으로 파티원과 혜진이 아득하게 작아지는 걸 보았고, 마치 지상에서 허공으로 번지점프를 한 듯 몸이 상승했다. 망연하게 입을 벌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두의 모습이 비현실적인 그림처럼 느껴졌다.
“이세아!”
리웨이가 외치며 뛰어오는 모습에 세아는 멍하게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멍에서 불쑥 튀어나온 한 줄기 어둠의 팔이 자신을 낚아채 안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홀로 키 큰 나무처럼 우뚝 솟은 팔이 보였고, 자신의 몸이 허공에서 깊은 어둠 속으로 다시 추락하는 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마구 흔들려 시야를 가렸다.
이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 손에 든 정화 속성 검을 휘둘러 볼 틈조차 없었다.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 경험해 본 적 없는 낙하의 속도.
이준이 구멍을 향해 달려오는 걸 본 순간, 세아의 몸이 그대로 끝없이 추락했다.